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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안 될까요?"
"선생님 이미 작품은 모두 모아서 보냈는데요!"
"그 분이 갑자기 심장이 아파서 병원에 가느라 이제 가져오신 건데요. 꼭 좀 접수하면 좋겠어요."
"그럼 선생님께서 직접 그 작품을 접수기관 책임자에게 갖고 가 보세요."

이 작품을 만드신 할머니는 연세가 80세가 다 되어 간다. 뒤늦게 한글서체 중에서 궁체를 배워서 차분히 공부하셨다. 교재대로 진도를 나가시다가 어느 날 손주들에게 보여줄 만한 좋은 내용을 작품으로 쓰고 싶다고 해서 도와드렸다. 할머니께서 그렇게 작은 작품을 정성들여 만드시는 것을 보고 내가 반쯤 지나가는 이야기로 "이렇게 정성들여 꾸준히 쓰신다면 좀 더 큰 작품을 만들어서 대회에 내보내셔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서예실에 나와서 열심히 붓글씨를 쓰는 어르신들
 서예실에 나와서 열심히 붓글씨를 쓰는 어르신들
ⓒ 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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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더니 그 말을 귀담아 들으시고 사람이 있든 없든 매일 기관 서예실로 나오셨다. 가로 70cm, 세로 140cm의 전지 종이에 엎드려서 수백 자 글씨를 씨 뿌리듯 엎드려 써내려 가셨다. 글자의 내용은 공자의 '삼계도'였다.

"일 년 농사의 근간은 봄에 있고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있고..."

할머니는 노환이 있는 분이었다. 그 할머니뿐만 아니라 내가 지도한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간암, 위암, 동맥경화, 대상포진 등 다양한 병력을 갖고 있다. 서울에서 항암치료를 받고 오시고도 며칠 후면 서예실에 나오신다. 정신력으로 한 글자 한 글자를 써내려 가신다.

리본을 자르며 청주실버문화예술제 출품작 전시를 축하하고 있다.
 리본을 자르며 청주실버문화예술제 출품작 전시를 축하하고 있다.
ⓒ 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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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원 치료가 일상인 분들, 붓을 놓지 않는 이유

그 분들이 서울의 병원에 오고 가는 것은 마치 이웃마을에 마실 다녀오시는 것처럼 일상적인 풍경이다. 암에 걸린 후 반응은 연령대별로 천차만별이라고 하지만 70~80대 어르신들은 암을 맞이하고 치료하는 것을 마치 오랜 동행처럼 여긴다.

황혼기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노환에 순응하는 것일까? 아니면 길고 긴 투병을 한 뒤에 찾아온 체념일까?

그처럼 노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루의 생활을 알차게 해나가시는 자세는 본받고 싶다. "내일 지구가 망하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서양속담을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작품을 만드는 어르신들의 모습은 참 진지하고 경건하게까지 보인다.

그것은 무용가가 무대에서 무용을 하거나 성악가가 혼신을 다해 독창을 부르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예술이란 반드시 특정한 분야를 하는 것만이 아니다. 인생의 종착역에 이르러서 이 작품이 마지막 작품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혼신을 다하면 그것 또한 예술의 경지와 비슷하리라. 그 작품에는 어르신들의 집중력과 정신력이 돋보인다. 그 정성이 주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어떤 어르신은 위암 수술만 2번을 받으셨다. 새벽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통증에 진통제를 먹고 통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리신다. 그 기다리는 시간이 참 길게 느껴지신다고 하셨다. 그러나 새벽에 규칙적으로 벼루에 먹물을 준비하고 붓을 잡고 글씨를 쓰다보면 금세 통증도 못 느끼고 아침을 맞이하신다.

평소에는 좀 더 나은 작품을 쓰고 싶은 욕심에 계속 엎드려 쓰다 보니 많이 힘드셨다고 한다. 그럴 때면 옆에서 지켜보던 부인이 다음과 같이 걱정을 하신다고 한다.

"에구! 영감! 아픈데도 그렇게 붓 잡고 엎드려 쓰는 것을 보니 대신 해줄 수 있으면 내가 대신 작품 만들어 주고 싶은디..."

