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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농민회총연맹 부산경남연맹은 지난 7월 18일 오후 창녕 도천면 도천리에서 '쌀시장 전면개방'에 항의하며 벼논을 갈아엎었다.
 전국농민회총연맹 부산경남연맹은 지난 7월 18일 오후 창녕 도천면 도천리에서 '쌀시장 전면개방'에 항의하며 벼논을 갈아엎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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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철이다. 도심지를 벗어나면 우리 눈에 들어오는 첫 번째 풍경은 논과 밭이다. 산과 들, 과수원과 농가가 어우러진 마을 풍경은 마음조차 평화롭게 한다.

이 풍경은 언제까지 유지될까. 우리나라 경지면적은 2003년 184만6천ha에서 2013년 171만1천ha로 지난 10년간 총 13만5천ha 감소했다. 이는 서울시 면적의 2배가 넘는 것이다. 이런 속도라면 농촌 풍경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또한, 지금 농촌은 풍경처럼 평화롭지 않다. 지난 7월 18일 박근혜 정부는 쌀 관세화 유예종료, 즉 쌀 수입 전면 개방을 발표했다. 지역 곳곳에서 농민들은 논을 갈아엎고, 농민단체 대표자들은 농성에 돌입했다.

쌀은 단순한 작물이 아니다. 우리 농업을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다. 농민 10명 중 7명은 쌀농사를 짓고, 농가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높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곡물자급률 22.6% 중 95%를 쌀이 차지한다. 쌀이 무너지면 식량을 외국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 이 중요한 문제를 행정부가 단독으로 '선언'이라며 발표했다.

농사 지으러 농촌으로

20년 전부터 시작된 쌀 시장 개방을 둘러싼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그래서 더욱 공론화 과정이 중요하다. 국민들이 판단에 필요한 충분한 정보를 접해야 하고, 농민들이 불안해 하지 않을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행정부와 입법부 간 긴밀한 논의가 필요하다. 쌀 수입개방을 위해서는 '양곡관리법'을 개정해야 하고, 국회 비준을 거쳐야 한다는 의견도 있는 상황에서 정부는 모두를 상대로 선전포고 하듯 발표했다. 시간이 거꾸로 흐른 것 같다.

나는 1996년 결혼 후 2004년 보좌관이 되기 전까지 8년 동안 전북 김제에서 농사를 지었다. 농사를 짓고 싶어 농대에 갔고, 농사를 잘 짓게 생긴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4년 내내 봄, 여름, 가을, 겨울 빠짐없이 농활을 다니다 '우리농업지키기범국민운동본부'와 '전국농민회총연맹' 간사를 거쳐 비로소 농촌에 살게 되었으니 첫해 봄은 찬란했다.

동네 빈집을 고쳐 살았는데 집 전체에 보일러를 깔고, 불 때는 아궁이를 입식 부엌으로 바꾸고, 집안에 화장실과 욕실을 만든 것은 물론 도배와 전기배선까지 남편이 다했다.

할머니가 혼자 사셨다는 우리 집은 마당을 빙빙 돌아 원추리, 달래, 냉이, 돌미나리, 머위, 비름나물, 명아주, 돌나물 등 온갖 나물이 자라고 있어 시어머니 표현에 따르면 '문만 나서면 먹을 것이 지천'이었다.

앞마당 한가운데는 커다란 보리수나무가 있었는데 부지런한 작은 새들이 해 뜨면 날아들어 지저귀니 알람이 필요 없었다. 비오는 날이면 개구리 소리가 시끄러웠고, 가을이면 방안까지 들어온 귀뚜라미를 쫓아내야 했다. 담 안에 꽤 넓은 텃밭이 있어서 고추, 부추, 대파, 호박, 가지를 길러 그 자리에서 뚝뚝 따다 먹었다. 수선화, 작약, 수국, 금낭화, 패랭이, 도라지꽃이 다투어 피던 꽃밭은 정갈했다. 대문이 없는 집이었다.

