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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동구청소년수련관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까지 10분을 걸었다. 9월 중순의 햇살은 따가울 정도로 억셌다. 평지를 걷는데도 옷에 땀이 뱄다. 게다가 박물관은 '달동네'라는 이름에 걸맞게 만만찮은 오르막길로 이어져 있었다. 오르막길 정상에 위치한 박물관에 도착하니 아래로 송현동과 송림동이 훤히 보였다. 지난 11일 이보라(36·사진) 학예사를 만나 박물관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그리운 이름, 수도국산 달동네
  
수도국산 박물관 내 주거구역 모습.
 수도국산 박물관 내 주거구역 모습.
ⓒ 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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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이름 수도국산 달동네. 지금도 문 열고 골목길을 나서면 구수한 밥 짓는 냄새와 함께 그리운 이가 나를 맞이해 줄 것만 같습니다. 그 달동네의 옛 골목은 지금…사라지고 없습니다'

박물관 홈페이지에 소개된 글이다.

"올라오신 뒤편은 그래도 경사가 완만한 편이예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전에 앞쪽은 훨씬 경사가 급했다고 해요. 개발돼 지금은 없어졌지만요."

올라오기 힘들었다는 말에, 이 학예사가 들려준 이야기다. 수도국산의 원래 이름은 만수산(萬壽山) 또는 송림산(松林山)이다. 바다가 매립돼 공장이 생기고 사람들이 몰려들기 전에 이 언덕은 바닷가의 조용한 소나무 숲이었다.

인근의 송현(松峴, 솔 고개)동, 송림(松林, 소나무 숲)동의 지명이 유래한 것도 이 때문이다. 소나무를 베어내고 언덕에 정착해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달동네의 역사는 시작됐다.

일제강점기 인천에 살던 조선인들은 일본인에게 상권을 박탈당하고 중국인에게는 일자리를 빼앗기고 나서 동구 송현동·송림동으로 모여들었다. 비탈진 소나무 숲은 가난한 사람들의 보금자리로 변모했다.

이어 한국전쟁으로 고향을 잃은 피란민들이 몰렸고, 1960~1970년대 산업화 시대에는 일자리를 찾아 모여들었다. 산꼭대기까지 허름한 집들이 빼곡히 들어차면서 달동네에는 300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1950년대 말과 60년대 초에 도심에서 쫓겨난 판자촌 주민들은 정부가 정한 지역에 임시 천막을 치고 살았다. 방에 누우면 밤하늘의 달과 별이 보인다고 해서 '달동네'라는 말이 생겨났다.

송림산이 수도국산으로 바뀌게 된 데에는 근대 개항기 인천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인천은 개항 후 증가한 인구에 비해 물이 부족해 늘 고민이었다. 일제는 1906년 수도국(水道局)을 신설하고 인천과 노량진을 잇는 상수도 공사에 착수했다.

'수도국산'이라는 명칭은 이곳에 수돗물을 담아두는 배수지(配水池)를 설치하면서 생겼다. 1908년에 제작된 송현배수지 제수변실은 배수관의 단수와 유압을 조절하는 밸브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지금은 인천시 문화재 자료 23호로 지정돼있다.

"달동네는 인천의 다른 지역에도 있었어요. 지금은 재개발이 많이 됐지만, 남구나 서구 등지에도 있었죠. 1960~1970년대 인천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이 동인천의 중앙시장과 양키시장 주변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동인천 근처인 수도국산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고, 동인천과 함께 유명해졌죠."

추억 속으로 시간여행
   
수도국산 박물관 내 상가구역 모습.
 수도국산 박물관 내 상가구역 모습.
ⓒ 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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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은 2005년 10월 25일에 개관한 근현대생활사 전문 박물관이다.
이 지역엔 1990년대부터 정부 주도의 재개발 움직임이 있었다. 2003년에 아파트단지를 지으면서 동구와 지역 문화단체는 근현대 수도국산의 이야기를 담은 박물관을 만들자고 했다. 이에 한국토지주택공사가 박물관을 지을 공간과 시설을 기부채납 했고, 동구에서는 기억 속에서 잊혀가는 수도국산 달동네의 삶을 되살리고자 옛 달동네 터에 박물관을 건립했다.

그렇게 만든 박물관 상설전시실에는 연탄가게·솜틀집·이발관·구멍가게 등을 재현한 상점코너와 여럿이 사용했던 공동수도·공동화장실이 있다. 뿐만 아니라 달동네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방과 부엌을 당시 모습 그대로 꾸몄다.

"1971년께 수도국산 달동네의 모습을 재현했습니다. 가게나 사람들 형상도 실존했던 것을 기본으로 했고요. 동네 주민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구성했고, 그들로부터 기억과 자료를 모아 마을을 꾸민 거죠."