대신 해줄 수 없던 부인은 맛있는 것을 부지런히 만들어 어르신에게 드렸다. 어르신은 청주시에서 주최하는 전국대회에서 젊은 사람들을 제치고 한글부에서 참방상을 받으셨다. 시상식 때는 주최 측에서 옛날 과거행사를 재현한다고 마치 장원급제 때 입는 옷 마냥 백제의 전통 옷을 어르신께 입혔다. 그렇게 옷을 차려 입고 국악취타대의 연주 아래에 예식을 치르셨다. 그 후 어르신은 몇 달 동안 신나는 기운으로 평소의 지병마저 누르고 흥에 취해 지내셨다.

전통복장을 입고 상장을 수여받고 있는 할아버지
 전통복장을 입고 상장을 수여받고 있는 할아버지
ⓒ 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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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최 측에서 마련한 옷을 입고 사진을 찍으신 할아버지
 주최 측에서 마련한 옷을 입고 사진을 찍으신 할아버지
ⓒ 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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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저 삶의 자세를 본받고 싶다

할아버지처럼 할머니의 마지막 작품도 제출을 해드리고 싶었다. 이 할머니의 작품은 완성도나 성숙도가 떨어졌다. 하지만 작품 마감을 앞두고 심장질환으로 병원에 다니게 되셨다. 결국 몇 달 동안 준비한 작품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했고, 제출조차 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제출을 해서 합격선에 들면 한동안은 분명 기분이 좋으시리라. 좋은 기분은 좋은 기운을 불러 일으켜서 할머니의 투병에도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할머니께 지금까지 완성한 작품들을 모두 가져오시게 했다. 그 중에 제일 나은 것을 골랐다. 그 작품에 옛날 책 분위기가 나도록 행간에 세로 회색 줄을 쳤다. 세련되게 보이게끔 바꾸고 낙관도 찍었다.

그리고 담당자를 설득하고 부랴부랴 해당 접수기관의 과장을 찾아가서 경위를 설명했다. 다행히도 주최 측 담당과장은 작품을 받아 주었고 충북실버문화예술제에 무사히 작품을 접수시킬 수 있었다.

나는 수업시간에 할머니에게 말했다.

"많이 몸이 안 좋으신데 그래도 씨를 뿌렸으니 이제는 잘 쉬시면서 어떤 열매가 열리는지 기분 좋게 기다려봐요! 그리고 내년에는 작품 소재를 미리 잘 준비해서 멋진 궁체의 씨앗을 함께 뿌려요."

나는 이번에 작품을 낸 그 할머니가 틀림없이 입상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러기를 기도한다. 몇 군데 심사를 해 본 나의 경험으로는 좀 서툴더라도 한 자 한 자 정성이 깊이 들어간 글씨는 공감을 일으킨다. 심사위원들은 그 가능성을 알아본다.

자신의 작품 앞에 선 할머니
 자신의 작품 앞에 선 할머니
ⓒ 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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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해 한 해 작품을 하신 어르신들은 마지막 황혼의 빛을 장렬하게 발한다. 지금도 선명히 기억나는 어떤 어르신은 뇌졸중으로 오른팔과 오른다리가 모두 마비되셨다. 하지만 나와 할머니가 종이를 접어주고 먹을 갈아주면 왼손으로 붓을 잡고 공부를 하셨다. 그리고 서울에 작품을 제출해서 큰 상을 받으셨다, 그 분은 시상식 날 하얀 모시 저고리를 입고 서울에 잘 갔다 왔다고 내게 인사를 하셨다. 그리고 바로 그 몇 달 후에 먼 길을 영영 떠나셨다.

지금 병을 앓고 있음에도 혼신을 다하는 어르신들, 세상을 떠나기 바로 직전까지 붓을 잡으셨던 그 분처럼 되고 싶다. 그렇게 붓을 잡고 마지막 작품 하나에도 열과 성을 다하며 인생의 멋진 마무리를 했면 좋겠다. 멋진 작품을 하는 예술인이 아니라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맑고 올바른 정신으로 최선을 하는 한 인간으로...


태그:#노인서예문화 인식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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