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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9월 말, 처음으로 중국으로 가는 길에 나는 비행기가 아닌 배를 탔다. 인천에서 톈진까지 하루 남짓 걸렸다. 혼자 배 안에서 이런저런 상상에 빠지면서 나는 중국 속에서의 생활을 예감했다.

인천을 떠난 배는 서해의 낙조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나 역시 그 바다 속에서 한 선을 그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한국과 중국 간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흔적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늘었다. 특히 중국 관광객의 한국 방문자 숫자는 매년 30~50%씩 늘어 2013년에는 433명에 달할 만큼 증가해 일본을 확연하게 제쳤다. 사실 비슷한 시간에 중국의 홍콩 방문객은 4000만 명을 넘었다니 이 숫자는 전혀 경이로운 숫자가 아니다.

역사를 보면 한반도와 중원이 육로로 연결된 경우도 있었고, 강성한 북방 민족이 득세할 때는 막힌 적도 많았다. 특히 오대십국(907~960)과 송나라(960~1279) 시기에는 만주족이나 거란족에 막혀 중국과 육로를 잃어버린 시간이 많았다.

이후 금나라나 원나라, 청나라 같은 북방민족이 중원을 장악할 때는 자연스럽게 연결됐지만, 갈등 상태에 놓이기도 했다. 반면 명나라 때는 두 나라가 자연스럽게 연결됐지만, 명나라가 폐쇄적인 정책을 강화하면서 그다지 큰 왕래가 없었다. 또 지금도 평가에 논란이 있는 사대(事大)가 생기면서 우리나라 사람들로서는 중국에 대한 감회가 다양하게 교차한다.

반면에 아편전쟁 이후 두나라가 위기 속에 빠져 있을 때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중국으로 건너가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수많은 인연이 생겨났다. 그런 인연 속에서 들어가 보자.

김부식과 송의 인연

닝보는 과거 명주(明州)로 사단항로의 중국쪽 시작지였다. 이곳에서 배를 타면 흑산도 등을 거쳐 군산으로 들어와 서해뱃길로 북쪽으로 향했다. 사진은 닝보에 있는 고려인들의 숙소 고려사관
▲ 저지앙 닝보에 있는 고려사관 유적지 닝보는 과거 명주(明州)로 사단항로의 중국쪽 시작지였다. 이곳에서 배를 타면 흑산도 등을 거쳐 군산으로 들어와 서해뱃길로 북쪽으로 향했다. 사진은 닝보에 있는 고려인들의 숙소 고려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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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중국의 기록 속에 한반도가 가장 선명한 한 기록이 있다. 1123년 송나라 휘종(徽宗, 재위 1100~1125)의 명을 받고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이 바로 그 책이다. 고려 인종(仁宗 재위 1122~1146) 때 출간된 이 책은 한 달간의 여정이지만 제목처럼 그림과 글로 당시 고려를 선명하게 묘사한 책이다.

이 책의 서두에는 당시 명주(明州, 지금의 닝보)를 출발해 군산(群山, 지금의 선유도)에서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의 영접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김부식 역시 부친이 문인 소식(蘇軾)에서 이름 자를 차용했고, 김부식 역시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온 적이 있는 만큼 인연이 남달랐다.

김부식이 송나라에 갔을 때 휘종에게 받은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전범으로 삼아 <삼국사기>를 쓸 만큼 그의 중국과 인연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김부식의 책은 고구려 중심의 사관을 대적하기 위한 만큼 사대주의적인 성향과 신라중심주의에 빠져 우리나라 역사관을 좁히는 부정적인 효과를 낳기도 했지만, 삼국사를 정립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고 있다.

서긍의 고려도경을 보면 사신 일행이 이곳에 도착해 김부식 일행의 접대를 받고 쉬다가 서해 뱃길로 북으로 올라갔다. 당시에는 불교, 도교 등 다양한 사원이 있었다
▲ 고군산군도에 있는 선유도 이곳이 과거에는 군산이었다 서긍의 고려도경을 보면 사신 일행이 이곳에 도착해 김부식 일행의 접대를 받고 쉬다가 서해 뱃길로 북으로 올라갔다. 당시에는 불교, 도교 등 다양한 사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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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약 발명한 최무선의 배경에는 중국이 있었다

다음으로 소중한 인연은 1370년 즈음에 중국인 상인 이원(李元)과 최무선의 인연이다. 염초 제조기법을 갖지 못한 최무선은 천신만고 끝에 이원의 도움으로 화약을 발명하고, 화포를 제작해 1380년 8월 진포대첩의 승리를 이끌어낸다.

