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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사상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시기는 칼 야스퍼스가 '축의 시대'(axial age)로 명명했던 BC800에서 200년까지다. 이때 서양에서는 인류 지성사에 거대한 흔적을 남긴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지성이 태어나 활동했고, 동양에서는 석가모니, 공자, 맹자, 노자 등이 있었다. 정치적으로 봤을 때 중국은 춘추시대(BC770-BC476)와 전국시대(BC 475-BC221)를 지나고 있었다.
공자님을 모신 푸즈먀오나 공먀오는 입신양명을 바라는 이들에게 종교적인 역할도 했다. 하지만 종교라기 보다는 통치이념이다
▲ 공자님을 모신 난징 푸즈먀오 공자님을 모신 푸즈먀오나 공먀오는 입신양명을 바라는 이들에게 종교적인 역할도 했다. 하지만 종교라기 보다는 통치이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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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고난은 수많은 사상과 신앙을 낳았다. 제가백가라 불릴 만큼 다양한 유파가 생겨났다. 인의를 내세우지만 계급적 사회를 지향한 유가, 냉혹한 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법가, 공격하지 말자는 평화론을 내세운 묵가, 무위를 내세운 도가 등 익숙한 유파는 물론이고 명가, 음양가, 종횡가, 잡가, 농가 등도 성행했다. 사실상 종교를 제외한 모든 사상은 이때 정리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후 중국은 정치적으로 법가가 성행한 적이 있지만 한나라 이후에는 통치자들이 정치사상으로 유가를 받아들였다. 반면에 종교적으로 지도층은 불교를, 서민층은 불교와 도교를 골고루 갖고 있었다.

부자되고 싶은 욕망은 무수한 향에도 담겨 있다. 중국인들은 이런 마을을 폭죽놀이, 향 등에 담았다
▲ 산동 치엔포산의 재신묘 부자되고 싶은 욕망은 무수한 향에도 담겨 있다. 중국인들은 이런 마을을 폭죽놀이, 향 등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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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부터 한중일의 확연한 사상관이 드러난다. 중국은 이런 사상들을 하나의 솥에 넣어 혼융시키면서 종교간 갈등의 역사가 거의 없다. 물론 정권의 말기에 도가 사상을 받드는 황건적이나 홍건적이 있지만 혼란한 시대의 지도자들이 갖는 편견일 뿐이었다.

반면에 한국은 불교, 유교는 물론이고 기독교를 받아들여 거의 교조적이라 할만큼 원칙적으로 받아들인다. 일본도 하나를 믿는 것은 맞지만 사상적 깊이가 있는 종교보다는 자체적인 신앙인 신사를 절대적으로 유지하며, 외래종교가 들어갈 틈을 주지 않는다.

수많은 종교 속에 기독교 역시 문화대혁명 같은 시기를 버티고 살아있다는 것이 신비하다
▲ 산시 핑야오 구청의 천주당 수많은 종교 속에 기독교 역시 문화대혁명 같은 시기를 버티고 살아있다는 것이 신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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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멀티포트라는 중국의 특성은 나에게도 신비로운 것이었다. 그것이 가장 깊게 다가온 것은 산시성 핑야오(平遙) 고성에 갔을 때다. 서주 선왕(宣王 BC827) 때부터 만들어진 이 고성은 산시성의 거친 평원에 둘레 6163미터를 12미터 높이로 쌓은 성이다. 전체 면적이 25평방킬로미터이니 그리 크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안에는 중국이 가장 모든 사상이 녹아있었다.

심지어는 중국인들에게 최근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돈에 대한 숭배까지 느낄 수 있었다. 우선 성의 중심부에는 유교 사당인 문묘가 있다. 그 옆으로는 성황묘나 청허관 같은 도교사원이 늘어서 있다. 또 성안은 아니지만 바로 옆에는 전궈스(鎭國寺)나 쑤앙링스(雙林寺) 같은 고찰들이 있다. 이런 동양 전통 사원에 가장 눈에 띄는 곳이 성당이다. 1910년에 만들어진 이 성당은 문화대혁명 등 거친 시기를 거치면서도 온전한 모습으로 이곳을 지키는 것은 중국인들이 가진 종교적 포용력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중국에는 기독교 유산이 별로 남아있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핑야오 고성 안에는 성당(天主堂)이 잘 보존되어 있어 서양 종교 역시 중국에 잘 혼융된 것을 말해준다. 특히 핑야오는 중국 고대의 월스트리트로 불리는 지역이다. 중국식 은행이라 할 수 있는 표호의 발상지가 이곳이기 때문이다. 중국 최대의 상단 중 하나였던 산시상인, 즉 진상(晋商)의 고향이 핑야오다. 핑야오의 대표적인 유산인 일승창(日升昌)을 만든 이는 뢰이태(雷履泰 1770-1849)다.

