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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건물 출입문에 붙어 있는 '잡상인 출입금지'
 어느 건물 출입문에 붙어 있는 '잡상인 출입금지'
ⓒ 송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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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이태리 영화가 있다. 2차대전을 배경으로 유대인인 주인공의 지극한 가족애를 그린 작품이다. 그 영화의 한 장면, 귀도와 조슈아 부자(父子)가 길을 걷다가 어느 가게 출입문에 '유대인과 개 출입금지'라고 적힌 문구를 발견한다. 세상 돌아가는 걸 제대로 이해할 리 없는 어린 조슈아가 그 뜻을 궁금해한다.

"싫어해서 그러는 거야. 싫다는데 어떡하겠어? 사실은 다른 가게에도 저런 게 붙어 있거든."
"우리 가게에는 저런 거 없잖아요?"
"그럼 우리도 붙이자. 죠수아, 넌 뭐가 제일 싫어?"
"음…, 거미요."
"그래? 난 고트족이 싫으니까 우리 가게는 이제부터 고트족과 거미는 출입금지야."

어린 아들의 순수한 영혼을 지켜주려는 아비의 마음이 애절하고 코믹하게 그려진다. 과거 영국의 어느 대학 앞에는 '아일랜드인과 개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인종차별이 특히 심했던 미국 남부에서도 '흑인과 애완동물 출입금지'라고 적어서 흑인들의 출입을 봉쇄한 고급 레스토랑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 관광객이 많이 찾는 홍대 근처 옷가게 여러 곳에서도 '일본인과 개 출입금지'라고 적은 팻말을 출입구에 내걸었다고 한다.

이런 '출입금지'들은 두말할 것 없이 유대인, 아일랜드인, 흑인, 일본인에 대한 반감이나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일 터이다. 심지어는 그들을 '개'와 동급으로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그걸 요즘 우리식으로 바꾸면 그림에 적힌 대로 '잡상인 출입금지'나 '잡상인과 개 출입금지' 같은 모양이 되겠다.

우리말에서 일부 명사 앞에 붙이는 '잡(雜)'은 '뒤섞이거나 자질구레하다'는 뜻으로 쓰여 잡것, 잡귀신, 잡생각, 잡소리, 잡소문, 잡탕 같은 말을 만들어낸다. 개(犬)의 품격을 구분하는 데도 이 '잡'은 대단히 유용하고 효과적이다. '순종'과 '잡종'이 그것이다. 같은 개라도 순종은 모시고 살고, 잡종은 대충 먹여서 키우다 잡는다. 복날이 되면 패서 '잡'으니까 '잡'종인가?

전라도 민요 <새타령>의 첫머리에는 또 '잡새'가 등장한다. 그 노래는 이렇게 시작된다. '새가 날아든다 온갖 잡새가 날아든다 새중에는 봉황새 만수 문전에 풍년새…' 노래 속에서 '잡새'는 '봉황새'와 정반대로 취급된다. 이 '잡새'는 지난 시절 대학 캠퍼스를 무시로 들락거렸던 '짭새'의 어원일 것이다. 어쨌든 봉황새 아니면 다 잡새다. 지금 세상이 그렇다. 상인한테까지 '잡'을 붙여서 함부로 쓰고 부르니 하는 말이다.

'잡상인'은 누구인가. 사전에 적힌 대로 '일정한 가게가 없이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팔고 다니는 상인'인가. 그런 것만도 아닌 듯하다. 실제로는 크게 다른 뜻으로 쓰인다. 꼭 '자질구레한 물건'이 아니라도 정식 허가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장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거리의 인도나 지하도 한쪽에 좌판을 벌이는 노점상, 밭에서 손수 수확한 과일이나 채소를 작은 트럭에 싣고 아파트 단지를 찾아다니는 농부, 생활용품이 담긴 크고 무거운 가방을 매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지하철을 누비는 청년, 밤늦은 시각까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선술집을 순회하면서 떡을 파는 할머니들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잡상인이다. 

잡상인을 단속하고 출입을 금지시키는 논리는 간단하다. 장사를 해서 돈을 벌면서도 국가에 세금을 내지 않음으로써 상거래 질서를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도시 미관을 마구 해치거나 시민들에게 번거로움을 끼쳐서 OECD 국가의 체면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선량한 시민들을 온갖 공해에 노출시키는 '주범'들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과연 그들은 '자질구레한 물건'이나 팔고 다니는 '잡스러운' 상인들인가. 번거롭게 마트까지 가지 않고도 값싸고 질 좋은 과일을 사먹을 수 있는 서민들에게 그들은 얼마나 요긴한 존재인가. 남 등쳐먹지 않고 정직하게 땀흘려가며 생계를 유지하고, 미래의 꿈을 키워가는 수많은 잡상인들에게 '雜'은 또 얼마나 소중한 'job'이겠는가.  

'잡상인'이라는 말이야말로 소위 '갑질'의 하나다. 허가를 받은 상인이나, 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단속에 열을 올리는 관청이 '갑'이라면 모든 잡상인은 '을'이다. 그렇다면 허가 낸 '순(純)상인'은 모두 '갑'인가. 세금을 안 내는 '잡상인'만 '을'인가.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프렌차이즈 제과점 사장 눈에는 동네 빵집 주인이 잡상인으로 보일 것이다. 동네 빵집 주인들은 또 길거리에서 붕어빵이나 호떡을 만들어 파는 이들이야말로 진짜 잡상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고등학교 교육현장에서도 국영수 등 수능시험에 직접 도움이 되는 과목이 아니면 모조리 싸잡아서 '잡과목(雜科目)'이라고 부른단다.

'잡(雜)'은 '막돼먹은' 사람이나 대상을 일컬을 때도 쓰인다. '잡놈'과 '잡념' 같은 말이 그런 예에 해당된다. 물론 '잡년'도 있다. 이런 뜻으로 보면 '잡상인'을 허가를 받지 않은 상인으로만 한정시켜도 되는지 의문이다. '상생'이니 '상도의'니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옛말 그대로 '허가 낸 도둑들'이들이야말로 진짜 잡상인인 것이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재벌기업이 대표적이다. 온갖 허위과장 광고로 애들 코 묻은 돈까지 털어가는 기업주들, 턱없이 비싼 수술비를 할인을 미끼로 세금에 안 잡히는 현금으로만 받아 챙기고도 부작용은 책임질 줄 모르는 철면피 성형외과 의사들도 단속의 손길이 가장 먼저 가야 하는 '진짜 잡상인'일 것이다.

지금 온 나라를 비탄과 분노에 빠뜨린 후안무치한 선장과 선원들, 추악한 커넥션으로 얽혀 있는 해운사 대표와 관련자들, 이 판국에 아무 거리낌없이 관광성 외유를 떠나는 일부 공무원들, '표' 말고는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정치인들…. 그런 이들은 '잡상人' 축에도 못 낀다. '잡상인과 개 출입금지'라는 말조차 그들한테는 사치 아닐까 싶다.


태그:#잡상인, #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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