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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주유할 때 필자에게 가장 가슴 벅찬 일은 중국 안에서 빛난 우리 선조들을 보는 것이다. 잘 몰라서 그렇지 중국 곳곳에는 우리 선조들이 빛낸 유산이 있다. 우리 선조들이 그곳에 갔을까 싶은 윈난성 쿤밍에도 우리 조상의 얼이 빛난다. 1907년 쿤밍에 육군강무학교가 만들어졌는데 이곳에서 철기 이범석 장군 등 많은 우리 독립 운동가들이 공부를 했다.

그런 유적 가운데도 가장 빛나는 것은 만주에 남은 우당 이회영 집안과 석주 이상룡 선생 집안의 유적이다. 이 두 집안은 조선시대를 풍미하던 명문가인데 일본이 우리 땅을 강제로 병합하자 모든 가산을 정리해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했다.

중국 항일운동의 대표적인 장군인 양정우는 직접 '중한민중연합항일가'를 작성해 보급할 만큼 항일운동에서 우리 민족의 역할은 컸다
▲ 중국 항일운동 명장 양정우가 쓴 한중인민항일가 중국 항일운동의 대표적인 장군인 양정우는 직접 '중한민중연합항일가'를 작성해 보급할 만큼 항일운동에서 우리 민족의 역할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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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명문가'에는 이런 흔적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 답사길에 그분들의 흔적을 만날 때마다 가슴 속에서 우러나는 깊은 감동을 느끼곤 했다.

책 '명문가'는 앞 날개에 있듯이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부를 수 있는 집안을 대상으로 했다. 나라나 집안이 위기에 처했을 때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집안을 말한다. 영국 왕실 왕자는 포클랜드 전쟁에서 미사일을 유도하는 헬리콥터를 타고 전쟁에 참여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이 집안에 존경과 신뢰를 바친다. 그런데 그것도 한 세대가 아니라 수대에 걸친 길이기에 우리가 쉽게 예측할 수 없는 거대한 기(氣)의 흐름을 감지한다.

400억 재산 독립운동에...이회영의 비참한 최후

유하현 삼원보는 항일운동의 주역을 길러낸 신흥무관학교가 자리 잡은 곳이다. 이제 그 흔적이 많지 않지만 지금도 조선족 학교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 신흥무관학교 등이 있는 유하현 삼원보의 남은 조선족 학교 유하현 삼원보는 항일운동의 주역을 길러낸 신흥무관학교가 자리 잡은 곳이다. 이제 그 흔적이 많지 않지만 지금도 조선족 학교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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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이회영 집안과 석주 이상룡을 배출한 고성이씨 집안이 바로 그것이다. 이회영은 일제가 조선을 병합하자 모든 가산을 정리해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민족혼을 지킨 집안의 중심인물이다. 중국 취재길에 신흥무관학교가 있던 삼원보를 들렀고, 우당 이회영 선생이 체포되어 구타로 돌아가셨던 따리엔항을 보았기에 이 집안에 대한 존경심은 더욱 크다. 지금으로 치면 400억원 이상의 재산을 독립군을 키우는데 썼다가 나중에는 곤궁해 구걸할 정도의 비참한 생활을 한 우당 집안. 우당 선생은 타국에서 일본 경찰에 구타당해 돌아가셨으니 '한국은 우당 집안에 빚을 졌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석주 이상룡 선생을 배출한 안동의 고성이씨 종택에서도 오롯한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만날 수 있다. 석주 선생을 비롯해 구한말에 아홉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집안이다. 석주 선생은 1911년 이 집안 50여 가구를 이끌고 만주로 가서 경학사를 세우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국권수복에 앞장섰다.

집안 전체가 움직이지 않았지만 단재 신채호는 중국에서 가장 넓게 만날 수 있는 위대한 지성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단재 선생을 '아나키즘'이나 '고구려'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선생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망명자의 신분으로 중국에서 보내다가 결국 중국 땅에서 숨을 거둔 애국지사다. 선생에게는 우리가 중국인을 볼 때 가져야할 자존심과 한국인으로의 오롯한 자세 등 모든 것이 있다.

중국에서 가장 넓게 만날 수 있는 지성, 단재 신채호

여순감옥에서 분사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수감동에 있는 소개글. 단재 선생의 수감 옥사는 명확히 있지 않지만 감옥 안에 단재 선생의 기록을 남겨 그의 역할을 기리고 있다
▲ 여순 감옥 내 단재 신채호 선생 소개글 여순감옥에서 분사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수감동에 있는 소개글. 단재 선생의 수감 옥사는 명확히 있지 않지만 감옥 안에 단재 선생의 기록을 남겨 그의 역할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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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를 아는 사람들은 그래서 더 큰 존경과 안타까움을 가진다. 1936년 단재가 차가운 시신으로 고국에 돌아왔을 때 일제의 서슬 퍼런 눈이 있었지만 만해 한용운이 기금을 마련하고, 오세창이 비문을 썼다.

