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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극장가는 <명량>이 홀로 평정한 듯하다. 개봉 8일 만에 관객 700만을 넘었고, 역대 흥행 기록들을 속속 갈아치우고 있다. 지금 기세라면 역대 최고 흥행을 예상해볼 수 있을 정도다.

이러한 <명량>의 흥행은 이순신 장군을 임진왜란 당시의 영웅만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한 영웅으로 우리 곁으로 다시 불러내고 있다. <명량>을 보며 가질 수 있는 궁금증을 이순신 장군 연구가인 박종평 작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풀어보고자 한다. 인터뷰는 지난 7일 이메일로 진행됐다.

박종평 작가는 <진심진력 : 삶의 전장에서 이순신을 만나다>, <흔들리는 마흔, 이순신을 만나다>, <그는 어떻게 이순신이 되었나>, <이순신 이기는 원칙>, <이순신, 꿈속을 걸어나오다>를 집필한 손꼽히는 이순신 전문가이다.

<명량> 옥에 티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영화 <명량>의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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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끝나고, 대장선에서 노를 젓던 노꾼 중 한 명이 이런 말을 한다.

"후사들이 우리가 이런 일 한 거 알랑가? 고걸 모르면 호로자식이여!"

목숨을 내놓고 나라를 지킨 민초들의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어떤 욕을 들어도 싸다는 면에서 노꾼의 걸죽한 입담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부분은 영화가 민족주의에 기대고자 했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 감독의 속내가 노골적으로 묻어나는 장면이다. 하지만 여기서 '호로자식'이라는 말에 주목해 보자.

호로(胡虜 : 오랑캐의 포로)는 병자호란(인조14년, 1636년) 당시 포로로 잡혀갔던 여성들이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 환향녀의 자식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오랑캐 포로의 자식'이라 불리며 평생 이웃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았던 민초들이 '호로 자식'이었던 것.

나라를 망쳤던 못난 정치인·사대부들이 자신들에게 쏟아졌어야 할 비난을 돌리기 위해 돌팔매질을 할 희생양으로 만들어낸 것이 '호로자식'으로, 임진왜란 당시에는 없던 욕이다. 그럼 왜란을 겪으며 조선 백성들은 어떤 욕을 했을까 궁금해진다.

임진왜란 당시 상황을 가장 잘 기록한 기록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이다. 박종평 이순신 장군 연구가에 의하면 "이순신 장군은 욕을 할 때, '흉'(兇, 흉악할 흉)자를 많이 썼다. 특히 원균에 대해서. 그리고 '가소'(可笑, 웃기는 일)라는 표현도 많이 썼다"고 한다.

기록을 통해 당시 백성들이 어떤 욕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순신 장군이 "저 놈 아주 흉악한 놈이군", "웃기는 놈이군" 정도의 욕을 했다는 것쯤은 알 수 있다. 만일 이순신 장군의 기록을 빌려서 노꾼의 말을 표현한다면, "후사들이 우리가 이런 일 한 거 알랑가? 고걸 모르면 흉악한 놈들이여, 웃기는 놈들이여!"라고 할 법하다.

흉악하고 웃기는 놈, '배설'

노꾼이 욕을 하며 으름을 놓고 싶어 했던 흉악하고 웃기는 놈들은 임진왜란 당시에도 있었다. 그 중 영화에서 가장 흉악하고 웃기는 놈, 욕을 쳐 먹어도 할 말이 없는 인물은 왜적이 아닌 '배설'로 그려진다.

배설(裴楔, 1551~1599)은 1597년 경상우수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당해 7월 원균이 통제사로 지휘했던 칠천량 해전에 참전했다가 도망쳤던 장군이다. 그는 영화에서 자기가 도망친 덕택에 12척이나 되는 전선을 그나마 구할 수 있었다고 큰소리치는 뻔뻔한 장군으로 나온다. 그러면 배설이 이순신 장군 암살을 시도하고, 거북선을 불태운 후 도망치다가 활에 맞아죽었다는 것은 사실일까?

이순신 장군 전문가인 박종평 작가
 이순신 장군 전문가인 박종평 작가
이에 대해 박종평 연구가는 '이순신 장군을 극단의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원균 대신 새로운 희생양을 만든 듯하다'고 평했다.