우리는 상추, 케일, 치커리와 같은 엽채류를 수경재배로 키웠다. 나보다 2년 먼저 내려가 농사를 짓던 남편은 수경재배 농장에서 급여도 제대로 받지 않고 '머슴살이' 하면서 기술을 배웠다. 둘 다 농대를 나온 '젊은 선진 농업인'이니만큼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 고정 판로만 확보하면 장래에도 유망할 것 같았다. 가진 돈이 없던 우리는 정책자금 대출을 받아 비닐하우스를 짓고, 시설을 갖추었다. 농약을 치지 않고, 흐르는 물에 미생물 제재를 타서 영양분을 공급하면서 그야말로 청정하게 재배했다.

나는 상추 따기의 달인이다. 수십 년 농사 경력의 동네 아줌마들과 일할 때도 내 속도가 가장 빨랐다. 둥치를 붙잡고 한 손에 싹 훑어 따는 기술이 있다. 상추는 쑥쑥 자랐지만 당시만 해도 친환경 수경재배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았다. 서울의 대형마트나 백화점이 좋은 판로인데 우리 같은 소규모 농장은 서울까지 독자적으로 배송하기가 어려웠다.

인근 전주시내 마트와 식당에 공급했는데, 소비량이 생산량을 따라가지 못했다. 결국 공판장에 냈다. 노지 상추보다 생산비가 많이 들었지만 공판장 가격은 같았다. 한 박스에 5000원만 나오면 먹고 살만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500원이 나온 적도 있었다. 드물게 1만 원이 넘는 날도 있었다. 일조량 부족으로 수확량이 적을 때인데, 우리 농장도 똑같이 수확량이 줄어드니 손에 들어오는 수입은 그게 그거였다.

'식량주권과 먹거리안전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 회원들이 지난 6월 20일 오후 경기도 의왕 한국농어촌공사 인재개발원에서 열릴 'WTO 쌀 관세화 유예 종료 관련 공청회'에 참석하기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어 "제대로 된 대책이나 의견수렴도 없이 일방적으로 쌀 전면개방을 선언하는 것은 정부의 역할을 포기하는 행위이다"며 정부를 규탄하고 있다.
▲ 농민단체 회원 "쌀 전면개방 반대" '식량주권과 먹거리안전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 회원들이 지난 6월 20일 오후 경기도 의왕 한국농어촌공사 인재개발원에서 열릴 'WTO 쌀 관세화 유예 종료 관련 공청회'에 참석하기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어 "제대로 된 대책이나 의견수렴도 없이 일방적으로 쌀 전면개방을 선언하는 것은 정부의 역할을 포기하는 행위이다"며 정부를 규탄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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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생산성이 맞지 않아 나중에 하우스의 절반에 오이를 심었다. 나는 오이 농사를 가장 힘든 농사로 꼽는다. 아이가 돌이 되지 않았을 때라 업고 일했다. 아이를 업고 하우스 안의 좁은 통로를 오가며 순을 올리고, 오이를 수확하고, 나르는 일은 허리와 어깨가 끊어질 것 같은 중노동이다.

농사 8년, 빚만 늘었다

꽈리고추도 키웠다. 여름날 고추를 따러 하우스 안에 들어가면 채 십분도 되지 않아 속옷, 겉옷 모두 흠뻑 젖는다. 꽈리고추는 작은 건 괜찮지만 너무 크면 가격이 형편없다. 농가 입장에서 작은 건 무게가 안 나가니 손해다. 그러니 적당한 크기에 딱 맞춰 수확해야 한다. 햇볕 짱짱한 날이면 얼마나 쑥쑥 자라는지 한 두렁 따고 나면 두렁 끝에서는 또 자라 있었다. 수확기가 시작되면 몇달 동안 쉴 새가 없었다.

어스름한 새벽부터 시작하여 해가 지고 난 이후에도 트럭 전조등을 켜고 일했다. 완전히 어두워져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면 10시가 넘어 있었다. 그게 끝이 아니다. 집에 들어와 수확한 작물을 가지런히 포장했다. 12시 전에는 잘 수 없었다. 녹초가 된 몸으로 잠깐 눈을 감았다 뜨면 새벽 5시, 다시 일하러 나갈 시간이었다.