이 표호는 중국 은행의 시초 같은 어음을 거래하는 것으로 이곳 상인이 근대 중국 금융을 장악하는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신해혁명부터 위기를 맞았지만 황토고원이라는 극악한 지역에서 중국의 대표적인 상단으로 성장한 진상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이런 핑야오 고성도 위기가 찾아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문화대혁명이었다. 홍위병들은 중국 자본주의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곳을 그냥 둘리 없었다. 때문에 일승창 표호 등 건물도 많이 파괴되고 사치스럽던 내부 장식물도 거의 사라졌지만 고성과 그 정신 문명 등은 중국의 혼융된 사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곳이 됐다.

이곳에서 중국식 사회주의가 싹텄다
▲ 구이저우 준의회의 터 이곳에서 중국식 사회주의가 싹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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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전통 사상의 멀티포트이지만 당대 사상도 철저히 현지화해서 한 곳에 녹이는 특이한 문화적 특성을 갖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중국식 사회주의'다. 중국식 사회주의 태동은 1935년 1월 15일부터 17일까지 열린 '준의'(遵義)회의가 기점이다. 이 회의 이전까지 중국 공산당을 이끈 것은 모스크바 중산대학 출신의 보구(博古 1907-1946)과 독일 출신 공산당 고문 리더(李德 본명 오토 브라운 1900-1974)였다.

하지만 대장정의 초반기 중국 현실을 잘 모르는 이들의 지도로 장정군은 괴멸 직전까지 몰리자, 준의회의에서 마오쩌둥이 실권을 잡는다. 이후 마오쩌둥은 전술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중국식 사회주의를 확립해 가고, 당대에 들어서도 중국식 사회주의 모델을 만들어가면서 중국만의 독특한 사회주의를 만들었다. 그 기초는 사회주의이자 공산주의니 만큼 서방의 시점에서 이해되지 않은 점이 많다. 

때문에 중국이 세계 양대 헤게모니 국가로 올라선 후 많은 이들은 중국 정치가 가진 비민주성을 비판한다. 군대, 공안이 정보를 장악하고, 일반 시민들의 직선제가 배제된 것에 대한 비판을 기초한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 세계적인 강국이 되어가자 중국은 서서히 서방을 향해 당신들의 체제가 절대선인가를 묻기 시작한다.

2014년 5월28일 런민르빠오(人民日報) 1면 칼럼 '서구 민주주의는 왜 점점 그 힘을 잃어가는가'(西式民主爲何日逝失靈)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서구에 대한 예봉을 드러낸다. 이 칼럼은 서구 직선제의 투표율이 현저히 떨어지는 점, 미국 정부가 셧다운(부분 업무 정지)된 점 들을 들면서 서구에게 너무 자만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러면서 시장의 자율(보이지 않는 손)과 정부의 역할(보이는 손)을 조화시키는 중국식 사회주의가 우월하다고 자부한다.

중국에서 사상의 융합을 보여주는 가장 경이로웠던 장면은 노자 '도덕경'이 나왔다고 알려진 함곡관에 들렸을 때다. 함곡관의 중심 건물로 노자를 모신 태초궁(太初宮)의 신상 옆에는 공자, 맹자뿐만 아니라 석가나 예수까지 노자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훗날 노자를 모신 이들이 동양사상 뿐만 아니라 서양 사상들도 모두 도와 연결되니 노자가 좋아할 거라는 믿음에서 그렇게 배치한 듯 했지만, 이방인에게는 너무 낯선 풍경이었다.

그리고 이런 중국식 사상의 융합은 그저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서구에서 흔히 동양사상이라고 하는 부분에는 이런 도가적 사고가 많다. 도덕경은 도가의 근본 사상이 됐을 뿐만 아니라, 80년대 유네스코의 통계에 따르면 성경 다음으로 번역이 많이 된 저작이 될 만큼 세계 사상계에 큰 영향을 줬다.

이곳은 지장보살을 모신 곳이다. 불교는 중국 지배층들이 종교로 가장 중시했다
▲ 중국 4대 불교성지인 지우화산에서 기다하는 이들 이곳은 지장보살을 모신 곳이다. 불교는 중국 지배층들이 종교로 가장 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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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중국사에서 종교가 원인이 되어 치른 전쟁은 거의 없다. 앞서 말했듯이 왕조의 말기에 도교가 부각하기는 하지만 이는 종교적 특성보다는 기복을 바라는 성격이지 종교라고 하기는 어렵다. 물론 기독교의 영향을 받는 태평천국의 난 시기도 기독교를 메인의 사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자신을 절대화하려는 수단으로 받아들일 뿐 온전한 기독교 신앙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도 중국인들이 종교를 대하는 자세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소림사 구경을 마치고 빠져 나오는 길에 소림사가 직영하는 약국을 만난다. 불교가 경제를 만난 모습이 특이하다.
▲ 소림사가 운영하는 약국 소림사 구경을 마치고 빠져 나오는 길에 소림사가 직영하는 약국을 만난다. 불교가 경제를 만난 모습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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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중국,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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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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