당시 80척의 배로 400여 척의 왜선을 격파한 것은 이원의 도움이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테다. 최무선의 화포는 이후 관음포해전 승리를 이끌었고, 동아시아 바다는 임진왜란까지 200여 년간 평화를 찾았다. 한중간 우정으로 찾아온 평화였다. 이 화포는 훗날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의 전투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으니, 그 가치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파다후통은 치엔먼따지에 앞쪽에 있는 8개 후통을 말한다. 사진은 이곳 주민들이 춘지에 벌이는 묘회 모습
▲ 베이징 전문대가 앞에서 벌어지는 묘회 파다후통은 치엔먼따지에 앞쪽에 있는 8개 후통을 말한다. 사진은 이곳 주민들이 춘지에 벌이는 묘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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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사이긴 하지만,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의 참전을 이끌었다는 역관 홍순언(洪純彦, 1530~1598)의 이야기도 기억해둘만 하다. 홍순언은 선조 17년(1584) 역관의 자격으로 베이징을 방문했는데, 업무가 끝나고 나서 호기에 베이징의 유곽집에 들렀다.

그런데 그날 주청을 든 여인이 기품이 있어서 그 사연을 물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절강성의 관리였는데,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서 죽었는데 무남독녀인 그녀가 장사를 치르기 위한 돈이 없어 베이징으로 올라왔다가 홍순언을 만나게 된 것이다. 홍순언은 큰 돈을 주고 그녀를 돌려보내고, 스스로는 공금 남용 문제로 처벌을 받았다.

그런데 이 여인은 나중에 부인을 잃은 병부상서 석성(石星)의 아내가 됐고,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두고두고 했다. 훗날 임진왜란으로 위기에 처한 조선이 원군을 청하는 사절을 보내자, 명은 사절단에 홍순언을 포함시킬 것을 요청했다.

홍순언이 베이징에 도착하자, 병부상서 석성은 그를 장인처럼 접대했고, 원군 문제도 무난하게 풀어낼 수 있었다. 명나라는 이 파병으로 인해 어려움이 가중됐지만, 조선으로서는 국난을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마련했다.

옹방강을 흠모한 추사 김정희

중국 금석학의 본가라 할 수 있는 항저우 시링인스 입구의 안내글. 이곳에서 옹방강, 오창석 등이 전각의 기초를 만들었다
▲ 항저우 시링인스 소개글 중국 금석학의 본가라 할 수 있는 항저우 시링인스 입구의 안내글. 이곳에서 옹방강, 오창석 등이 전각의 기초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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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을 오간 아름다운 이야기는 또 있다.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청나라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의 이야기를 꼽을 수 있다. 청나라 4대 전각의 대가인 옹방강은 추사 김정희의 사실적 스승이다.

추사는 옹방강을 만나기 전부터 옹방강의 글씨를 흠모해 그의 글씨를 사방에 붙여놓고 당호도 옹방강의 호(담계, 覃溪)에서 가운데 자를 따와 '보담재'(寶覃齋)라고 이름지었다. 그리고 생원시에 합격한 24살(1809) 때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연경에 갔다.

추사는 사숙하던 옹방강을 보려 했지만 78세였던 그는 쉽게 사람을 만나주지 않았다. 다행히 귀국 며칠 전 짧게 옹방강을 만났는데 추사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이후 옹방강도 조선의 어리지만 빼어난 재주를 가진 추사를 그리워하며 많은 편지를 나누게 된다.

또 옹방강은 직접 추사에게 우리 땅 곳곳에 있는 비석들의 존재를 알리고, 때로는 탁본을 부탁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진흥왕 순수비 등이 그 역사적 가치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후 추사는 정치적 격랑 속에서 자신의 고통을 다양한 문인화 등을 통해 보여준다. 또 금석문에서 기초로 삼은 추사체 역시 옹방강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중조인민혈의정'에서 드러난 한중 관계의 깊이

광동 코뮌 당시 희생된 조선인 150명을 기려서 만들어진 이 정자에는 한국과 중국의 우정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글이 써 있다
▲ 광저우에 있는 중조인민혈의정 광동 코뮌 당시 희생된 조선인 150명을 기려서 만들어진 이 정자에는 한국과 중국의 우정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글이 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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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나라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더 깊은 관계에 빠진 것은 두 나라 모두 곤경에 빠졌을 때다. 청일전쟁 이후 두 나라는 정치적 혼란에 빠지고, 경술국치 이후에 많은 조선인들이 중국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두 나라는 때로 먹을 거리를 나누고, 우정을 나누고, 피를 나누었다.