"명량해전 당시에는 거북선이 없었다. 즉 경상우수사 배설이 거북선을 불태우고, 이순신을 암살하려 하고 도망치는 모습은 역사의 왜곡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허구다. 배설이 이순신 부대에 합류했다가 겁을 먹고 도망친 것은 맞지만, (이순신) 영웅주의를 위해 한 사람을 희생 시키는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 장군이 온갖 시름에 겨워 아파하는 모습, 고독하고 눈물짓는 모습, 승리에 대한 열망으로 고뇌하는 모습, 한 치의 두려움 없이 맨 앞에서 싸우는 모습, 부하들과 백성을 염려하는 모습 등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그 중에는 흉악하고 웃기는 배설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8월 19일. 맑았다. 장수들이 교서(敎書)에 숙배를 했는데 배설은 받들어 숙배하지 않았다. 업신여기고 오만한 태도를 말로 다할 수 없었기에 그의 영리(營吏)를 잡아다 장(杖)에 처했다.'

배설은 칠천량 전투에서 조선 수군이 대패하고, 백성들이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도망쳤다. 그 결과 12척의 전선과 일부 백성들을 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왕이 내린 교서에 숙배, 삼가 공손히 절하는 절차마저 무시할 정도로 왕과 이순신 장군에 대한 냉소가 지나쳤다.

그의 이런 태도는 이미 죽기를 각오하고 몽니를 부린 거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데, 결국 그는 선산에서 도원수 권율에게 붙잡혀 처형 당했다. 배설의 경우만 놓고 보면, 김한민 감독이 구상하고 있는 이순신 3부작 <한산> <노량>에서 일어날 일이 예상된다는박종평 연구가의 우려가 근거가 있는 셈이다. 이순신을 성웅화하기 위해 원균을 '엉망'으로 그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장군이 탈영병 목을 벤 것은 할리우드 스타일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영화 <명량>의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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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은 이순신 장군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울리게 하며 관객의 눈과 귀를 붙잡는다.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 쓴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라는 잘 알려진 문구 외에도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따라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는 말은 백성을 향한 장군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런 이순신 장군이 군영을 이탈한 군졸의 목을 베며 내뱉은 한 마디, "군율은 지엄한 것이다"라는 말은 비장함은 있지만,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했던 장군과는 어딘가 맞지 않는다.이에 대해 박종평 연구가는 "탈영병을 군법에 따라 다스리기는 했지만 영화처럼 이순신 장군이 직접 목을 치지는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할리우드 식 상업영화를 지향한 <명량>은 "사실보다는 픽션에 가깝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영화는 영화일 뿐, 우리 곁에 이순신을 다시 불러냈다는 의미가 더 소중하다. 다만, 지나친 영웅화 혹은 성웅화 모습이 우려되기는 한다"고 지적한다.

"영화 중 이순신 장군이 탈영병을 처형하는 모습은 최악이다. 극단적인 고통의 순간을 겪었고,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이순신 장군이 그렇게 비현실적으로 무식하게 칼을 뽑아 탈영병을 처형하는 장면은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을 모독하는 장면이다.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최악의 헐리우드 영화이지만 재미있었던(?) <람보>를 연상했다. 이 영화는 정확히 말하자면 이순신의 삶이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일 뿐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일본 사무라이 영화… 우리 안의 사대주의와 식민주의의 결과물이다. 역사의식이 없이 상업주의에 물든…"

<람보>가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할리우드 영화는 아니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영화가 있다. 이연걸 주연의 <대도무문>(大道無門). 이 대도무문이 <명량>에 등장한다. 일본 장수 도도가 왜 대장선 깃발에 쓴 글귀다. 대도무문이라는 글귀를 유독 좋아했던 전직 대통령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박종평 연구가는 사실도 아닌 이 글귀가 어떻게 이 영화에 그것을 이용할 수 있었는지 기가 막힌단다. 당시 도도가 '대도무문'이라는 글귀를 적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일반인들 뇌리에 전직 대통령 혹은 이연걸의 전매특허로 기억된 문구가 나오니 뜬금없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저는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보다,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사심과 사욕으로 왜곡하는 지식인들의 위험성을 더 심각히 느꼈다."

