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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여행사를 운영하던 시절 한국 기자들의 중국 바로알기 과정을 진행하며, 중국 산동반도 끝의 아름다운 해안도시 웨이하이시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곳 관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인사말을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수년전부터 옌타이시와 인연이 있어서 많이 교류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옌타이시 소개로 웨이하이시 관계자분들을 만나게 돼서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는 웨이하이 측 참석자들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이후 술이 돌면서 같이한 그곳 한국인회 관계자가 넌지시 나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아니 이곳에서 옌타이시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합니까. 이곳 사람들은 옌타이 시와 사이가 아주 나빠요."

웨이하이 사람들은 빠른 발전 속도로 인해 과거 상위 행정구역인 옌타이를 경계하는 마음이 강하다
▲ 웨이하이의 랜드마크 문 웨이하이 사람들은 빠른 발전 속도로 인해 과거 상위 행정구역인 옌타이를 경계하는 마음이 강하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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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이웃한 도시면서 왜 사이가 나쁠까. 여기에는 웨이하이의 도시 성장과정이 배경에 있었다. 원래 웨이하이는 행정적으로 옌타이시의 한 구와 같은 위치로 관할 관청 소재지도 지금의 웨이하이가 아닌 지역을 떠돌았다. 그러던 중 1983년 옌타이가 성급 직할시가 되면서 웨이하이도 현급 직할시로 분리되었고, 1987년에는 롱청, 원덩, 유산 지역을 거느린 지방급 직할시가 됐다. 이후 웨이하이는 한국과 가장 먼저 정기여객선을 개통하는 등 발전을 거듭해 지금은 소득수준에서 옌타이를 웃도는 자랑스러운 도시가 됐다. 따라서 옌타이 밑에서 있을 때의 서러움이 아직도 존재해 옌타이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감이 남은 것이다.

이런 정서는 옌타이와 웨이하이 만의 감정이 아니다. 사실 옌타이 친구들을 만나면서는 옌타이 시 사람들 안에서도 롱코우나 자오위앤 등 외곽 부속지역 뿐만 아니라 시 중심부에 있는 즈푸취(芝罘区),푸산취(福山区), 라이산취(莱山区) 사람들 간에도 적지 않은 편차가 존재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편차는 음식은 물론이고 방언 등에서 각기 다양하게 드러난다.

때문에 중국 사람들도 각 지역을 생각하는 다양한 선입견과 편견이 존재한다. "베이징 사람들은 돈도 잘 벌지 못하면서 매일 정치 이야기만 하는 허풍쟁이들이다", "상하이 사람들은 문화수준은 없고, 매일 돈 벌 궁리만 하는 수전노들이다", "베이징과 톈진 거지는 대부분 허난 사람들이다" 등 다양한 지역에 대한 선입견이 있다. 

이런 특성은 정치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에서 나타난다. 더욱이 중국이 거대해지면서 중국의 4대 직할시나 성, 자치구는 이미 하나하나가 나라와 같은 규모다. 나 역시 이런 차이를 어떻게 해석해서 생활에서 적용할지 곤혹스러운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우리나라 역시 같은 지방 안에서도 각 지역간 방언이 명확하고, 특색음식이 다르듯 중국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100배에 달하는 거대한 면적과 30배에 달하는 인구로 바꾸어 생각하면 그 차이는 너무나 명확하다. 또 56개의 민족이 있고, 인종적으로 봐도 전혀 다른 민족이라 할 수 있는 신장 웨이얼족이나 시장의 장족이 있다.

지역의 특성을 결정하는 기후 요소를 보더라도 최남단인 하이난다오의 겨울 평균 기온은 영상 20도를 오가는데, 북단 지아무스쪽은 같은 시기 기온이 영하 35도를 오간다. 극한의 겨울과 여름이 동시에 공존하는 곳인데 이 두 지역의 차이는 얼마나 크겠는가.