방송 제작 등 여러 가지 인연으로 필자는 중국내 단재 선생의 유적을 수차례 답사했다. 그중 가장 안타까운 곳이 단재 선생이 서거한 따리엔이다. 한반도를 향한 두 개의 반도 중 하나인 랴오닝반도의 최남단 도시인 따리엔은 중국 근대사의 가장 상징적인 도시다. 청일전쟁 후에는 부동항과 동아시아 야욕을 가진 러시아가 조차(租借)했고, 러일전쟁 이후에는 대륙에 대한 야욕을 가진 일본에게 조차당하는 비극의 땅이기 때문이다.

따리엔에서 한시간여를 달리면 뤼순(旅順)이 있다. 이곳은 군사도시여서 아직까지 외국인의 공식 방문을 막는 곳이다. 뤼순이 우리에게 남다른 것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26일 이곳에서 처형됐고, 그로부터 약 26년 후인 1936년 2월 21일에 이곳에서 단재선생이 옥사했다.

지금도 감옥 안에는 단재 선생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단재선생이 쓴 '조선혁명선언'의 일부가 있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핵심 역량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 우리는 군중 속에 들어가…"로 시작된 이 글은 의열단을 이끌던 김원봉의 부탁으로 1923년 1월에 써준 것이다. 만해 한용운(韓龍雲)의 '조선독립의서'와 더불어 식민지 시대 2대 명문장으로 꼽히며 아무리 힘들어도 결코 굴하지 않아야 하는 민족의 사명을 말해준다.

단재 선생이 세들어 살던 집은 지금 봐도 누추하지만 이곳에서 박자혜 여사와 단란한 생활을 꾸리고, 아들 수범씨도 낳았다. 하지만 그 시간도 얼마지 않아 가족을 고국에 돌려보내야하는 처지가 됐다
▲ 단재 선생이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냈던 베이징 진스팡지에 단재 선생이 세들어 살던 집은 지금 봐도 누추하지만 이곳에서 박자혜 여사와 단란한 생활을 꾸리고, 아들 수범씨도 낳았다. 하지만 그 시간도 얼마지 않아 가족을 고국에 돌려보내야하는 처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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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선생은 그밖에도 연해주 지역과 상하이에서도 잠시 머물렀지만 가장 오래 머문 곳은 베이징이다. 그중 진스팡지에(錦什坊街)는 1920년 박자혜 여사와 결혼해 험난한 베이징 생활 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곳이다. 하지만 아들 수범이 태어나고 일년도 채우지 못해 단재는 가족을 고국으로 돌려보낸다. 군벌들의 난립으로 인해 복잡한 이곳에서 가족을 꾸릴 여력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족이 떠난 후 단재의 삶은 더욱 곤궁해졌다. 단재는 집을 차오또우후통에서 멀지 않은 따헤이후후통(大黑虎胡同)으로 옮겼다. 길이 150미터의 협소한 골목으로 이 인근에서 가장 작고 초라한 곳이다. 이때 벽초 홍명희도 단재의 집에 들렀다가 기겁할 만큼 더러운 이불로 인해 잠을 자지 못하고 집을 나왔다. 사실 이 이불은 단재가 벽초가 찾아오기 얼마전 찾은 한 노인집에 이불이 너무 초라해 바꾸어 준 것이었다. 이 때 단재는 이불의 위생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벽초를 꾸짖었다고 할 정도로 세상에 막힘이 없는 인물이었다.

단재 선생은 경술국치가 벌어진 1910년 중국으로 피신해 26년여간 정치인, 언론인, 사상가, 역사가 등으로 활동을 하면서 곤궁한 처지에 얽매이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정진한 순일무잡한 위대한 사상가다. 그의 사상은 어릴 적부터 배운 유학은 물론이고 사회주의, 아나키즘 등 모두를 섭렵했지만 어느 한 사상에 치우치지 않고 조국 해방을 위한 정도를 찾는 것이었다.

조국해방을 위한 진정한 노마드의 삶

베이징 신화사 근처에 있는 이곳에서 단재는 가족을 보내고 외로운 생활을 하면서 집필과 언론 활동을 펼쳤다.
▲ 단재 선생이 머물렀던 석등후통 베이징 신화사 근처에 있는 이곳에서 단재는 가족을 보내고 외로운 생활을 하면서 집필과 언론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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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거의 1921년 1월부터 펴낸 천고(天鼓)는 우리 독립운동 소식은 물론이고 동서양 모든 사상을 섭렵한 그의 광범위한 지식체계를 보여준다. 그는 중국어로 발행된 이 잡지를 통해 중국이 일본 제국주의의 마수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우리 독립운동 세력과 힘을 합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노력은 임시정부를 통해서는 물론이고 마오쩌둥 등이 이끈 홍군(紅軍)과의 결합세력을 통해 광범위하게 실현됐고, 결국 해방공간에서 우리 민족이 독립국가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단재 선생은 슬픈 '디아스포라' 였지만 진정한 '노마드'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중국 사업은 더 힘들어지고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진정한 의지다. 뤼순의 차디찬 감옥 바닥에서 장렬히 숨을 거둔 단재 선생이 우리들에게 묻는다. 과연 너희들은 얼마나 치열한가를.


태그:#이회영, #이상룡, #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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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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