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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대선 개입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에서 징역 2년 6월,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은 뒤 법정을 나서기 위해 차량에 올라타고 있다.
▲ 징역2년 6월, 집행유예 4년 선고 받은 원세훈 국정원 대선 개입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에서 징역 2년 6월,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은 뒤 법정을 나서기 위해 차량에 올라타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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찜찜한 유죄.

11일 나온 원세훈 전 국정원장 등에 대한 정치·선거개입 혐의 판결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 21부(재판장 이범균 부장판사)는 이날 오후 2시 열린 선고공판에서 원 전 원장과 이종명 전 국정원 3차장, 민병주 전 국정원 심리전단장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원 전 원장에게 징역 2년6월에 자격정지 3년, 이 전 차장과 민 전 단장에게는 각각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을 선고했다. 다만 모두 4년(원세훈)과 2년(이종명, 민병주)간 집행을 유예해서 법정 구속되지는 않았다.

재판부는 "피고인 원세훈은 국정원장으로서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수호할 책임이 있음에도 국정원 직원들에게 국정홍보 등을 지시하여 정치관여 활동을 이루어지게 했다"며 "특히 이와 같은 활동은 국민의 자유로운 여론 형성 과정에 국가기관이 직접 개입하는 행위로서 어떠한 명분으로도 허용될 수 없다"고 밝혔다.

또한 재판부는 이 전 차장과 민 전 심리전단장에게 "소속 직원들의 정치관여 행위를 차단하고 방지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고인 원세훈의 위법한 지시를 그대로 전달하여 이 사건 범행에 이르게 했다"고 유죄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재판부는 위와 같은 이유로 국가정보원법 위반 혐의는 유죄를 인정했지만,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는 무죄를 선고했다. 두 가지를 별개의 범죄로 기소한 게 아니라 하나의 행위가 두가지 모두에 해당한다(상상적 경합)며 기소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유죄가 나온 것이다. 선거법 위반 여부가 이번 사건에서 핵심 쟁점이었음을 감안하면, 결론은 유죄임에도 내용상 원 전 원장 등에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판결이 나온 셈이다.

온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국가정보원의 정치 및 선거 관여라는 중대한 사안이며, 1심 판결에만 무려 1년 3개월을 끌어온 재판이었음 감안할 때, 이번 판결은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선거운동'과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 구분한 재판부

국정원 대선 개입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에서 징역 2년 6월,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은 뒤 취재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질문공세를 받고 있다.
▲ 기자들 피해 법원 나서는 원세훈 국정원 대선 개입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1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선고 공판에서 징역 2년 6월,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은 뒤 취재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질문공세를 받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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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판결로 사실관계는 명확해졌다. 국정원 심리전단 요원들의 행위가 국정원법상 금지하는 정치관여죄에 해당한다는 것, 그리고 그 행위는 국정원장을 정점으로 3차장과 심리전단장을 거쳐 지시-보고 체계를 통해 이루어진 조직적 범죄였다는 점이다.

문제는 국정원법상 정치관여에 해당하는 조직적 범죄행위가 선거법상 공무원의 선거관여로 볼 수 있는지 여부다. 국정원법은 공무원 중에서도 국정원 직원이라는 특수한 사람들의 행위를 규정하는 법이고, 선거법에서 규정한 공무원은 국정원 직원을 포함해 보다 넓은 공무원들을 말한다.

그렇다면 국정원법상 정치관여죄에 해당하고 그 시기가 대선이라는 선거시기라면 선거법은 당연히 위반이라는 것이 상식적이다. 하지만 재판부는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내린 핵심 논리는 '선거운동'과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엄격히 구분한 데 있다. 재판부는 "비록 피고인들의 행위가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행위라고 볼 여지가 있더라도, 그보다 좁은 개념인 선거운동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공무원 지위를 이용한 선거운동을 하였음을 이유로 피고인들을 처벌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어떠한 행위를 선거운동이라고 보기 위하여는 목적성, 능동성, 계획성이 인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판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 전 원장 등 피고인들이 기소된 선거법 조항을 살펴봐야 한다. 선거법 제85조(공무원 등의 선거관여 등 금지)는 "공무원은 그 지위를 이용하여 선거운동을 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바로 다음 조항인 제86조는 몇가지 행위를 나열하며 공무원 등의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결국 선거법은 공무원의 '선거운동'과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모두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건 원 전 원장 등이 기소된 조항이 선거법 86조가 아니라 85조였다는 점이다. 재판부는 "'선거 또는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와 '선거운동'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는 공직선거법의 입법취지 및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라며 피고인들의 행위가 보다 엄격한 '선거운동'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그렇다고 피고인들의 행위가 선거법 86조 위반에는 해당한다고 재판부가 판단을 내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판결문에서 "피고인들의 행위가 '선거 또는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에 해당할 여지가 있음은 별론으로 하고"라고 적시한 것으로 보아, 재판부는 선거법 85조에 대해 무죄 선고를 내리면서 86조를 분명히 의식했음을 알 수 있다.

선거법 86조(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에는 해당할지도 모르지만, 기소된 85조(선거운동)는 무죄 - 결론은 이거다. 언제나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

신중한 검찰, 오히려 항소 의지 불태우는 원세훈

이번 판결에 대해 지난해 초 고발장을 작성하는데 참여했던 박범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전형적인 짜맞추기식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판사 출신인 박 의원은 "예를 들어 강간상해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이 있는데 재판정에서 보니 강간은 맞지만 상해는 아니라고 해보자, 그럴 경우 판사가 기소된 강간상해가 아니므로 무죄를 선고하는 게 맞느냐"면서 "그럴 경우 판사가 공소장을 강간으로 변경하는 게 어떻겠냐고 검찰에 권하는 것이 통상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초 민주당에서 고발장을 제출할 때는 선거법 85조와 86조가 모두 들어가 있었다"면서 "그런데 기소단계에서 86조가 빠진 것"이라고 말했다.

어쨌든 1심 판결에서 선거법 위반 혐의는 무죄가 나왔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법원이 엄격하게 선거운동과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구분하는 입장을 취한다면, 검찰은 항소장을 제출하면서 선거법 86조 위반 혐의를 추가할 수 있다. 동일한 행위를 가지고 어떤 법령을 적용할 것인가 문제이므로 항소 단계에서도 얼마든지 공소장을 변경할 수 있다.

그런데, 선거법 적용을 놓고 심한 홍역을 앓았던 검찰이 과연 그런 적극적인 선택을 할까? 항소에 대해 검찰은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검찰 관계자는 "판결문을 정밀하게 검토해서 항소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반면 원 전 원장 측이 오히려 즉각 항소 의지를 밝혔다. 판결 직후 법원 앞에서 원 전 원장은 "선거법 위반과 관련해 무죄로 해주신 데 대해 너무나도 옳은 판단을 해주셨다고 감사히 생각한다"며 "국정원법 위반 부분은 항소심에서 철저히 잘 해보겠다"고 말했다.


태그:#원세훈, #이종명, #민병주, #국정원, #선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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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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