중국 중원에 자리한 베이징을 기점으로 봤을 때 베이징인과 산동, 상하이는 직선거리로 보면 각각 60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다. 이들의 언어로 봤을 때 의사소통률은 베이징과 산둥이 50% 남짓이고, 베이징과 상하이는 20%도 되지 않는다. 이 정도면 거의 일반적인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다. 지금도 출장차 상하이를 자주 찾는데, 상하이 지방 방송에서는 상하이어로 하는 만담이 자주 들린다. 기사가 재미있게 웃고 있을 때 나는 이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

그림 위쪽은 베이징 스차하이에 있는 작가 궈모루의 옛집 문당이다. 4개의 문당이 고관집 임을 말한다. 아래 호 중 오른쪽은 무관, 왼쪽은 문관의 집을 상징한다.
▲ 베이징의 문당호대 그림 위쪽은 베이징 스차하이에 있는 작가 궈모루의 옛집 문당이다. 4개의 문당이 고관집 임을 말한다. 아래 호 중 오른쪽은 무관, 왼쪽은 문관의 집을 상징한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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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는 예부터 문당호대(門當戶對)라는 문화가 있다. 문당은 중국의 전통가옥의 집 입구에 있는 대문의 위쪽을 가르킨다. 이 문당을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곳이 베이징 황궁인 자금성과 주변에 즐비한 중국의 전통 가옥인 사합원이다. 문당은 대문의 위에 자기 집안의 신분을 표시한 것이다.

우선 문당은 4개짜리와 2개짜리가 있는데, 4개는 1품에서 4품까지의 관리가 쓸 수 있고, 2개는 5품에서 7품까지의 관리가 쓸 수 있다. 문당 아래에는 돌로된 호가 있다. 문관집의 경우에는 벼루를 상징하는 네모를, 무관의 경우에는 전조를 상징하는 둥근형태로 되어있다. 문당호대란 결혼하거나 집안간 교류할 때 이 문당의 숫자를 맞추고, 문무의 특성을 알아 사귀거나 결혼한다는 것을 뜻이다.

이렇게 격을 맞추는 것이 기본적으로 문화 속에 배여 있는 만큼 한중간 교류에서는 국가간은 물론이고 지역간에 문당을 맞추는 일은 앞으로 실무자들에게 적지 않은 골칫거리가 될 것이다.

그럼 중국 각 지방을 어떻게 접근하는 게 맞을까. 우선 수도 베이징을 보자. 나 역시 베이징에 5년 정도를 거주하고, 베이징에 관한 책만 3권을 출간했지만 베이징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베이징은 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정물이 아닌, 지구상의 도시 가운데 가장 빨리 변신하는 도시다. 5년 전에는 1년에 한 번 정도 바뀌었다면 지금은 2~3개월에 한번씩 새 단장을 하는 도시이니 얼마나 신비한가.

베이징 사람들 역시 이른 퇴직으로 인해 비교적 나른한 일상을 보낸다
▲ 베이징 후통의 나른한 모습 베이징 사람들 역시 이른 퇴직으로 인해 비교적 나른한 일상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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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이 한 도시를 이해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더욱이 베이징은 그 도시의 발생부터 헤게모니를 잡은 사람들, 그리고 수도로서 베이징의 모습까지 너무나 다양한 모습이 존재한다. 지금의 베이징이 본격적인 도시가 된 것은 명나라의 3대 황제인 영락제가 1421년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기면서다. 수도가 옮겨오면서 남방의 민족들은 끊임없이 베이징으로 이주했다. 만주족이 명(明)을 무너뜨리고 베이징의 새 주인이 되자 이번에는 만주족들이 베이징에 급속히 밀려와 중심부를 차지했다.