난중일기 없는 명량

<명량>이 보여준 생생한 해전과 해전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시선, 해전이 있기 전 통제영에서 벌어지는 조선수군의 다양한 일상사는 어떤 근거로 만들어졌을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난중일기>야말로 영화의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준 시나리오 원본이다.

<난중일기>는 전쟁에 대한 모든 것과 함께 부하들과 백성을 염려하는 모습 등 장군의 인간적인 면면을 살필 수 있는 꼼꼼한 기록이다. 그런 면에서 박종평 연구가는 <명량>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을 이렇게 지적한다.

"일기를 쓰는 장면이 없는 모습… 작가와 감독은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던 듯하다. 조금만 더 진지하게 고민했다면 진짜 이순신의 모습을 아주 잘 보여주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난중일기> 전체를 정확히 읽지 않은 듯했고, 정작 중요한 '인간 이순신' 자체를 잊은 듯했다. 오락 영화에서 그것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일 듯하다."

그는 인간 이순신이 아니라, 영웅 이순신을 묘사하다 보니 왜곡이 발생했다는 지적도 잊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은 영화에서 하듯 '백병전'은 거의 하지 않았다. 명량해전 당시의 일기에도 백병전에 가까운 전투는 거제 현령 안위 장군이 하게 된다. 이순신 장군이 아니라…"

<난중일기>에 나오는 전투 방식
난중일기와 이순신 장군이 올린 장계인 당포파왜병상<唐浦破倭兵狀>에는 전투 방식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다.

<난중일기>, 1593년 3월 22일 이후의 메모 중 1592년 9월, 부산포 해전과 관련된 내용 중에는 "천자(天字)·지자(地字)의 각 총통을 연달아 쏘아 왜적선 50여 척을 쳐서 깨뜨렸다(撞破, 당파"는 내용이 나온다.

또 다른 메모인 1592년 6월 해전과 관련해서는 "나각(螺角, 소라)을 불어 장수들을 지휘해 한 번에 포위한 뒤 먼저 거북선(龜船, 구선)으로 곧바로 뚫게 했다(直衝, 직충). 거북선은 천자(天字)․지자(地字) 총통을 연달아 쏘아 층루 대선을 쳐서 깨뜨렸다撞破, 당파)"고 나온다.

영화에서처럼 구멍을 내어 깨뜨리는 충파(衝破, 부딪쳐 깨뜨림)는 전선과 전선이 접촉할 수 있는 근접전에서 쓰는 병법이다.

반면 이순신 장군은 기본적으로 천자포·지자포·대장군전 등의 총통 등을 활용해 포탄 등으로 맞혀 적선을 깨뜨리는 방식의 전투를 일컫는 당파(撞破)를 사용하는 포병전을 펼쳤다는 것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난중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순신 장군은 대부분 포를 활용한 전투를 벌였고, 왜군이 대장선에 올라와서 백병전을 벌이거나 직접 칼을 휘두르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박 연구가는 군관 나대용이 도원수 권율에게 지원을 요청하러 갔다가 옥에 갇힌 일도 없었던 일이라고 했다.

또한 관객의 눈물을 쏙 빼놓았던 정씨 부인의 말없는 통곡 속에 세상을 떠났던 탐망꾼 임준영이 실제로는 영화에서처럼 죽지 않고, 장군에게 직접 보고를 했다는 사실도 지적한다. 또한 장군이 백의종군하기 전에 한양에서 고문을 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피를 토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 역시 상업주의의 결과물이라고 본다.

일기에 의하면, 2월 중순에 잡혀가 3월에 한양에 도착했고 28일 동안 옥살이를 한 뒤 4월 1일 풀려나 백의종군을 했는데 단 한 차례의 고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기에는 고문을 심하게 당해 고통 받는 모습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난중일기>에 술 마셔서 머리 아픈 것까지 세세하게 기록한 점을 감안하면 <명량>처럼 피를 토하는 고문후유증은 실제로는 없었을 것이다.

박 연구가는 전문가의 식견으로 볼 때, 역사적 사실과 달라 아쉬운 점이 많이 남는다고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세계에서 어쩔 수 없는, '진짜 이순신'이 덜 드러나는 영화이지만,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하는 정신으로 이순신을 더 잘 알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단다.


태그:#박종평, #이순신, #명량, #난중일기,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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