그래서인지 박물관을 찾는 부모 세대는 정겨운 시절의 추억 속으로 여행을 떠나고, 자식 세대는 열심히 살았던 부모님을 떠올리며 삶의 현장을 체험할 수 있다.

이밖에도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은 재미 몇 가지를 더 준다. 달동네에 살았던 네 사람을 재현해놓은 코너인데 폐지수집가 맹태성씨, 연탄가게 주인 유완선씨, 은율솜틀집 주인 박길주씨, 대지이발관 주인 박정양씨가 그들이다.

"박물관에서 자원봉사하시는 남기영씨라는 분이 계시는데요, 그 분이 이 지역에서 오래 사셨는데 당시 잘 사셨나 봐요. 티브이가 흔치 않았던 시절에 동네 사람들이 그 분의 집에 모여 박치기로 유명한 김일 레슬링 선수의 경기를 구경하곤 하셨대요. 그 분의 텔레비전을 기증받아 박물관에 설치했고, 김일 선수의 레슬링 장면을 계속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매력은 곳곳에 체험코너가 있는 것이다. 물지게 지기, 옛날 교복 입어보기, 연탄 갈기, 온돌방 체험 등이다.

이 학예사는 "아이들이나 어른들 모두 반응이 좋아요. 주중에는 학생들이 많이 찾아오고 주말에는 가족 단위 관람객들이 많은 편입니다. 박물관에 전시한 내용들이 어렵지 않고 친근하거나 신기하게 느껴져 재밌어합니다. 특히 방문객들이 체험하면서 박물관과 더 친해지는 것 같아요"라고 했다.

연간 8만 명이 방문한단다. 친근한 분위기와 실제를 재현한 것이 매력인 이 박물관에는 독특한 에피소드가 있다. 한 방문객이 공동변소를 진짜 화장실인줄 알고 일을 보러 들어가려했다는 것이다. 사실적으로 재현하고자 애쓴 이들의 덕분일까?

"이민을 갔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신 분들이 이곳에 오시면 많이 좋아합니다. 정말 똑같이 해놨다고 하시더라고요."

기획전시 '인천의 영화광'

이보라 학예사
 이보라 학예사
ⓒ 김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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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에서는 8월 14일부터 '인천의 영화광'이라는 제목으로 특별기획전을 하고 있다.

"이광환님이라고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사셨던 분이 계세요. 그 분이 수도국산에 사시면서 계속 일기를 써오셨대요. 2007년에 그분의 일기를 전시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일기를 다시 보니 영화 얘기가 많이 나오더라고요. 언제, 어디에서 영화를 개봉했으며 배급사까지 자세히 적혀 있는데, 400편은 보신 거 같아요."

변전소에 근무했던 이광환씨는 1945년부터 70년까지 개봉한 영화들은 대부분 본 듯했다. 이번 전시회에선 1950년대 개봉한 영화를 중심으로 한 포스터 6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50년대 돌풍을 일으켰던 '자유부인'이나 '에덴의 동쪽', '이유 없는 반항' 등의 포스터를 유물 대여자에게 빌려 전시하고 있습니다."

1950년대 송현동에서 촬영했던 '사랑'이라는 영화의 포스터도 전시해놓았다. 이씨는 그 당시 영화를 찍는 세트장에도 구경 갈만큼 영화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전시회 제목처럼 그는 '영화광(狂)'이었다.

"이 박물관은 이곳만의 특성을 잘 살렸어요. 공립박물관 최초로 저희가 근현대박물관을 만들고 나서 전국적으로 근현대를 모티브로 한 박물관이 폭발적으로 늘었어요. 인천만 보더라도 중구의 '자장면박물관'이나 '이민사박물관' 등이 생겼어요. 부산에 있는 '임시수도기념관'에서는 인천을 방문해 벤치마킹하기도 했고요."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은 개관한 지 10년이 넘었다. 이제 안정화 단계이나 만족하지 않고 예산을 확보해 전시실을 늘리고 더 다양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

박물관에 근무하면서 인천에 살게 된 이 학예사는 "이 동네는 정이 많은 거 같아요. 인상적인 것은 퇴근길에 보면, 동네 주민들이 모여 삼겹살 구워먹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는 거예요. 가을에는 고추를 말리는 모습도 보고요. 이곳에서는 계절별로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다양한 풍경을 보여줍니다."

경사진 길을 내려가노라니 눈에 들어오는 송림동 전체가 박물관처럼 느껴졌다.

덧붙이는 글 | <시사인천>에 실림



태그:#수도국산 박물관, #달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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