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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애정씨는 끝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

"아버님께는 정말 죄송한데, 축하드린다고 전해주세요…."

촉촉해진 눈가를 훔치며 그는 서둘러 법원을 빠져나갔다. 정씨는 1997년 삼성전자 기흥공장에 입사, 설비엔지니어로 근무하던 중 백혈병에 걸려 2005년 31살의 나이로 숨진 고 황민웅씨의 부인이다. 그는 남편의 죽음을 산업재해로 인정받기 위해 오랫동안 싸워왔다. 하지만 법원은 3년 전과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삼성반도체 직업병', 7년 만에 인정받긴 했지만...

21일 '삼성반도체 직업병' 항소심 판결 직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고 황유미씨 아버지 황상기씨. 법원은 이날 황유미씨 등 2명의 산재는 인정했지만 다른 피해자 3명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2011년 1심과 같은 결과였다.
 21일 '삼성반도체 직업병' 항소심 판결 직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고 황유미씨 아버지 황상기씨. 법원은 이날 황유미씨 등 2명의 산재는 인정했지만 다른 피해자 3명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2011년 1심과 같은 결과였다.
ⓒ 박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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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서울고등법원 행정9부(부장판사 이종석)는 정씨 등이 '삼성반도체공장에서 일하며 얻은 급성백혈병 등을 산재로 인정해달라'며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2011년 1심처럼 고 황유미씨와 고 이숙영씨만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고 황민웅씨와 김은경, 송창호씨가 공장에서 일할 때 유해물질에 일부 노출됐을 가능성은 있지만 이 때문에 백혈병 등이 발병했다고 보기는 부족하다고 했다. 이들과 별개로 근로복지공단이 낸 항소도 기각했다.

삼성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의 싸움은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딸 황유미씨가 그해 3월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숨지자 아버지 황상기씨는 근로복지공단에 유족보상과 장의비 지급을 신청했다. 이듬해엔 정애정씨와 고 이숙영씨의 남편 이선원씨가 유족보상 등을, 김은경씨와 송창호씨는 요양급여를 지급해달라고 근로복지공단에 요청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이들의 신청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족과 피해자들은 2010년 함께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이듬해 1심 재판부는 고 황유미씨와 고 이숙영씨만 산재로 인정했다(☞ '삼성반도체 직업병' 행정소송 1심 판결문).

21일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도 동일했다. 법원은 1심 때처럼 같은 공장 같은 라인에서 함께 일했던 황유미씨와 이숙영씨의 경우 백혈병 발병과 업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봤다. 두 사람이 작업 공정 때 사용한 감광제에 들어있는 벤젠, 비소, 황산, 전리방사선 등 유해물질에 노출됐고 과도한 야간근무 등에 시달린 점을 고려한 결론이었다.

황민웅씨의 경우 유해물질에 일부 노출되긴 했지만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 발병 원인으로 보긴 어렵다고 했다. 정애정씨는 그가 백혈병에 걸린 이유 중 하나로 공정 설비 설치 작업 참여를 꼽았다. 그런데 황씨가 근무했던 2002년 당시의 작업환경 측정 결과는 없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재판부는 그가 벤젠 등에 노출됐을 개연성은 있지만, 작업환경을 백혈병의 직접 원인으로 보긴 어렵다고 했다. 증거가 부족하다는 얘기였다.

1991년 삼성전사에 입사, 온양과 부천 공장에서 일했고 퇴사 후인 2005년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은 김은경씨 사례를 산재로 인정하지 않은 이유도 같았다. 재판부는 그가 근무하던 당시 작업환경 측정 결과가 남아있지 않고, 유해물질에 노출됐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고 봤다. 삼성전자 온양공장 도금공정에서 설비엔지니어로 일하다 1998년 퇴사한 지 10년 만에 악성 림프종 진단을 받은 송창호의 산재 주장 역시 비슷한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머지 세 사람도 똑같이 삼성에서 일하다 병 걸렸다"

오랫동안 힘들게 싸워온 끝에 21일 승소했지만 황상기씨의 표정은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긴 사람은 좋지만 나머지 세 분도 똑같이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가 화학물질에 의해 병에 걸린 것이 맞다"며 "피해자 가족에게 입증 책임을 지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했다. 황씨는 "정부나 삼성이 자료를 내놓으면서 그래야지 영업비밀이라고 감추지 않았냐"고 비판했다.

피해자들을 돕고 있는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이종란 노무사 역시 "아픈 노동자한테 (피해를) 입증해야 산재로 인정해주겠다는 현행 법제도는 시급히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올림은 이날 패소한 세 명도 직업병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우겠다고 밝혔다. 현재 서울고등법원에선 또 다른 피해자 김경미씨의 항소심도 진행 중이다.


태그:#삼성백혈병, #삼성반도체 직업병, #황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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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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