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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友堂) 이회영(1867~1932). 그는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다. 선생의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울시 종로구 신교동에 세워진 '우당 기념관'에는 찾아오는 이가 별로 없어 기념관의 반은 실내등을 꺼둘 정도다. 지난 12일 자전거를 타고 종로구 서촌 동네를 돌아보다가 우연히 알게 됐다. 하지만 그를 빼놓고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논할 수 없다는 것을 안 뒤 이 기념관이 무척 고마워졌다.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는 이 작은 기념관에 들어서면, 검은 누비옷에 모자를 쓰고 형형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흑백사진 속의 우당 선생이 기다렸다는 듯 방문객을 맞는다.

기념관 내부는 그리 넓지 않으나 이회영 선생의 독립운동에 관련된 자료는 물론 격동기 구한말의 독립운동 관련 사진들과 문서, 당시의 신문 등 시대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많다. 생생한 역사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이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고난과 역경 속으로 뛰어든 훌륭한 선조들에 대해 부끄러움과 함께 숙연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

우당 이회영 선생의 삶과 발자취, 당시 시대상을 볼 수 있는 자료.
 우당 이회영 선생의 삶과 발자취, 당시 시대상을 볼 수 있는 자료.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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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독립운동가 31분의 사진이 걸려있다.
 우당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독립운동가 31분의 사진이 걸려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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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선생의 집안은 10여 명의 정승을 배출한,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불리는 조선 후기 최고의 명문가다. 영예는 물론 당대 최고의 재산가로도 알려졌다고 한다. 이회영 선생은 을사늑약 체결 직후인 1906년부터 김구·안창호·신채호 등과 같이 비밀 결사조직인 신민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그의 나이 44세 때인 1910년,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한 경술국치가 벌어진다. 그해 12월 우당은 우리나라 초대 부통령을 했던 이시영 선생 등 형제 여섯 명과 친족 50명을 이끌고 조상이 이룬 명동 일대의 전 재산을 정리한 뒤 혹한의 북풍이 몰아치는 만주로 망명길을 떠나게 된다.

저택과 수많은 고서는 우당이 평소 아들처럼 아끼던 육당 최남선에게 헐값으로 넘겼고, 전답과 토지는 물론, 조상 제사를 위한 묘답까지도 처분했다. 이렇게 마련한 돈이 현재 시세로 수백억 원에 달했다고 한다. 압록강을 건너 두 달 만에 도착한 곳은 중국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 마을. 동참하는 종들은 함께하고 나머지는 모두 해방시켰다. 그야말로 최초의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사회 지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의 집단적 실천이었다.

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널 때 우당은 뱃사공에게 뜻밖의 후한 뱃삯을 치른다. 뱃사공이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리자 우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일본 경찰이나 헌병에게 쫓기는 이가 돈이 없어 헤엄쳐 강을 건너려 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그 사람들을 건너게 해주시오."

그는 111년 교민자치기관으로 경학사(밭갈 耕, 배울 學, 모일 社)를 조직하고, 1912년 독립군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후일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학사를 통해서 이곳으로 망명해온 전 주민들을 하나로 묶고, 외부 중국과의 각종 교섭을 중계하는 공수창고 역할도 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경학사를 통해서 독립운동의 일체감을 형성하고, 이 경학사가 모체가 되어서 이곳에 온 목적인 독립군기지건설의 기초를 이루는 단체라고 볼 수 있다."(역사학자 이덕일의 책 <이회영과 젊은 그들> 중)

선생은 1910년 중국 만주의 허허벌판 서간도 지역에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마지막 보루로 여겼던 신흥무관학교와 후일 북경으로 가서는 '의열단' 등을 세우는 등 수많은 열사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줬다. 만주 벌판을 누비던 북로군정서, 서로군정서 등 여러 독립군들과 의열단 등 독립운동단체, 그 외 독립운동 영역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 인사들이 두각을 드러냈다. 그런데 신흥무관학교의 모든 수업료는 무료였다. 학교는 우당 가문의 재산으로 운영됐다. 기념관 한쪽에 4절까지 적혀 있는 신흥무관학교의 교가가 눈길을 붙잡았다.