그리고 1910년 만주족의 청이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수도 베이징에서 살던 만주족들도 서서히 만주족의 색채를 지운 채 한족과의 경계를 지워 버렸다. 다음 큰 기점은 1949년 중국의 탄생이다. 중국이 탄생하면서 지도자들은 자금성의 서쪽에 있는 중난하이(中南海)에 새로운 구중궁궐을 지었다. 외양은 옛 궁전처럼 화려하지 않았지만 정치적 위상은 과거 자금성과 다르지 않았다. 중난하이의 주변에는 당연히 새로운 사람들이 와야 했다. 그 사람들은 대부분 지방에서 올라온 공산당 지도자들의 간부와 친척, 그리고 그들의 식솔들이었다.

베이징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은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매년 봄 가을이면 전인대나 정협이 열리는 만큼 그들에게 정치는 빼 놓을 수 없는 문제다. 베이징에서 지나가는 노인에게 함부로 대하다가는 봉변을 당하기 쉽다. 지금은 초라해 보이는 노인들도 전에는 어지간한 자리를 차지했었고, 그들은 어지간한 사람들보다 더 높은 연금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함부로 시비를 붙기 보다는 어지간하면 피하는 게 좋다. 베이징인들은 다양한 정치적 풍설을 즐기지만 시비를 즐기지는 않는다.

전반적으로 베이징인들은 온순하다. 그들의 정치적 위상이 있기 때문에 막 주장을 내세우기 보다는 지금의 부나 권력을 유지하는 게 편하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또 베이징인들을 만날 때는 정치적 화제가 끊이지 않는 게 좋다. 물론 중국의 민감한 정치적 사안을 건드리면 안 되지만 지금 벌어지는 세계 정치 헤게모니 쟁탈전에 관해 베이징인들의 대부분은 하루 정도는 토론할 수 있을 만한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다. 사귄 지 좀 되었을 때 그가 집으로 초대한다면 이제는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하면 된다. 베이징 사람들은 남들을 함부로 집에 들이지 않지만 집에 들일 정도라면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터가 있는 상하이 루쉰공원에 가면 상하이인들이 여유를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상하이 루쉰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상하이 사람들 윤봉길 의사의 의거터가 있는 상하이 루쉰공원에 가면 상하이인들이 여유를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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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경제수도라는 상하이는 어떨까. 상하이는 160년 전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도 상하이를 부르는 한마디 단어는 그때 쓰던 어구의 이름에서 유래한 후(滬)다. 1842년에 아편전쟁(阿片戰爭)은 중국인들에게 피를 불렀지만, 상하이에게는 발전의 신호탄이었다. 리안의 영화 '색, 계'에서 볼 수 있듯이 1930년대 상하이는 동양 문화의 화려한 표지였다.

하지만 1949년 중국 공산화와 더불어 상하이는 그 화려한 겉옷을 벗고 인민복으로 갈아 입었다. 개혁개방 이후 홍콩과 맞닿은 광저우나 신흥도시 선전은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옷을 갈아입었지만, 90년대 이전만해도 상하이는 여전히 인민복 같은 낡은 빛이었다. 야사처럼 들리지만 주룽지는 상하이 당 시기 시절 중앙회의에서 읍소로 상하이의 재기를 주창했다. 주룽지의 의지도 있었지만 장쩌민의 등극은 상하이에 새로운 시대를 열어줬다.

90년대 초반 푸동개발을 기치로 상하이는 급속히 발전했다. 화려한 불빛의 푸동의 사무실이 다 차기도 전에 황푸강 서쪽의 낡은 집들이 헐리고 재개발 열기에 불타 있다. 급속한 발전바람을 타면서 상하이사람들은 '중궈런'(中國人)으로 불리기 보다는 '상하이런'(上海人)으로 불리기 원하는 상하이 사람들은 스스로 중국을 먹여 살린다는 자긍심을 갖고 있다.

