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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유례없던 회담록 무단 공개

2013년 6월 24일, 국정원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동서고금을 막론해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 2차 남북정상회담록 전문을 일반 문서로 재분류하여 무단 공개한 것이다. 국가권력이 국가를 향해 자해행위를 한 격이었다. 그야말로 무법행위였고 더 나아가선 남북관계 및 국가외교의 파탄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원세훈도 차마 저지르지 못한 일이었다. 실제 당시 국정원 내에서도 회담록 공개에 대해 반발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민주당, <민주당 국정원국정조사 대국민보고서>, 2013, 59쪽)

물론 국정원과 박근혜 정권의 이 같은 행보는 사전 준비를 거친 것이었다. 정의당 서기호 의원에 따르면, 국정원은 2013년 4월부터 국가기록원과 법제처에 공문을 보내 대화록 열람·공개 절차를 문의했다고 한다. 또 이 무렵 새누리당의 한 의원이 사석에서 "정부 출범 초기에 그런 논의가(회담록 무단 공개) 있었던 것으로 알지만 뭘 그런 걸 하느냐는 얘기가 있어서 들어가 버렸다"고 언급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한겨레> 2013. 6. 26)

그러나 박근혜 새누리당 정권은 이를 밀어붙였다. 겉으로는 남재준 국정원장이 주도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는 누가 봐도 남재준 단독결정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국정원이 대통령 직속기관임은 물론이거니와 권영세 녹취록에서 확인되듯 새누리당은 비상계획의 일환으로 집권 후 회담록을 공개하려는 작전을 이미 세워두고 있었다.

또한 이날 박근혜 대통령이 여야가 제기한 국정원 관련 문제에 대해 국민 앞에 의혹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언급한 1시간 뒤 국정원이 회담록을 공개한 사실은 그것이 박 대통령의 재가에 따른 것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민변, <박근혜 정권 1년 失政 보고서>, 27쪽) 아울러 이날 박 대통령은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해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대선 때 국정원이 어떤 도움을 주지도,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라고 잡아뗐다. 또한 박 대통령은 다음날인 6월 25일에도 "엔엘엘은 젊은이들이 피와 죽음으로 지킨 곳"이라고 말해 국정원의 행위를 재차 뒷받침하였다.

그리고 박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은 엔엘엘을 역사적 사실과는 상관없이 이념문제, 즉 '국민'과 '비국민(=종북)' 여부를 가리는 기준으로 삼겠다는 언술이기도 하였다. 즉 엔엘엘 논의의 규정적인 틀(기준)을 제시하고 그 안에서의 논의만을 허락함으로써 향후에도 엔엘엘을 정략적으로 활용하겠다는 의지 표명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곧 박근혜 정권이 남북 간 엔엘엘 문제 해결, 더 나아가 남북관계 개선을 바라지 않음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역풍에 직면한 박근혜 새누리당 정권

하지만 회담록을 공개해 이른바 친노 세력을 종북으로 몰아 괴멸시킬 수 있다는 박근혜 새누리당 정권의 기대는 '그들만의 믿음'에 불과한 것임이 곧 드러났다. 회담록 전문에는 노 대통령의 엔엘엘 포기 발언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정원이 공개한 회담록 전문을 읽어보면, 노 전 대통령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엔엘엘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남쪽의 정서상 이를 바꾸는 것 또한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회담록 공개 직후 극우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다들 노 전 대통령의 엔엘엘 포기 여부에만 주목한 점이다. 정작 회담록이 담고 있는 핵심적인 사실은 참여정부의 서해평화협력지대 구상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참여정부의 엔엘엘 포기 여부를 떠나 회담록 공개는 그 자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사실상 국가의 미래를 강탈한 행위에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무단 공개된 회담록의 내용 중에는 북일관계에 대한 당시 남북정상의 입장 등 주변국의 입장에서 볼 때 민감한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예컨대 6월 26일, 일본의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은 회담록 내 일본 관련 내용을 상세히 전하며 두 정상의 아베 신조 총리에 대한 대화 내용과 관련해 "일본 정부는 당시 남북 정상회담을 기회로 북일 관계를 진전시키려는 계획이었고, 이를 위해 노 전 대통령이 중개자 역할을 맡아주기 원했지만 실제론 남북 양쪽에서 냉담한 취급을 받은 것"이라 평가한 보도를 내보내기도 했다.

