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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카카오톡으로 연락이 왔다. 이번 주말 인천공항으로 떠나는 공항버스 표와 귀국했을 때 다시 돌아올 심야버스 표를 모두 예매했으니 컨디션 조절 잘하고 "부디 살 좀 빼라"는 연락이다. 삼 년 만에 세 모녀가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 그동안 작은 아이가 대학원에 들어가 뒷 바라지 하느라 여유가 없다가 무사히 졸업하고 취직도 되어 각자 더치페이로 가는 여행이다.

옛날보다 사회 생활하는데 혼자서 할 줄 아는 게 많아졌지만 여전히 혼자 못하는 게 많은 나. 해외여행도 아이가 외국어를 하니 든든한 마음으로 갈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아줌마들이 흔히 하는 패키지여행만 했을 것이다.

여행사를 통해 해외로 가는 경우, 세상 물정도 모르고 소통도 어려워 인터넷으로 시도해야하는데, 요즘 해외 여행 사기가 많다고 들어 엄두가 나질 않는다. 큰 아이가 현재로썬 명실상부 내 보호자인 셈이다. 그 아이가 어릴 적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서 나를 난처하게 했던 애물단지다. 청각 장애가 있는 나는 신혼 때 아이를 출산하고 아이 울음소리를 감지하지 못해 아이 혼자서 울다 못해 숨이 넘어 간 적이 많았다.

기저귀가 갑자기 젖는다든지, 배가 고프거나 잠이 오거나 또는 어디가 아프다는 칭얼거림을 못 들어 나중에는 아이의 몸에 끈을 달아서 잠을 자기도 했다. 아이는 우는 것이 습관이 되어 나중에는 한 번 울면 그칠 줄 몰랐다.

신혼 셋방살이를 할 때 내가 중증장애인이란 것을 말하면 방을 빌려주지 않는 집도 있었다. 그러다 어떤 할머니가 방을 빌려줘 살게 됐다. 그 때 마침 아이에겐 낮엔 자고 밤에는 깨서 우는 습관이 생겼다. 아침에 아이 아빠를 출근시키느라 주인집과 공용으로 쓰는 대문으로 오갈 때면 주인 할머니가 말했다.

"애를 그리 울리면 어떡하노? 아이가 밤에 자야 아빠가 잠을 제대로 자고 일을 하지. 쯧!"

시도때도 없이 울어대던 큰 딸, 이젠 내 보호자가 됐다.
 시도때도 없이 울어대던 큰 딸, 이젠 내 보호자가 됐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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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으로 오해 받은 남편..."때리지마세요! 우리 애기 아빠에요!"

그날 밤부터 나는 아이가 밤에 울면 애를 업고 지하에 있는 화장실로 갔다. 원래 셋방 주인집과 붙어 있는 방인데 세를 주려고 하다 보니 화장실을 만드느라 지하 창고를 개조해 화장실을 만들어 화장실은 좀 넓은 편이었다.

그 화장실 한편에 의자를 갖다 놓고 나는 아이가 밤에 울면 그리로 데려가 달랬다. 지하라서 애 우는 소리가 안 집까지 들리지 않았는지 다음부터는 주인 할머니가 별 말 없었는데 전세금이 대폭 올라 다른 집으로 이사했다. 나는 아이 아빠가 퇴근할 무렵이면 항상 아이를 업고 골목으로 나갔다. 금슬이 딱히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대문 초인종소리를 못 듣기 때문에 미리 대문을 열고 나가서 기다리는 것이었다.

아이 아빠는 겨울이 되자 내가 기다리는 게 안쓰러워 대문 열쇠를 갖고 다니기 시작했다. 주인집 대문이 잠기면 아이 아빠가 열쇠로 열고 들어왔다. 그 뒤부터 나는 아이 아빠가 늦게 와도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집 안에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어느 눈 오는 날 아이 아빠를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시계를 보니 12시가 다 된 시간인데 그때까지도 아이 아빠가 들어오지 않아 깜짝 놀랐다. 창문을 열어 보니 온 동네 사람이 주인집 마당에 다 모여있었다. 나가 보니 술이 좀 취한 아이 아빠가 쪼그려앉아 몰매를 맞고 있었다.

"우리 집 애기 아빠에요, 때리지 마세요!"

하고 서툰 발음으로 소리쳤다. 아이 아빠는 열쇠를 가지고 대문을 열려다 그날따라 양복을 바꿔 입어 열쇠를 놓고 갔다. 들어오려고 보니 열쇠가 없어 담벼락을 연거푸 뛰어서 간신히 담을 넘었는데 이웃의 누군가가 보고 "도둑이야!" 소리쳤던 모양이었다.

이런 일들은 큰 아이가 세 살 쯤 되어선 없어졌다. 세 살 배기 아이가 그 때부터 내 대신 세상의 소리를 전달하는 통역사가 됐기 때문이다. 그 어린 아이가 내 대신 초인종 소리 뿐 아니라 전화 소리, 시장 가면 상인의 가격을 말하는 소리 모두 전달해 주는 통역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세살이 지나면서 점점 잘 울지 않는 똑소리나는 아이로 커갔다.

그리고 지금은 사회생활을 아직도 왕초보처럼 어수룩하게 하는 나를 위해 가이드 역할도 한다. 가끔은 누가 엄마인지 모를 만큼 잔소리꾼이기도 하다. 큰 아이가 고맙고 대견하다.


태그:#청각장애인식개선, #세입자인식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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