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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면서 이렇게까지 지독한 비를 겪은 적이 없다. 무려 일주일을 내내 쏟아붓던 비는 축축한 침대 시트 하나에 매달린 내 몸이 썩어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이제 그만 할래요'라고 하루아침에 마음을 바꾼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쳐 준 것은 저녁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고열이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던 크리스마스 이틀 후 아침,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코스타리카 라포르투나를 떠났다.

이대로 빗속에서 새해마저 보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바다로 가자. 이왕이면 백사장이 끝없이 펼쳐진 태평양으로 가자. 가서 아무도 모르게 마음껏 울다 오자.

드디어 나타난 아레날 화산

공교롭게도 일주일 만에 라 포르투나를 떠나는 버스 안에서 처음으로 보게된 화산의 선명한 모습.
▲ 아레날 화산 공교롭게도 일주일 만에 라 포르투나를 떠나는 버스 안에서 처음으로 보게된 화산의 선명한 모습.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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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거리 버스에는 어울리지 않는, 시골 버스를 타고 마을을 빠져나가자 드디어 일 주일 만에 처음으로 안개가 걷힌 세상이 보였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호수 너머에 자리 잡은 아레날 화산. 상처 입은 여행자에 보내는 위로였을까. 생전 처음 보는 활화산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저 고요했다. 타는 사람도 내리는 사람도 드문 그 시골길에서 여행자라고는 오로지 나 혼자였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야 여행의 일상이지만, 그 때 즈음 나는 매일매일 겪어야 하는 이별에 지쳐가고 있었다. 서로가 몰고 온 바람 냄새에 취해 이야기를 나눈 즐거운 기억이 뿌리내릴 틈도 없이, 내일이면 또 각자의 여행을 향해 흩어지는 것이다.

숙소에 자리를 잡고 나서도 나는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변에 멋들어진 카페에서 우아하게 커피를 들이켜며 천천히 흘러가는 세상을 내려다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서퍼와 게이와 도둑

걸어서는 끝에 닿을 수 없을 만큼 넓은 해변과 야자수, 백사장이 정글로 대표되는 카리브해와 선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 타마린도 비치 걸어서는 끝에 닿을 수 없을 만큼 넓은 해변과 야자수, 백사장이 정글로 대표되는 카리브해와 선명한 차이를 보여준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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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도 없이 펼쳐진 넓은 백사장과 드문드문 자리 잡은 파라솔을 보니 과연 태평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할 게 없었으므로 제법 넓은 그늘이 펼쳐진 한 호텔의 담벼락에 자리를 깔았다.

숙소에서 들고 온 책을 반 시간 가량 뒤적거렸지만, 몇 번을 젖었다 말랐다를 반복했을 책에서 나는 종이 냄새가 그날따라 거슬렸다. 헌책을 덮고, 얼굴을 하늘 쪽으로 향하자 나무 끝 저 너머로 파란 여름 하늘이 보였다. 지금은 분명히 12월인데 말이다.

다시 턱을 내려 해변을 오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자니 추레한 아저씨가 있는가 하면 선글라스가 아닌 안경을 낀 고지식한 대학생도 있고, 예술가 분위기의 아름다운 여성이 있는가 하면 도인 같은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도 있었다. 특히 쏟아지는 햇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끈적거릴 서로의 몸을 밀착시킨 채 돌아다니는 젊은 남녀의 모습은 나를 더더욱 그늘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해변에서 겨우 10m 떨어진 도로변에는 고급 펍과 호텔들이 줄지어 있다. 에밀은 사진에 나온, 제법 비싼 호텔에 묵고 있었다.
▲ 타마린도의 펍과 호텔 해변에서 겨우 10m 떨어진 도로변에는 고급 펍과 호텔들이 줄지어 있다. 에밀은 사진에 나온, 제법 비싼 호텔에 묵고 있었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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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 왔다는 에밀이 말을 걸어온 것도 그때쯤이었다. 하릴없이 누워있던 나에게 말을 걸어온 그는 자신을 가수 '태양'의 팬이라고 소개했다. 내가 한국인이란 걸 어떻게 알았느냐고 했더니 나의 최신 핸드폰과 카메라로 알았다는 그 녀석은 세무사로 일하다 휴가를 왔단다. 어차피 내일이면 또 이별할 것을 싶었던 나는 그의 이야기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어디선가 가져온 녀석의 칵테일을 한 두 잔 정도 마시다 보니 금세 친해졌다.

휴가 때마다 대륙별로 긴 여행한다는 에밀은 모르는 여행자와 친해지는 데에 제법 능숙해 보였다. 거리에서 만난 서퍼들도, 어느 잘 차려진 식당에서 만난 한국인 부부도, 그는 언제나 위트 있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먹어보는 비싼 점심을 먹고 파도에 휩쓸려 한낮을 보내니, 그래도 역시 여행은 여럿이서 하는 게 즐거운가 싶었다. 근사한 라운지에서 몇 잔의 칵테일을 더 마시고 나니 태평양의 하늘에도 어둠이 깔렸다.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막 지난 그 날, 타마린도의 해변은 어디서든 파티가 한창이었다. '강남 스타일'이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고 사람들은 얼마남지 않은 한 해를 몸에서 털어 버리려는 듯 마구 몸을 흔들어댔다.