가장 대표적인 흔적이 중국 광둥성 광저우에 있는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誼亭)이다. 광저우혁명열사능원에 있는 이 정자는 1927년 광동꼬뮨에 참가했다가 희생된 우리 청년 150명의 희생을 기린 기념비다. 이 기념비에는 중국 군인의 상징적인 인물인 예젠잉이 쓴 "중국과 조선 양국이 투쟁할 때 쌓은 우정이 만세에 남을 것이다"라는 명문이 있다. 뒷면에는 1927년 광저우 꼬뮨에서 150명의 조선 청년이 희생됐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삼일운동이 끝난 지도 8년여가 흐른 이때,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던 수백 명의 청년들은 광저우에서 벌어진 봉기에 외국인으로 참여했다. 그들은 작전 지시의 실수 등으로 인해 사허(沙河) 전투에서 모두 희생됐다. 이 전투에서 살아난 이들도 많았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아리랑>의 주인공인 김산이다.

훗날 중국이 건립되고 1964년 이 전투에서 희생된 이들을 기리는 건축물이 세워졌다. 기둥은 중국식으로 지붕은 한국식 기와로 만들어졌다. 광저우는 지금도 비행기로 4시간여를 가야하는 먼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벌어진 봉기에서 수백 명의 한국인들이 참여했고, 150명이 희생된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미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을 맞서기 위해서는 중국과 손을 잡아야 했고, 그들은 그런 의지로 만리타향에서 총을 잡았고 그곳에서 희생당했다. 혹자는 이념을 말할 수 있는 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 당시를 두고 이념을 운운하는 것은 누가 될 일이다.

뿐만 아니라 일제식민시기야 말로 한중 인물 교류의 르네상스라 할 수 있다. 중국에서 유일한 영화 황제로 추앙받는 김염, 중국 당대 최고의 작곡가 정율성, 중국의 피카소로 불리는 한락연, 중국 동북항일운동의 명장 양세봉·이홍광 등 수많은 이들이 중국 대륙에서 활동했다. 특히 군대에서는 양림이나 윤세주·무정 등이 중국 근대 군인사에도 기록되는 걸출한 인물들이다.

이런 우정의 역사는 한반도의 분열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하지만 1992년 한중 수교와 더불어 다시 인적 교류가 넓어졌고, 다양한 인적 교류가 진행됐다. 특히 양국간 대사급 인사 교류는 두 나라가 교류의 폭을 결정하는 중요한 사항이다.

20년 넘긴 한중 수교의 역사

중국 대사로 중국 통보다는 정치 인물이 선호됐다
▲ 주중국대한민국대사관 정문 중국 대사로 중국 통보다는 정치 인물이 선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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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수교 20년을 넘긴 우리의 중국 대사 파견은 어땠을까. 1992년 8월 24일 한국과 중국은 역사상 첫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지속적으로 관계를 가져오던 대만과의 국교를 단절하면서 취한 조치였다. 대만에서 공부하던 많은 이들은 배신감에 분노한 대만인들의 폭행까지 몸으로 받으면서 역사의 변화를 직면해야 했다.

한중 국교수립이 된 지 약 2주 뒤인 9월 7일 노재원 대사가 취임했다. 1932년 생인 노 전 대사는 서울대 법대 출신이지만 외무 관료로 시작한 전형적인 외교전문가였다. 외교안보연구원장(1981)과 외무부 차관(1982~84) 등을 역임했고, 주 캐나다 대사(1984~88)를 거친 후 초대 중국대사를 맡았다. 그는 1992년 8월 주중 임시 대사 대리로 부임해, 수교가 이뤄지지까지 실무 작업을 지휘했다. 또한 훗날 주중대사를 지내는 김하중·신정승 등의 실무자들도 노 전 대사를 도왔다.

1993년 6월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황병태 의원이 주중대사로 취임했다. 황 전 대사는 그때까지 경제기획원 경제협력국장을 역임하고 한국외대 총장과 통일민주당 부총재를 지내는 등 관계·학계·정계를 넘나드는 스타일의 정치인으로 외교나 중국과는 큰 관계가 없었다.

당연히 취임 당시에는 걱정이 될 수밖에.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황 전 대사는 취임 이후 끊임없이 중국을 연구하고, 부딪히면서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했다. 특히 부임 당시까지 중국어를 하지 못했는데 나중에는 상당한 수준의 중국어 실력을 갖췄다. 또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경제관료를 한 경험으로 인민대회당에서 중국 부장(장관)들에게 특강을 해 보폭을 넓히기도 했다.

그는 1996년 2월에 이임했는데, 장쩌민 주석이 환송연까지 열어주면서 평생 중국에 방문할 수 있는 지위까지 얻었다. 또 황 전 대사의 취임기는 한국 기업이 중국에 자리할 기틀을 다지는 작업을 하는 때여서 그의 역할이 중요했다.

