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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보강 : 12일 오전 10시 28분]

세월호 참사로 이 땅 전체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교회는 부활시기를 보내고 있다. 이 즈음 요한 복음서는 생명의 빵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6-27)

세월호 참사를 여기에 비추어 보니,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생명의 빵을 얻으려는 사람과 세상의 빵을 얻으려는 사람, 끊임없이 자기를 내놓는 사람과 끊임없이 자기 것만을 챙기는 사람, 사랑의 사람과 탐욕의 사람.

누군가가 말했었지, 인간의 두 가지 근원적 감정은 사랑과 두려움이며, 이 두 감정은 서로 배타적이라고. 그러니, 사랑이 있는 곳에는 두려움이 발붙일 자리가 없다.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에게서 아이들에 관한 한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 사랑과 두려움의 상호배타적 관계를 잘 보여준다.

탐욕의 자리에는 사랑의 여지가 없고, 그래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 평소엔 이런 모습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 정체절명의 순간이 오면, 우리의 실체는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의 모습을 꾸밀 가식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런 때가 있는 법이다.

거듭 물어야 한다... '나는 어떤가?'

이번 세월호 참사가 그랬다. 우리는 여기서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을 생생히 목격했다. 친구를, 제자를, 처음 보는 손님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내놓은 학생들, 선생님, 승무원. 위기와 공포의 순간 속에서도 자신이 아니라 이웃을 챙기는 사람들. 그 절박한 순간에 어떻게 자신이 아닌 옆 사람을 돌아볼 수 있었을까. 사랑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게다. 그런 행위가 어떻게 도덕적 판단, 당위만으로 가능하겠는가?

공감! 그렇다, 다른 이의 아픔, 고통, 슬픔을 헤아려 함께 느끼는 공감의 능력이 있을 때, 비로소 이 같은 사랑의 행위가 가능해진다. 길 가던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를 만나 반쯤 죽어 쓰려져 있는 사람, 필경 자신들을 경멸하고 배척해온 유대인이었을 그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공감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연민의 마음이 아니었던가? 공감은 사회에서 실현되어야 할 사랑의 모습,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이와는 아주 대조적인 행보를 보인 사람들도 있었다. 배를 책임진 사람들, 사람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는 고위 공무원들, 그리고 최고 권력자. 이들에게서 책임지는 모습은 찾을 수 없다, 오직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만을 보았을 뿐. 지상의 권력은 잔뜩 누리고 있지만, 두려움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다. 자기 것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곤경에 처한 이웃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이들은 사람이 공감 능력을 상실했을 때 어떻게 되는 분명하게 보여준다. 급박한 위기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객실에 남아 있던 많은 학생들과 일반 승객들을 내팽개치고 자기만 살려고 탈출한 선장과 선원들, 애끓는 유족들과 같은 공간에서 컵라면을 먹을 수 있었던 고위 공무원,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부모들 앞에서 사건 관련자 색출과 엄벌만을 강조하는 이 땅의 최고 권력자! 공감 능력의 부재가 아니고서는 도대체 이들을 이해할 도리가 없다. 아니, 공감 능력이 있었다면, 이들은 지금의 그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거듭 물어야 한다. 나는 어떤가? 나는 무엇으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 다른 이들을 위해 기꺼이 죽어간 어린 학생들, 선생님, 승무원의 물음이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공포 속에 죽어간 아이들의 물음이다. 그래서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물음이다.

우리의 응답은 중요하다. 제대로 응답한다면, 여전히 힘들겠지만, 우리는 그래도 다시 한 번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게다. 하지만, 외면한다면, 덮고 가려한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을 게다. 아무리 번드르르하게 치장한들,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

죽어간 또래의 아이들이 먼저 응답하는 걸 우린 이미 보았다, 학교에서도, 길거리 광장에서도. 우리 어른들에게 더 이상 가만히 있지 말라고 한다. 맞다. 저절로 무엇인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누군가 우리 대신 바로잡아 줄 것이라는 생각은, 단언컨대, 절대로 오산이다.

그래서, 잊지 말 것! 가만히 있지 말 것! 분노할 것! 행동할 것! 지속적으로, 제대로 된 근원적 변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어떻게? 악이 아닌, 가능한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 되뇌어서는 결코 아무런 변화도 이룰 수 없다. 유족들의 슬픔과 아픔에 깊이 공감하면서, 냉철하게 근본 원인들을 찾아 제거하고, 책임 있는 모든 이들의 책임을 물을 때까지, 끈질기게 이 사건을 잊지 말고 가지고 가야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회개이며 참회다.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삶을, 우리 아이들의 삶을 결정한다. 우리는 무엇을 택할 것인가? 세상의 빵, 탐욕과 죽음의 길인가? 생명의 빵, 사랑과 생명의 길인가?

때는, 찬란한 봄이다.
얘들아, 그래서 정말로 정말로 미안하구나.

덧붙이는 글 | 조현철님은 예수회 신부입니다. 이 글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도 송부하였습니다.



태그:#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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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예수회 신부로 서강대학교 교수로 일합니다.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과 녹색연합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함께, 조금 더 작게, 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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