"서북으로 흑룡태원 남에 영절에 / 여러만만 헌원자손 업어 기르고/ 동해섬중 어린것들 품에다 품어 / 젖 먹여 기른 이 뉘뇨 / 우리우리 배달 나라의 / 우리우리 조상들이라 / 그네 가슴 끓는 피가 우리 핏줄에/ 좔좔좔 걸치며 돈다 - 신흥무관학교 교가 가운데 (1절)"

우당 가문에 큰 빚 진 우리 민족

해방 후 구 조선총독부 건물에서 한 연합군 환영대회, 우당의 형제 중 이시영만 살아 조국으로 돌아왔다.
 해방 후 구 조선총독부 건물에서 한 연합군 환영대회, 우당의 형제 중 이시영만 살아 조국으로 돌아왔다.
ⓒ 우당 기념관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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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기념관에선 청소년에게 우리 독립운동 역사를 알려주는 교육도 하고 있다.
 우당 기념관에선 청소년에게 우리 독립운동 역사를 알려주는 교육도 하고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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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권문세가와 양반들은 일제에 빌붙어 기득권을 지키고 일신의 안위를 누리는데 이들은 왜 편안한 기득권을 버렸을까. 그리고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살인적인 추위의 만주벌판에서 풍찬노숙하며 치열하게 독립투쟁을 벌였을까. 월남 이상재 선생은 "우리 민족은 우당 가문에 큰 빚을 졌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동서 역사상 나라가 망한 때 나라를 떠난 충신 의사가 수백, 수천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 일가족처럼 6형제 일가족 40여 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나라를 떠난 것은 전무후무한 것이다. 장하다! 우당의 형제는 참으로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 만하다. 6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우당의 가문은 형제와 자식들이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가문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6형제 중 5형제와 많은 조카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타국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형제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 해방 후 조국으로 돌아온 분이 바로 이시형 선생인데, 그는 우리나라 초대 부통령이 됐다.

그의 집은 그대로 독립 운동가들의 전진기지이자, 휴식처이자, 사랑방이자, 회의 장소였다. 독립운동가 또는 그런 뜻을 지니고 1920년대 북경을 찾은 조선인들은 예외 없이 우당의 집을 찾았다. 그 가운데에는 소설 <상록수>의 저자 심훈도 있었다. 그의 기록에 나타난 우당의 모습은 사뭇 눈물겹다.

"두 달 만에야 식비가 와서 나는 우당 댁을 떠나 동단패루에 있는 공우로 갔다. 허구헌날 돼지기름에 들볶아 주는 음식에 비위가 뒤집혀서 조반을 그대로 내보낸 어느 날 아침이었다. 뜻밖에 양털을 받친 마괘를 입고 모발이 반백이 된 노신사 한 분이 양차를 타고 와서 나를 심방했다. 

나는 어찌나 반가운지 한달음에 뛰어 나가서 벽돌 바닥에 두 손을 집고 공손히 조선절을 했다. 그리고 노인이 손수 들고 오시는 것을 받아 들었다. 그 노인은 우당 선생이셨고 내 손에 옮겨 들린 조그마한 항아리에는 시큰한 통김치냄새가 끼쳤다."

중국 음식에 질려 제대로 밥도 먹지 못하는 젊은이를 위해 통김치를 손수 들고 왔던 노인, 우당은 그런 사람이었다.

우당의 사상적 종착지 '아나키즘'

일제의 고문으로 순국 후, 한 벌의 낡은 옷으로 조국에 돌아온 우당 이회영.
 일제의 고문으로 순국 후, 한 벌의 낡은 옷으로 조국에 돌아온 우당 이회영.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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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가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라는 이유로 한국 정부는 그의 존재를 현대사속에서 배제했으며 그로 인해 우리는 우당 이회영의 존재와 업적을 잘 모르게 됐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상해에 수립됐으나 의견 차이로 분란이 끊이지 않자 우당은 상해에서 북경으로 옮겨 활동을 계속하면서 1924년 재중국 조선 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해 활동했다. 북경시대에 우당은 의열단을 지원하고, 자신도 아나키스트가 돼 투쟁을 지원한다.

아나키즘을 흔히 무정부주의로 번역하였는데, '해방' '독립'이라는 지극히 민족적 과제를 안고 출발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주장하는 아나키즘은 정부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그의 사상이 된 아나키즘은 '권력의 집중보다는 분권 그리고 연합'을 주장하며 '권력이나 조직, 강권에 의한 지배 없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우당은 소신에 따라 독립운동단체에서의 어떤 권력이나 감투를 거부했다. 아나키스트였던 그가 독립된 나라의 상을 그렸던 글을 보면 가슴 한 구석이 뻐근해진다.

