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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명의 '복자'가 탄생하는 세계 가톨릭 경사의 날, 새벽부터 전국의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프란치스코 교황을 보기 위해 광화문에 몰려든 인파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서울시청광장을 가득 메운 인파는 시청에서 광화문광장에 이르는 도로를 가득 메웠고 행사장인 광화문광장에는 빈틈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언론에서는 그 수가 백만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124명은 모두 박해를 받던 중 '순교'한 인물들이다. 신유박해(1801년) 때 순교자가 53위로 가장 많았고, 기해박해(1839년) 18위 등 한국 가톨릭의 피의 역사를 맨 앞에서 이끌었던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이 때문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복식에 앞서 16일 오전 서울 서소문 '순교성지'를 찾아 헌화와 기도를 드렸다. 가톨릭 신자에게 이날 시복식은 복자로 선포된 124명이 죽음으로써 만들어낸 영광된 자리인 것이다.

유민이 아빠의 '노란 편지'... "우리 정부를 압박해 주세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34일째 단식 중인 '유민아빠' 김영오씨가 드디어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났다.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시복식 전 카퍼레이드를 하던 교황은 김영오씨 등 세월호 유족을 보자 일부러 자동차를 멈추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김씨는 교황에게 "세월호를 잊지말아달라"며 직접 쓴 편지를 건넸다. 교황은 그를 위로한 뒤 김씨의 편지를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 단식 34일 유민아빠 만난 교황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34일째 단식 중인 '유민아빠' 김영오씨가 드디어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났다.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시복식 전 카퍼레이드를 하던 교황은 김영오씨 등 세월호 유족을 보자 일부러 자동차를 멈추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김씨는 교황에게 "세월호를 잊지말아달라"며 직접 쓴 편지를 건넸다. 교황은 그를 위로한 뒤 김씨의 편지를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 교황방한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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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날 광화문 행사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유감스럽게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복자선포' 장면이 아니었다. 주요 외신의 보도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SNS 등을 통해서 인상적이라 표현한 장면은 다름 아닌 카 퍼레이드 도중 차에서 내린 교황이 세월호 유가족을 찾아가 두 손을 맞잡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카 퍼레이드를 멈추게 한 뒤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려 세월호 유가족이 위치한 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에서 그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 세월호 희생자 김유민양의 아빠이자,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34일째 단식을 이어가고 있는 김영오씨 앞에 멈춰 서 손을 잡았다.

김영오씨는 고개를 숙여 교황의 손에 입을 맞추고는 "다시는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게 특별법 제정되도록 도와주시고… 편지 하나 전해드리겠습니다. 잊어버리지 말아주십시오. 세월호를"이라고 말했다. 교황은 고개를 끄덕이며 김영오씨의 손을 잡고 위로했다.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미사 때와 같이 교황의 가슴에는 '노란 리본'이 달려 있었다.

김영오씨에게 노란 편지를 받은 교황은 그것을 수행원에게 전하지 않고 본인의 주머니에 직접 넣었다. 교황과의 만남은 불과 1분여의 짧은 순간이었지만 김 씨는 "교황을 만난다고 특별법이 제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전 세계에 세월호 유가족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이를 통해 정부에 압박을 주려 한다"며 "교황께 너무나도 고맙다"고 소회를 밝혔다.

김씨는 교황에게 전달한 '노란 편지'에서 "왜 내 딸이 그렇게 죽어야 했는지 반드시 진상규명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도록 독립된 조사위원회에 강력한 조사권한인 수사권, 기소권을 부여하는 특별법을 제정해달라고 했습니다"라고 진상규명을 강력히 원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서 "교황께서도 우리를 살펴주시는데, 국민을 책임져야 하는 대통령이라는 사람은 한 달 넘게 굶고 있는 국민인 제게 오지도, 쳐다보지도 듣지도 않고 있습니다"라며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한 뒤 "우리 정부를 압박해 주십시오. 그래서 힘이 없어 자식을 잃고 그 한도 풀어주지 못하고 있는 우리를 구해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이날 교황과 김영오씨의 만남은 사전에 기획된 것이 아니어서 더욱 눈길을 끌었다. 교황청 대변인 페데리코 롬바르디 신부는 16일 저녁 언론 브리핑에서 김영오씨에 대한 위로가 미리 준비된 것이 아니었다면서 "(카 퍼레이드 차량이 세월호 유가족) 앞을 지나다 통역을 하던 신부에게 세월호 유가족이란 얘기를 듣고서 교황이 잠깐 멈추자고 했을 것"이라며 "세월호 참사에 교황 본인도 공감하고 가족들의 고통에 동참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의미였다"고 설명했다.