또한 회담록에 나타난 노 대통령의 발언을 엔엘엘 포기로 해석할 경우 이를 빌미로 북이 엔엘엘 무력화를 시도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박 정권과 국정원이야말로 이적행위를 한 셈이었다. <월스트리트저널>, <글로벌포스트>,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르몽드> 등 주요 외신 역시 회담록 무단 공개가 국정원의 대선개입 논란에 대한 관심을 돌리기 위한 불법 정치행위이며, 노 대통령의 엔엘엘 포기발언은 없었다라고 보도했다. 또 이들 중 몇몇 언론은 박정희 정권 시기 정보기관을 투표 조작, 학생 탄압 등에 활용한 사실을 함께 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회담록 공개에 대해 그 누구보다 격앙된 반응을 보인 측은 북이었다. 6월 27일, 북은 긴급성명을 발표해 회담록 공개의 배후로 청와대를 지목하고 이를 "대화상대방에 대한 엄중한 도발"로 규정했다. 또 박근혜 새누리당 정권을 향해 "북남수뇌상봉까지도 정쟁의 농락물로 삼는 천하무례한 정치적 패륜무리, 정치깡패집단이며 남조선 정치라는 것이 식민지후진국에서만 볼 수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지막지하고 유치한 시정배들의 정치, 외교상식도 북남관계윤리도 모르는 마구잡이 정치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며 엄중히 비판했다.

세습왕조라는 비판을 듣는 북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으니 그야말로 한국정치의 수준이 말이 아니었다. 이처럼 회담록 공개는 남북 간의 신뢰, 더 나아가 남북한과 관련된 주변국과의 신뢰에 치명타가 될 수 있었다. 이는 이상과 비전을 결여한, 오직 권력만을 위한 정치의 본질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에 박 정권은 여론의 역풍에 직면했다. 회담록 공개 직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노 대통령의 발언이 엔엘엘 포기가 아니라고 답한 응답자가 53%로 '그렇다'라고 답한 응답자(24%) 보다 2배가량 많았다. 또 응답자의 69.5%가 회담록 공개의 주체를 대부분 청와대 등 여권 핵심부라 답했으며 회의록 공개가 부적절한 결정이었다고 답한 응답자가 그 반대보다 14% 정도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난 조사결과도 있었다. 새누리당은 서둘러 회담록 무단 공개는 국정원의 단독 행동이라 선을 그었다. 그러나 분노한 여론은 더욱 확산되었고, 그 결과 6월 말까지 촛불과 시국선언은 각계각층과 지방으로 확산되어갔다.

이와 함께 국정원이 회담록 원본과 발췌본을 동시에 공개한 덕분에 새누리당에서 엔엘엘 부분을 어떻게 왜곡 선전했는지 명료하게 드러났다. 한 신문은 국정원이 회담록 발췌본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노 대통령의 발언을 짜깁기하여 맥락을 호도한 것이 1차 왜곡이고, 그 뒤 새누리당이 발췌본 조차 국민에게 거짓으로 전달한 점이 2차 왜곡이라 지적하였다.(<경향신문> 2013. 6. 28)

이에 따라 국가기밀을 정쟁에 악용했다는 비판과 책임론이 거세질 수밖에 없었다. 자연 회담록 내용에 대한 거짓정보를 흘리며 의원직을 걸겠다고 천명한 서상기,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에 대한 사퇴요구가 뒤따랐다. 그러나 두 의원은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며 문재인 의원 사퇴 주장 등 적반하장식의 대응으로 넘어가려 했다.

이어 6월 26일 야당의 권영세 녹취록 공개와 김무성 의원의 '고백'에 의해 대선 당시 박 후보 캠프의 회담록 사전 입수 사실이 밝혀지고, 대선개입과 엔엘엘 동원 작전이 국정원을 매개로 긴밀한 연관 하에 진행된 '오래된 계획'임이 드러나면서 새누리당은 재차 수세에 몰렸고, 회담록과 관련된 '또 다른 국면'이 형성되었다.

