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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준비를 하는데 전화가 울린다. 중3 둘째 아들이다. 무슨 이유로 전화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이유를 아니 얼른 받기가 망설여진다. 열 번도 더 넘게 울리는데 끊기지 않는다.

"미안, 아들. 진동으로 해놓아서 몰랐네. 학교 갔다 왔어?"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만 늘어간다.

"네, 마덜. 언제 오세요?"

'언제라고 말하지... 삼십 분 후, 아님 한 시간 후, 차라리 집 앞이라고 할까?' 순간 대답을 선택하기 위한 머리가 복잡해진다.

"지금 갈 거니까 한 삼십분쯤이면 도착할 거야."

결국 사실대로 말한다.

"네... 그러세요? 오늘 저녁엔  생선이 먹고 싶어요. 싱싱한 것으로요."

시장을 갔다 오라는 소리다. 그럼 가는 시간 삼십 분, 장 보는 시간 삼십 분, 한 시간을 벌겠다는 계산이다.

"아들이 먹고 싶다는데 사가야지. 기다려."

전화를 내려놓는데 한숨이 절로 나온다.

드라마 보는 엄마, 야동 보는 아들

나를 폐인으로 만든 드라마 <시크릿가든>.
 나를 폐인으로 만든 드라마 <시크릿가든>.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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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말 한참 SBS 주말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현빈에 빠져 있을 때다. 본방 사수는 물론 인터넷 블로그나 신문기사들까지 일일이 찾아 읽으며 향후 전개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내가 여주인공 길라임이요 길라임이 나인 그야말로 폐인 생활을 했다. 더군다나 드라마가 끝나면 해병대로 자원 입대한다는 현빈은 그 존재만으로도 중년 아줌마의 심장을 두 세 배는 더 두근거리게 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인터넷 파도타기를 하고 있을 때 '덜컹'하며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온 아들의 외침.

"엄마, 우리한테는 공부하라 하고 엄마는 드라마에 빠져 계시면 불공평하잖아요. 자꾸 그러시면 엄마가 드라마 보시는 만큼 저도 게임을 할 거예요."

그렇게 협박하듯 말하고 씩씩거리며 뒤돌아서 가는 열세 살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언가로 머리를 강하게 맞은 것 같은 충격에 한동안 멍했다. 그때서야 보인 집안 풍경. 저녁 먹은 그릇들은 식탁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고 여기저기 빨랫감들은 어질러져 있었다. 아마 새벽 한두 시까지 다시 보고 할 거 다하고 나서야 치웠을 것이다. 방바닥, 거실 바닥은 오랫동안 걸레질을 하지 않아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바닥이 서걱거렸다. 남루한 집안의 풍경이 나의 모습 같아 순간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른다.

드라마 한 편에 빠져 일상이 흔들리고 부모로서 모범은 고사하고 불평불만의 대상이 된 내가 과연 마흔 넘은 성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순간 마음이 급해졌다. 당장 무엇을 찾아놓지 않으면 다음날도 그대로 폐인 생활을 할 것 같았다. 그러다 보면 아들의 말을 단순한 불평으로 여겨 쉽게 생각하다가 결국 걷잡을 수 없는 폭풍의 사춘기를 맞는 건 아닌지 불안했다. 

첫째가 무난한 사춘기를 보냈으니, 둘째도 그러려니 했던 게 얼마나 큰 오산인지 아들은 말하고 있었다. 그날 밤 늦게까지 찾아 알게 된 것이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청소년교육과 편입이었다. 학비도 저렴하고 직장과 가정생활 하는데 별 무리도 없겠다 여겼다. 사춘기를 앞둔 아들과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많이 될 듯했다. 전공과목에 헉헉대다 중도 포기할 가능성이 높은 삼학년보다는 시간은 더 걸리더라도 끝까지 완주할 가능성이 높은 이학년 편입을 선택했다.

그렇게 <시크릿 가든>의 현빈을 해병대로 떠나보내는 아쉬운 마음을 청소년교육에 대한 학문들로 채웠다. 공부 할 때는 일부러 거실에서 하거나 아들과 함께 독서실에 가는 것으로  모범이 되고자 노력했다.