김영삼 정부의 남은 시기를 중국서 보낸 대사는 정종욱 전 대사다. 1940년생인 정 전 대사는 외교학과 출신으로 하와이대와 예일대에서 중국 정치를 공부했으며, <신중국론>이나 <마오이즘>에 관한 책을 펴냈다.

정 전 대사는 정권이 바뀌면서 교체돼 큰 역할을 할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귀임 후 정 전 대사는 아주대 석좌교수 등을 역임하면서 중국에 관한 우리의 관점을 설파하는 데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또 중국이 안정적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정치 체계를 바꾸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설파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고 난 뒤 1998년 4월 권병현씨가 대사로 취임했다. 당시는 한국이 IMF 관리상태로 들어서서 위기감이 고조된 시기였다. 그는 2000년 8월까지 2년 반여 동안 대사로 재직했다. 권 전 대사의 뒤를 이은 사람은 홍순영 대사다. 2000년 8월 말에 취임한 홍 전 대사는 전형적인 외교관 출신이다. 외무부 북미과정, 아프리카 국장을 거쳐서 제2대 외교통상부 장관(1998~2000)을 지낸 그는 무게로 따지면 중량급 인사였다. 이후 홍 전 대사는 통일부장관으로 옮겨갈 때까지 1년 조금 넘는 시간을 주중대사로 근무했다.

홍 전 대사의 뒤를 이어 2001년 10월 김하중 제6대 대사가 신임장을 받았다. 취임 전까지 차관급인 대통령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지냈고, 한중 국교 정상화의 실무진, 서울대 중문과 출신의 중국어가 가능한 외교관이라는 점에서 첫 중국통 대사 시대를 연 셈이다.

그런 인연인지 김 전 대사는 무려 7년 2개월을 장기집권하는 특이한 경우가 됐다. 김 전 대사는 중국통 답게 2002년 중국과 2003년 한국에서 <떠오르는 용, 중국>(騰飛的龍)을 출간하기도 했다. 김 전 대사가 오래 동안 재직한 데는 중국통이라는 측면도 있었지만, 이해찬 총리 등과의 인연이 각별했기 때문이라는 측면과,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정부가 들어섰기 때문이라는 측면도 작용했다.

김 전 대사가 떠나고 반년의 공백이 지난 후인 2008년 5월, 신정승 제7대 주중 대사가 신임장을 받았다. 신 전 대사는 주 뉴질랜드 대사관 대사, 외교통상부 본부대사 등을 지낸 전형적인 외교관 출신 인사다.

그는 1998년 12월부터 2002년 7월까지 주중국대사관 공사를 지냈기 때문에 중국과 전혀 인연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캐나다 대사를 지내다가 초대 중국대사로 취임한 노재원씨와 경력이 비슷했지만 노재원씨가 외무부 차관을 지냈다는 점을 감안하면 비중에서는 휠씬 가벼웠다.

혹자는 차관이라고 했고, 혹자는 차관보급으로도 평가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중국을 통하는 문제 등에서 불협화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중국은 대북 문제에서도 중요한 창구였지만 중국과 말이 통하는 부분이 거의 없었다.

또 6자회담 등에서 한국이 소외됐다. 그런 가운데 중국 정부도 자국의 말이 통할 수 있는 중량급 인사를 원한다는 목청이 커졌고, 서서히 우리 대외관계에서 중국의 비중을 자각한 정부는 중량급 인사의 파견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이런 요구로 이명박 정부는 청와대 비서실장 출신의 류우익을 보냈고, 박근혜 정부도 정치적 비중이 높은 권영세 대사를 보냈다. 다만 이런 대사들은 중국을 잘 알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중국의 외교적 위세가 커가면서 큰 역할을 못하는 것도 있다.

그럼 중국이 보내는 한국 대사는 어땠을까. 한국에 부임한 주한 중국 대사들도 한국어에 익숙한 이들이 많았다. 장팅옌 초대대사를 비롯해 리빈, 닝푸쿠이 등이 한국어에 능숙했다. 청융화 대사나 2대 우다웨이 대사는 한국어보다는 일본어에 익숙했다. 사실 중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한국어에 익숙한 대사들보다는 익숙하지 않은 대사 때가 별 잡음이 없이 잘 넘어갔다는 점에서 한국어가 필수요소는 아니다.

또 정적인 관계를 중시하는 우리나라의 문화상 한국어의 구사가 가능할 때는 문제의 소지가 있기에 한국어를 못하는 대사를 점차 더 선호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 이 때문인지 장씬썬, 추궈홍 등 전직과 현직 대사들은 모두 한국어를 하지 못했다. 반면에 전직 천하이(陳海)나 현직 하오샤오페이(郝晓飞) 부대사들은 모두 한국어가 능숙한 한반도통 외교관들이었다.


태그:#중국,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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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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