엔엘엘 이념화가 노린 것, 그리고 민주당의 패착

이런 속에서 국정원, 국방부, 새누리당은 노 대통령이 엔엘엘을 포기했다는 공세를 지속했다. 특히 새누리당은 6월 25일 서해평화협력지대 구상을 두고 영토주권 포기라 공격하더니 다음날에는 노 전 대통령이 '반국가단체' 수괴를 이롭게 한 '이적행위'를 했으므로 '반역의 대통령'이라는 비난까지 퍼부었다.

노무현은 박근혜 새누리당 정권에 의해 주조된 '첫 번째 희생양'이었다. 새누리당이 여론의 역풍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비이성적 반인간적 언어를 구사하며 억지 공세를 이어나간 것은, 엔엘엘 문제를 쟁점으로 끌고 가야한다는 절박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새누리당은 엔엘엘 수호를 '국기(國紀)' 차원의 문제로까지 승격시켰다. 6월 28일, 황우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기자회견을 열어 "엔엘엘은 더이상 외교가 아니라 영토주권에 대한 문제"라고 규정하면서 "우리 영토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담는 여야 공동선언문을 만들어 국민 앞에 상신하자"고 제안했다.

이는 '엔엘엘의 이념화'로서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실이 '국기문란'으로 비판받고 있는 데 대한 맞불작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실체적 진실과 관계없이 북의 존재를 근거로 정권영속을 꾀하던 역대 극우반공독재의 전략과 비슷한 것이었다. 새누리당이 6월 25일 야당의 국정원 국정조사 요구에 합의해준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한편으로는 엔엘엘 이념공세를 계속해 국정원 규탄 여론의 김을 빼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정조사 요구를 수용해 촛불집회 확산의 동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새누리당의 이러한 태도, 즉 '엔엘엘의 이념화'와 이에 입각한 공세는 정국 및 여론주도권의 측면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미 새누리당이 국정원 국방부 검찰 등 권력기관과 방송 언론 대부분을 장악한 속에서 엔엘엘 이념은 전가의 보도처럼 언제든 활용할 수 있었고, 야당은 엔엘엘 이념에 깔려있는 규정적 구도를 깨트리지 못함으로써 관권부정선거라는 민주주의 문제와는 전혀 관련이 없음에도 이 문제를 아예 외면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점은 이후 새누리당이 국가기관 대선개입 문제에 맞서 1년 동안 엔엘엘 또는 회담록 동원작전을 지속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실제 6월 30일 문재인 의원은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회담록 원본 확인(국정원이 공개한 회담록 전문이 2008년 1월 생산본이었기 때문)을 주장하였고, 민주당도 이를 택했다. 7월 2일 국회는 회담록 등 국가기록원 보관자료 제출 요구안을 가결시켰다.

그러나 이미 국정원 보관 회담록 내용에 대해 엔엘엘 포기로 보지 않는 여론이 압도적 다수였던 상황에서, 또한 이제 대선 당시 대선기간 박 후보 캠프의 회담록 입수와 국정원 대선개입 사실 간의 연관성을 밝혀내고 이와 함께 국정원의 회담록 무단 공개라는 전대미문의 사태에 대해 반국가행위라며 역공을 펼쳐야 할 시기에 민주당이 이 같은 입장을 취한 것은 전략적 실수였고, 박 정권의 회담록 무단공개 책임 부담을 덜어주는 패착이었다.

회담록 문제는 속성상 '이념문제'였으므로 그것이 국가기관의 불법 대선개입과 연관되지 않는 한, 그 자체 민주주의의 문제를 국가 이념문제로 호도할 개연성이 높았다. 결국 이는 이후 새누리당이 짜놓은 '회담록 프레임'이 지속되고, 국가기관 대선개입 문제의 전면쟁점화가 어려움을 겪는 단초가 되고 말았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경향신문>, <뉴시스>, <연합뉴스>, <한겨레>, <한겨레21>, <한국일보>

민주당, <민주당 국정원국정조사 대국민보고서>, 2013.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박근혜 정권 1년 失政 보고서>, 2014.



태그:#국정원, #회담록 무단 공개, #엔엘엘, #일본, #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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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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