김제는 곡창지대이니 당연히 논농사도 지었다. 좋은 논은 우리 차지가 아니었다. 초보 농사꾼인 우리가 빌릴 수 있는 논은 물 빠짐이 안 좋거나 네모반듯하지 않아 손이 많이 가는 논, 길에서 떨어져 있어서 농약 칠 때 불편한 논들이었다. 그나마도 한 곳에 모여 있지 않아 이쪽 논에서 저쪽 논으로 이동하려면 차타고 이십 분은 가야 했다.

논으로, 밭으로, 하우스로 정신없이 오가야 했지만 그래도 쌀은 가을에 목돈이 되고, 밭작물이나 시설 작물과 달리 가격이 안정되어 있어 든든했다. 우리 집 '기본소득'은 쌀이었다. 힘들어도 좋았다. 내가 농사를 짓고 있었다.

농사의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해마다 농산물 가격은 생산비에 못 미쳤다. 작황이 좋으면 가격이 떨어지고, 작황이 안 좋으면 농산물 가격안정이라며 수입을 해버리니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가을걷이를 해도 종잣대, 농약값, 비룟값, 소작료, 이자까지 밀린 돈을 정산하고 나면 생활비는커녕 다음해 농사지을 자금도 남지 않았다.

부채가 늘자 더 열심히 일해서 갚을 마음에 농사 규모를 키웠다. 3000평으로 시작했던 감자 농사는 해를 거듭하면서 무려 3만 평까지 커졌다. 인력업체를 통해 아줌마 수십 명을 불러다 일했다. 기계도 빌려야 했다. 부채를 갚으려 규모를 늘렸지만 이 때문에 부채는 더 커졌다. 남편은 농한기에 인삼밭 일도 하고, '노가다'도 하였지만 빚은 늘어만 갔다.

나도 일자리를 구했다. 초등학교 방과 후 교사를 하면서 과외도 세 팀이나 했다. 새벽이면 일어나 농사일을 하고, 학교에 출근했다가 퇴근 후 과외를 하고, 집에 와 한밤중까지 수확한 작물을 포장했다. 사람을 만날 시간도, 책을 읽을 여유도 없었다. 농사를 짓고 싶었고, 농사를 지어 행복했다. 그리고 그저 열심히 일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남은 건 부채와 절망이었다.

문제는 정부였다. 농작물을 시장경제에 존재하는 여러 상품 중 하나로 보는 정부는 농업 역시 경쟁력을 갖추어 시장에서 살아남으라 하였다. 그것이 시장경제의 기본 원리라 하였다. 농업의 비교역적 가치를 말하고, 다른 산업과 달라서 한 번 무너지면 복원이 매우 힘들다고 농민들이 아우성을 쳐도 정부는 듣지 않았다.

안전한 먹을거리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생태, 경관, 전통 문화를 보전하고, 자연 재해를 방지하는 등 농업의 다원적 기능은 시장 가치로만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WTO(세계무역기구) 신자유주의 체제는 농업을 최대 이윤추구, 경쟁력 지상주의로 몰고 갔다.

듣지 않는 정부를 향해 백날 요구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우리 스스로 권력기관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농민의 목소리를 정치적으로 대표할 정당이 간절했다.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을 표방한 민주노동당이 보였다. 많은 농민들은 농사짓고 살기 위해 민주노동당 당원이 되었다. 그해 기적처럼 강기갑, 현애자 두 명의 농민 의원이 탄생했다. 한줄기 빛이 있다면 그런 것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4년이다.

산업의 눈으로만 농업을 보는 시각

당시에도 쌀 시장 개방을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이 있었다. 1994년 UR(우루과이라운드) 협상 때 쌀 관세화 예외를 인정받은 10년의 기간이 지나 재협상의 시기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10년 더 관세화를 유예하겠다고 했고, 농민들은 유예가 아니라 전면적으로 재협상을 해야 한다고 했다.