"권력의 집중을 피하고 분권적인 지방자치단체의 연합으로서 중앙정치의 기구를 구성하며, 경제건설에 있어서는 재산의 사회성에 비춰 일체의 재산은 사회적 자유 평등의 원리에 모순이 없도록 민주적인 관리 운영의 합리화를 꾀해야 한다. 그리고 교육은 물론 사회 전체의 부담으로 실시해야 할 것이다."

아나키즘을 무기로 한 독립운동에 수많은 동지들이 함께 했음은 물론이다. 이을규·이정규·백정기·정화암 같은 아나키스트들이 있었다. 신채호·김창숙·이회영은 북경 그룹의 삼인걸이었다고 한다. 의열단과 비슷한 활동을 했던 '다물단'에는 유자명과 함께 우당의 아들 이규학이, 더 뒤에 만들어지는 '흑색 공포단'에는 역시 우당의 아들 이규창이 함께한다.

우당의 딸 이규숙은 태어나자마자 강보에 싸여 만주로 건너간 우당 일가의 최연소 망명자로, 북경어가 능통해 독립운동단의 무기운반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사촌오빠 이규준과 일본 밀정을 암살한 혐의로 중국 공안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는데, 독립운동가 장해 평과 결혼한 뒤 함께 일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우당 선생의 유품과 사진들, 김구 선생과 찍은 사진들도 보인다.
 우당 선생의 유품과 사진들, 김구 선생과 찍은 사진들도 보인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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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에 조국에 돌아왔을 때 살아남은 우당 일가는 2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통해 지나온 세월이 그들 가문에게 얼마나 지난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1940년 사망한 첫째 형인 이건영의 둘째아들(규면)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독립운동을 하다 병사했고, 둘째 규훈도 독립운동을 하다 해방 후 귀국해 공군으로 복무하다 한국전쟁 때 실종됐다.

가산을 정리할 때 가장 많은 재산을 내놓은 둘째 형 이석영은 1934년 중국 빈민가를 떠돌다 굶어 죽고 만다. 셋째인 이철영은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맡아 일하다 1925년 세상을 떠났다.

형제들 중 유일하게 생존해 해방을 맞은 다섯째 이시영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 되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비민주적 독재에 환멸을 느껴 사임한다. 막내인 이호영도 1933년 독립운동을 하다 온가족이 북경에서 행방불명되고 만다.

우당 이회영 일가는 그야말로 온 집안이 일제에 맞서 싸웠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시대를 통틀어도 유래를 찾기가 힘들다"는 월남 이상재 선생의 말은 한 치의 과장도 없었다. 이분들에 대한 존경과 찬사는 어떤 말이나 글로도 부족할 듯하다.

우당 선생의 나이 66세인 1932년, 그는 중국 다롄 항구에서 일경에 검거돼 모진 고문을 받은 뒤 끝내 순국했다. 1932년 초 우당 선생은 중국 국민당을 찾아가 교섭해 자금과 무기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해 11월, 그는 만주 독립운동 지하조직을 굳건히 하고 만주주재 일본군 사령관을 처단하는 작전을 추진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다롄으로 옮겨가려고 하던 차에 검거됐다. 우당 선생과 동향인 동포에 의해 일제에 밀고돼 검거됐다고 한다.

그의 사후, 고통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은 독립운동사에 빛나는 별 하나를 잃었고, 땅을 치며 통곡했다. 이후 1962년, 그에게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됐고 최근에야 부인의 회고록과 일부 학자들의 평전, TV 방송을 통해 선생의 삶이 조금씩 알려지게 됐다.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극우세력 혹은 수구세력이 어쩌다 보수로 불리우게 된 시대, 선생의 삶은 진정한 보수란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우당 기념관에서 쉬이 발을 떼지 못하는 이유다.

"본디 보수는 그 사회의 존경받는 사람들이 '독차지' 하는 가치다. 보수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성찰하며, 솔선수범하여 타의 모범이 되고, 그럼으로써 존경과 존중의 대상이 된다. 국가 혹은 민족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고, 지켜야 할 것을 위해선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는 그 강골(强骨)함이 보수의 미덕이다. 그리고 그것이 보수의 품격이다."(표창원의 책 <보수의 품격> 중)

덧붙이는 글 | - 위치 : 서울시 종로구 신교동 6-22번지 (경복궁역 2번 출구에서 나와 도보 20분)
- 관람시간 : 오전 9시~오후 6시 (토요일은 오후 1시까지), 일요일은 휴무이며 입장료는 없음.
- 문의 : 734-8851
- 누리집 : www.woodang.or.kr



태그:#우당 이회영, #우당 기념관, #아나키즘, #독립운동가, #신흥무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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