타미린도의 해가 완전히 저물면, 해변가에 있는 많은 바에서 어김없이 파티가 시작된다.
▲ 해변의 파티장 타미린도의 해가 완전히 저물면, 해변가에 있는 많은 바에서 어김없이 파티가 시작된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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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긴 시간이 지나고 이제그만 가야겠다 싶어서 파티장을 빠져나올 때 에밀이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부르더니 자기는 바로 앞 호텔에 머무르고 있으니 거기서 자고 가란다.

습하고 북적이는 호스텔에 비하면 에어컨 바람 아래의 호텔 방이 훨씬 편했을 텐데, 왜인지 나는 그의 목소리에서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숙소의 짐 핑계를 대고 돌아서서 나가려는 순간, 녀석은 갑작스레 나를 돌려 세우고는 덥석 나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불같이 녀석을 밀쳐내고 몇 마디 쏘아붙였더니 녀석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터무니없는 말을 내뱉었다.

"이봐 쥬드. 키스할 때 어차피 눈을 감을 텐데 남자든 여자든 무슨 상관이야? 니가 오늘 하루 종일 먹은 칵테일이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우리의 오늘 하루가 서로 다른 세계에서 온 여행자들 간의 우정이 아니었단 말인가? 나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해변가의 분위기 있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술을 권하고, 함께 파티에 참석한 뒤 호텔 방이라니. 누가 봐도 저급한 치근덕거림이지 않은가. 내가 그가 '게이'일 거라는 생각도 못 했다 쳐도 너무나 뻔한 전개다. 게다가 맙소사.

에밀이 나에게 계속 권했던 칵테일의 이름은 '섹스 온더 비치' 였다. 나는 그날 '섹스 온더 비치' 12잔 정도 마셨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내가 느낀 모멸감을 전하고 싶었지만, 그때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동시에 영어로 화를 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깨달았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다시피 숙소로 돌아왔지만, 녀석이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저 멀리에서도 계속 쫓아왔다.

간신히 잠을 잔 다음 날, 나는 무엇이든 미칠 것이 필요했다. 그 밤의 일이 악몽처럼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던 것이다. 그런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타마린도 해변의 수많은 서퍼들이었다.

파도가 잦고 물결이 높은 타마린도에서는 1년 내내 서핑이 유행이다. 해변에서 진을 치고 있는 서핑보이를 통하면 저렴한 가격으로 강습을 받을 수 있다.
▲ 타마린도의 서퍼들 파도가 잦고 물결이 높은 타마린도에서는 1년 내내 서핑이 유행이다. 해변에서 진을 치고 있는 서핑보이를 통하면 저렴한 가격으로 강습을 받을 수 있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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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일은 겹쳐서 온다더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는 시도로 시작한 서핑은 그렇게 자충수가 되었다.

파도와 싸우느라 있는 힘을 다 써서 탈진 직전에 다시 백사장으로 올라왔더니 핸드폰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순간 단검에 찔린 듯한 아린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사라진 것이다.

꽤 친절하던 서핑보이(코스타리카 해변에서 돈을 받고 서핑을 가르쳐주는 청년들을 이르는 말)는 이곳에는 좀도둑이 많다며 어깨를 '으쓱' 할 뿐이었다. 내 가방은 녀석과 일행들의 많은 짐 사이에 놓여 있었는데 말이다. 나는 이곳에서 철저하게 이방인이었고, 이제 내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날 저녁, 내가 토해냈던 그 수많은 것들을, 내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단 하나의 순간을 너는 어떤 생각으로 듣고 있었을까. 가끔 떠난 휴가에서 무심코 현관문을 열었는데 파도 치는 바다가 보일 때, 몸을 덮고도 남을 큰 보드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오늘의 기억이 떠오를 것 같다. 여전히 아픈 기억일까? 그렇지 않으면 '피식'하고 웃게 될 추억일까.

간략여행정보
1년 내내 휴가를 보내러 온 여행객들이 붐비는 태평양 연안의 마을 타마린도(Tamarindo)는 코스타리카 어디에서 출발해도 리베리아(Liberia)라는 도시에서 버스를 갈아 타야 한다. 리베리아에서 타마린도까지는 버스로 두 시간 거리. 타마린도의 거리에는 멋들어진 펍과 레스토랑, 그리고 호텔이 줄지어 있지만 한발자국만 들어서면 펼쳐지는 백사장과 자연을 해치지 않는 모습을 유지한 건물들 덕에 여전히 제 3세계의 신비로움이 남아있다.

해변에는 늦게까지 문을 여는 펍과 카페가 많으며 여행객이 몰리는 주말에는 늘 파티가 열린다. 타마린도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서핑인데, 거리의 서핑숍이나 해변에 수많은 서핑보이를 통해 쉽게 배울 수 있다. 정식 가게보다 서핑보이를 이용하는 것이 저렴하지만 해변에는 언제나 좀도둑이 많다는 것을 명심하자. 주인 없이 짐을 해변가에 두는 것은 금물이다.

그 외에도 시즌에 따라 근교의 폭포나 거북이 관찰, 세일링 등의 투어가 인기다.

좀 더 자세한 타마린도 여행정보는 아래 링크를 참고하자.
http://saladinx.blog.me/30155028772



태그:#타마린도, #코스타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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