지난 2004년 11월 13일 서울역광장에서 전국농민연대 주최로 열린 '쌀개방 협상 중단과 국민투표 실시 촉구 2004전국농민대회' 현장. 당시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이 머리띠를 매고 집회에 참석했다.
 지난 2004년 11월 13일 서울역광장에서 전국농민연대 주최로 열린 '쌀개방 협상 중단과 국민투표 실시 촉구 2004전국농민대회' 현장. 당시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이 머리띠를 매고 집회에 참석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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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의원 강기갑은 쌀 수입개방을 막기 위해 수차례의 단식 농성도 불사했다. 기나긴 단식 농성에도 한복 두루마기 차림에 꼿꼿했던 그의 등이 지금도 눈에 생생하다. 외통위, 법사위를 숱하게 점거했고, 본회의장을 지켰으며 삼보일배, 풍찬노숙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가 단식이나 점거농성만 했던 것은 아니다. 여야의원 13명과 함께 민주당 한화갑 의원을 대표로 '농어업 회생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을 결성하여 국회 안에서 농업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구심 역할을 했다.

또, 여야 의원 76명과 함께 '쌀 전면재협상 촉구결의안'을 제출했는데 이 결의안은 민주노동당,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물론 권오을·김용갑·이계진 등 한나라당 의원들도 함께 했다.

농업을 지키기 위한 의정활동은 '제6차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열렸던 홍콩을 비롯해 멕시코 칸쿤, 워싱턴, 시애틀 등 국외로도 향했다. 내가 알기로 그는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 농업을 지키고,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어디든 가고, 누구든 만났다.

농민들은 정책의 요구자에서 입안자로, 정치의 객체에서 주체로 나서고자 진보정당 활동을 했다. 농업·농촌의 미래를 위한 대안을 마련하고, 농민과 도시민의 공생을 도모하고, 먹을거리 안전과 식량주권을 지키는 정치 활동을 꿈꾸었다. 농민의원은 국회 안에서 300만 농민을 대신하여 말하고, 싸우고, 설득하고, 협의했다.

물론 정치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여러 활동에도 불구하고 2005년 11월, 결국 '쌀 관세화 유예 협상 비준 동의안'은 의결되었다. 결과적으로 막지 못했지만, 민주노동당 의원들과 농민들은 국회 안과 밖에서 하나였다.

정치적 대리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시민은 국가권력과 직접 부딪혀야 한다. 지금 농민들은 정부의 일방적 선언에 맞서 파릇파릇 벼가 멀쩡히 뿌리내린 논을 통째로 갈아엎는 등 직접 행동에 나섰다.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18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내년 1월 1일부터 누구나 관세만 내면 쌀을 수입할 수 있도록 하는 쌀 수입 전면개방을 발표하고 있다.
▲ 내년부터 쌀 수입 전면 개방 발표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18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내년 1월 1일부터 누구나 관세만 내면 쌀을 수입할 수 있도록 하는 쌀 수입 전면개방을 발표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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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는 이 문제에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행정부의 독단을 견제할 책임이 입법부에 있다. 쌀 수입 전면개방이 사회와 경제에 미칠 영향을 객관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관세화 유예와 전면 개방의 득실조차 정확히 모른 채 당연한 수순처럼 진행되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 국회의 고유 권한인 입법권과 비준 동의권을 행사해야 한다.

쌀 수입 개방은 쌀농사를 짓는 농민만의 문제가 아니다. 식량은 국민의 건강권과 직결됨은 물론 국가의 존립과 관련된 문제이기에 식량안보, 식량주권이라는 용어가 쓰인다. 지난 20년 간 쌀 수입 개방을 미뤄왔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쌀밥 먹는 모두가 생각해 봐야할 일이다.

덧붙이는 글 | 글을 쓴 박선민 기자는 정의당 박원석 의원실에서 일합니다.



태그:#쌀, #쌀개방, #농사, #진보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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