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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웬만하면 달리지 않으리라 결심했건만 그날은 왠지 기분이 좋았습니다.

회사동료들과 기분좋게 1차를 하고, 모처럼 2차 노래방까지 달려가 18번 메들리 중 하나인 '버스안에서'를 목이 쉬도록 부르고, 집으로 향하는 길목에서도 그 여흥이 남아 흥얼거리며 버스를 탔습니다. 2차까지 끝냈지만 조금은 이른시간이라 그런지 버스좌석이 군데 군데 비어있었습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기사아저씨 뒷자리는 내 앞에서 카드를 찍은 학생의 선점으로 차지하지 못하고 차선으로 내리기 좋은 자리인 뒷문 첫 번째 자리를 쳐다보았습니다. 다행히 점잖게 생기신 노신사가 창쪽에 앉아계셔서 안심을 하고 기분 좋게 가 앉았습니다.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정말 상쾌한 퇴근길이었습니다.

'엄마, 언제와요. 돌보미할머니 가셔야 한데요. 빨리 안 와요?'

평소에는 이 문자가 오기전 마치 신데렐라처럼 집으로 뛰었지만, 왠지 기분이 좋은 오늘만은 쫄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나뭇잎 향기 머금은 바람을 내뿜어주는 버스창문을 흐뭇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잠시 그 바람이 약해지는가 싶더니 버스가 정류장에 서고, 아저씨 한분이 올라오셨습니다.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좌우로 약간씩 비틀비틀거리는 아저씨 한분. 오늘 아저씨도 기분좋으신 날이었나 봅니다. 적당히, 아니 아주 많이 취하신 그 아저씨 기사님 바로 뒷자리로 다가가 좀 전에 나보다 앞서 그 자리에 앉았던 학생에게 "얌보, 얌보 안해? 요즘 젊은 것들은 말이야..."라고 호통을 칩니다.

그런데 이어폰을 끼고 있던 학생은 '뭐 이런 일이 다 있냐'는 듯 그 아저씨를 한 번 쳐다 보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앞을 보며 무시했습니다. 아저씨는 잠시 뭐라 뭐라 술주정하시다가 비틀거리며 뒤로 걸어 오셨습니다.

오... 그런데 설마, 설마, 이쪽으로? 하며 가슴 조이던 바로 그 순간, 버스가 갑자기 흔들리고 술 만땅인 그 아저씨가 내 무릎 위로 날아왔습니다.

"어... 양보를 안 해서... 어... 미안한데... 어떻게 하나..."

허허... 술에 취한 아저씨 무게는 둘째치고, 그 입 속에서 나는 복잡한 냄새와 이 해결할 수 없는 창피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아저씨가 일어나질 못 합니다.

"아이고, 선생님 이러시면 안 되는데... 제가 좀 도와 드릴께요."

내 옆에 앉았던 점잖은 아저씨까지 합세해서 둘이서 술 만땅 아저씨를 일으키려고 애써보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겨우겨우 일어선 아저씨께 내 자리를 양보하며 앉으시라고 해도 손사래 치시며 뒷로 또 자리를 찾아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미안하고 무안하셨는지 계속해서 중얼중얼 말씀하십니다.

"양보를 안 해서 그래, 양보를..."

무사히(?) 버스에서 내려 걸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아까 그 술 만땅아저씨의 입냄새 그거 어디서 맡아봤더라... 소주와 삼겹살, 그리고 김치찌게 국물까지 어울어지고 마셨던 소주의 숙취가 올라오기 시작해서 입속에서 발효되기 시작한 그 냄새.

아, 그 냄새였습니다! 어릴 적부터 술 좋아하시던 울 아버지가 뿜으셨던 냄새. 울아버지 김이장님이 술 한잔 하고 들어오시면 기분 좋게 후~하고 내뿜으시면서 뽀뽀하자고 입 내미실때 나는 냄새였습니다.

오늘은 모처럼 기분좋게 달리고 퇴근하던 길인데, 버스안에서 술 만땅 아저씨 덕분에 창피하고 당황했던 날입니다. 하지만, 왠지 낯익은 그 냄새 때문에 평생 자식들을 위해서 버스안에서 2시간을 흔들리며 매일매일 출퇴근했던 아버지가 얼마나 힘드셨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술 만땅 아저씨도 그렇게 하루의 피로를 소주 한 잔으로 풀고 흔들리는 버스로 집에 돌아가는 어느 집의 가장이시겠구나 싶어 버스가 섰던 자리를 슬쩍 뒤돌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약간 남은 취기로 그김에 울아버지에게 전화했습니다. 휴대폰 저쪽에서 울아버지 전화받으십니다.

"잠 좀 자자. 너 몇 신데 애들 놔두고 지금 들어가면서 전화냐!"

괜히 욕만 먹었습니다. 퇴근길 버스안에서 취객의 습격 때문에 잠시 정신줄을 놓았나 봅니다.

덧붙이는 글 | '출·퇴근길의 추억' 공모글입니다.



태그:#출퇴근길, #추억, #취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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