퇴근시간 묻는 아들, 일찍 퇴근하는 엄마

여러가지 청소년에 대한 공부를 하고 상담기법도 배우는 등 나름 열심히 해 장학생이 되기도 했고, 서울남부보호관찰소에서 비행청소년 상담 자원봉사도 시작했다. 졸업할 땐 성적우수상까지 받았다. 아들에게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솔직한 맘으로는 '내가 이렇게 하는데 너희도 당연히 자극 좀 받겠지' 하는 생각이 있었다. 졸업한 후에도 관찰소 상담일을 계속했다.

어느날 성관련 범죄를 저질러 보호처분을 받은 학생을 상담했다. 어떻게 하다 그리했냐는 질문에 야동을 보고 호기심에 그리했다는 답변이 왔다. 놀라는 내게,

"요즘 그거 안 보는 애들 없어요."

하는 것이다. 순간 최근에 나의 퇴근 시간을 자꾸 확인하던 둘째가 생각났다. 그날 밤 아들이 잠들기를 기다려 컴퓨터의 열어본 목록을 확인하고는 뒤로 넘어가는 줄 알았다. 이건 결혼 전, 아는 언니 신혼집에 놀러가서 결혼식 비디오 본다고 넣었다가 기겁하며 처음 접했던 뭐 그런 것이 아니었다.

"뭐~ 뭐 이런 게 다 있냐." 

놀라서 허둥거려지고, 눈 둘 곳은 모르겠고, 아무튼 망설이다 모두 지워 버렸다. 그날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럴 때 어떻게 하라고 했는지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며 갖고 있는 자료들을 찾아보고 아들과 대화하기 위한 대화록을 만들었다. 다음 날이 주말이라 내가 하는 것보다는 남편이 말하는 것이 좀 더 효과적이다 싶어 코치했다.

"그거 보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네가 잘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근데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의 본능을 자극하는 것은 조절하지 못하면 쉽게 중독이 된다, 이런 식으로 말해야 해. 알았지?"

못마땅해 하는 남편을 거실로 내보내고 방안에서 몰래 엿들었다. 들어보니 부자간의 대화가 잘 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나즈막히 들려오는 아들의 말. 

"그럼 엄마도 드라마 중독되신 건가요?"
"야! 엄마는 스트레스 해소 차원에서 보는 거지, 드라마랑 그거랑 같니?"

난 참지 못하고 거실로 나가서 소리쳤다.

"저도 스트레스 해소 차원이라구요." 

아들도 지지 않았다. 남편이 다가와 옆구리를 찌르며,

"자알 하셨습니다~"

한다. 폐인 생활을 안 했다 뿐이지 공부하면서도 드라마는 여전히 내 옆에 있었다. 공부하는 모습을 보이면 다 될 줄 알았는데 아들은 모든 것을 보고 있었고 그걸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켰다.

"아들, 야동을 자꾸 보면 하고 싶어지고 그러다 보면 엄마가 지금 상담하는 친구처럼 죄를 짓게 될 수도 있어." 
"그 정도는 구분할 줄 안다구요. 하루 이틀도 아니구."
"뭣이라? 하루 이틀... 대체 언제부턴데, 엉?"

흥분하는 나를 뒤로 하고 아들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아들의 동의하에 안심서비스도 설치해 보았으나 아들은 '안심서비스 해결하는 방법'을 검색해 봄으로써 간단히 해결했다. 결국 아들이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결론으로 퇴근시간도 당기고 그냥 두라는 남편을 닦달해 컴퓨터가 있는 거실에 차례로 보초를 서기도 했다. 드라마라도 볼라치면 나와서 "엄마, 드라마 보세요?"하고 묻는 아들의 심중이 의심스러워 드라마도 제대로 못 본다.

오늘도 아들은 한 시간을 예상하고 느긋해 할 것이나 난 잰걸음으로 후다닥 삼십 분 안에 집에 갈 것이다. 예기치 않은 나의 등장에 얼른 컴퓨터 전원을 뽑아버릴 아들의 행동이 예상되어 웃음이 난다. 그렇게 난 아들과 전쟁 중이다. 


태그:#청소년, #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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