황사영의 '하얀 편지'... "교황님이 압력을 행사하시어"

천주교 서울대교구와 서울역사박물관은 천주교 관련 근대유물 400여 점을 한자리에 전시하는 '서소문·동소문 별곡' 특별전을 8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막한다. 이번 전시회는 교회사와 시대사, 도시사, 역사지리학의 다양한 성과를 아우르며, 천주교회사 전시로는 첫 행사라고 주최 쪽은 말했다. 전시회는 서소문 별곡과 동소문 별곡의 두 가지 테마로 진행된다. 사진은 로마교황청 민속박물관이 소장 중인 '황사영백서'.
 천주교 서울대교구와 서울역사박물관은 천주교 관련 근대유물 400여 점을 한자리에 전시하는 '서소문·동소문 별곡' 특별전을 8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막한다. 이번 전시회는 교회사와 시대사, 도시사, 역사지리학의 다양한 성과를 아우르며, 천주교회사 전시로는 첫 행사라고 주최 쪽은 말했다. 전시회는 서소문 별곡과 동소문 별곡의 두 가지 테마로 진행된다. 사진은 로마교황청 민속박물관이 소장 중인 '황사영백서'.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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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부를 압박해 주십시오"라며 교황에게 호소한 김영오씨의 편지에는 특별법 제정에 대한 절박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자국 정부를 상대로 '교황'에게 압박을 요청하는 편지를 쓴 것은 김영오씨가 처음이 아니다.

최초의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있었던 1801년에도 그와 같은 편지가 작성된 바 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황사영 백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부친이 정5품 벼슬까지 지내는 등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황사영은 16세 때 성균관 입학 자격을 주는 진사(進士)에 합격했다. 정조가 직접 그의 손목을 잡고 칭찬하면서 등용까지 약속할 정도로 장래가 촉망받는 인물이었다. 황사영은 다산 정약용의 큰형인 정약현의 딸과 결혼했다. 처삼촌 정약종(금번 선포된 124명 복자 중 한명, 정약용의 둘째형)이 들려준 천주학에 매료된 그는 결혼한 해에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다.

신유박해가 발생한 1801년 2월 처삼촌들이 체포되고, 자신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게 되자 황사영은 충북 제천의 '배론'으로 피신하게 된다. 당시 배론은 박해를 피해 내려온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지내던 곳으로, 주민들은 옹기굴을 가장한 토굴을 만들어 황사영을 숨겼다. 

숨어 지내던 황사영은 1801년 8월 자신에게 세례를 준 주문모 신부 등이 이미 4월에 참수된 소식을 듣고는 격분해 조선의 천주교 박해 상황과 그에 대한 해결방안을 담은 문서를 작성한다. 어두컴컴한 토굴 속 등잔불에 의지해 길이 62㎝, 너비 38㎝의 흰 명주 위에 1만 3384자를 썼다. 그는 그 백서를 밀사를 통해 청나라에 있던 프랑스인 구베아 주교에게 보낼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의 밀사가 체포됨에 따라 백서는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황사영은 백서와 함께 체포돼 결국 '대역죄'를 선고받고 같은 해 11월에 능지처참에 처해졌다. '순교자' 황사영 역시 이번에 선포된 124명의 '복자' 대상으로 거론되었으나 마지막 순간에 제외됐다. 

황사영 '백서'는 한자로 1만3000자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앞부분은 1801년 전후의 박해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뒷부분은 이와 같은 박해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나름의 대안을 기술하고 있는데, 외국 군대를 동원해 조선 왕실을 압박하는 방안까지 상세히 나온다.

황사영은 조선은 중국 황제의 명이면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면서 "교황이 중국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어 조선으로 하여금 서양 선교사를 받아들이라 하면 그리 할 것"이라며 "이것이 이른바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는 방법"이라고 백서에서 주장했다. 이 외에도 "군함 수백 척과 정예군 5,6만 명이 대포 등 무기를 싣고 조선 해안가에 와 국왕에게 천주의 사신을 받아들이라고 요청하라"는 등의 내용이 기술돼 있다.

황사영은 가톨릭이라는 종교 입장에서 보면 독실한 신앙인이자 순교자이나 비종교인 시각에서 보면 다른 해석이 가능한 논란의 인물이다. 백서에서 그는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외국 군대를 끌어들이는 방안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나아가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편제하는 방안까지도 제시했다. 종교의 자유를 무엇보다 우선시했던 그는 27세 젊은 나이에 죽임을 당했다.   

'비극'으로 끝난 213년 전 편지... 2014년 편지의 결과는

2014년과 1801년은 수치로 보이는 간극만큼이나 유사한 점을 찾기 어렵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교황을 상대로 '자국 정부를 압박해 달라'는 편지를 작성했다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2014년은 세월호 특별법이 통과되게 '압력을 행사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였고, 이 편지는 교황에게 직접 전달됐다. 1801년은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교황이 청나라 황제를 통해 '압력을 행사해 달라'는 내용이 담겨진 백서였다. 이 백서는 작성되었지만 전달되지 못했고 황서영은 대역죄인으로 죽임을 당했다.

1801년 편지의 작성 과정과 결말은 이미 역사책에 기록돼 있다. 그 당시의 결과는 비극이었다. 그러나 당시 탄압 대상이었던 천주교는 2세기가 지난 지금 순교자들을 '복자'로 선포하는 영광스러운 행사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2014년 편지의 작성과정은 뉴스를 통해 우리는 알고 있다. 그 결과는 과연 어떠할 것인가. 편지를 작성하고 교황에게 직접 전달한 김영오씨는 '(원하는 방향으로) 특별법이 제정되지 않으면 광화문에서 죽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8월 17일, 그는 35일째 단식 중이다.


태그:#김영오, #노란편지, #황사영, #백서,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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