이렇듯 베이징이나 상하이 등 대도시만 아니라 중국의 수천개의 도시들은 각 지역마다 각기 특색을 갖고 있다. 그리고 직할시나 광역시는 규모면에서 우리나라에 버금가는 곳이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정치 교류를 물론이고 유학생들도 대도시에 치중하기 보다는 성이나 도시별로 전문가를 꿈꾸고 한 지역의 언어나 문화, 역사를 배우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말이 나온다. 가령 중국 전문가라는 광범위한 말보다는 지앙쑤성 전문가, 충칭 전문가, 쓰촨 전문가등도 필요하다는 말이다.

중국 경제 규모가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로 넘어가는 상황이다 보니 직할시나 성의 경제 규모가 한국을 넘어가는 곳도 나오고 있다. 따라서 중국을 하나로 이해하는 것도 있지만, 각 성별로 제대로 이해해야만 오류를 줄일 수 있다. 7월 초 한국을 찾는 시진핑 국가주석이 최근 중국에 큰 투자를 한 한 대기업을 찾는 것도 자신과 부친의 정치적 고향에 투자를 한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가 있다. 반면에 한 대기업은 투자지역을 잘못 설정해 중국을 잘 아는 임원이 퇴임하고,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기도 했다.

표준화의 보급이 확산되고, 지역간 이동이 자유로워지면서 지역간 언어나 문화장벽은 서서히 사라지겠지만 중국과 사업을 하고, 중국에 미래를 걸고 싶어하는 이가 있다면 자신과 궁합이 맞는 지역을 찾을 필요가 있다. 우선은 음식 등 문화적 코드가 맞는 것을 확인하고, 날씨 등도 꼼꼼히 봐야 한다.

황허는 축복의 강이지만 변덕도 심하고, 인구도 늘려 허난은 오히려 가난한 지역의 대명사가 됐다
▲ 허난성 정저우를 지나는 황허 황허는 축복의 강이지만 변덕도 심하고, 인구도 늘려 허난은 오히려 가난한 지역의 대명사가 됐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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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떻게 지역을 알아야 할까. 우선 한국에도 중국 각 지역간에 특색을 다룬 저작이 많이 번역 출간됐다. 중국 지방 가운데 가장 많이 거론되는 지방이 허난(河南) 지방이다. 허난은 황허(黃河)의 중부를 두고 있는 지역으로 은(殷)나라 문명 유적들을 비롯해 고대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다. 13억 중국인 10명 가운데  하나가 허난 사람이고, 지구인 60명 가운데 한명이 허난사람일 만큼 거대한 지역이다.

하지만 중국에서 허난인의 이미지는 최악이다. 베이징에서 길거리에 구걸하는 이들을 보면, 택시 기사들은 "저 사람은 분명히 허난사람일 것이다"고 말한다. 또 "절대로 허난 사람은 믿지 마라"나 "불과 도둑과 허난 사람은 막아라"는 격언 아닌 격언이 있을 정도다.

이런 문제에 접근한 대표적인 책이 <허난 사람이 어쨌길레>(河南人惹誰了 마슈오(馬說) 저/海南出版社 간)와 <중원을 읽는다>(解讀中原 장샹츠(張向持)저/作家出版社 간) 등이다. 두 책은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는 허난인에 대해서 갖고 있는 오해나 편견을 없애는 한편 허난인들에게는 그들이 그런 시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진지한 충고의 형식으로 씌여져 있다. 허난은 사실 황허문화의 중심이고, 최근에 괄목상대할 정도의 발전을 보인 지역이다.

류지엔안(劉健安)의 <후난인의 정신>(湖南人的精神 中國社會科出版社 간)은 강남 최고 지성의 산실인 위에루슈위앤(岳麓書院)을 갖고 있고, 중국 현대를 이끈 마오쩌둥, 류사오치, 주룽지 등을 배출한 후난성 사람들의 저력을 보여주는 책이다.

중국은 넓고, 알 곳도 많지만, 자신과 코드를 맞출 기회의 땅도 그만큼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덧붙이는 글 | 연재기사



태그:#중국, #상하이, #베이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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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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