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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많은 집은 자식이 귀하고

아들 많은 집엔 굶주림이 있으며,

높은 벼슬아치는 꼭 멍청하고

재주 있는 인재는 재주 펼 길 없다.

완전한 복을 갖춘 집 드물고,

지극한 도는 늘 쇠퇴하기 마련이며,

아비가 절약하면 아들은 방탕하고,

아내가 지혜로우면 남편은 바보이다.

보름달 뜨면 구름 자주 끼고

꽃이 활짝 피면 바람이 불어대지.

세상일이란 모두 이런 거야.

나 홀로 웃는 까닭 아는 이 없을걸.

 

정약용이 지은 독소(獨笑·홀로 웃다)라는 시이다. 이렇게 인간사 누구나 한 가지씩 걱정거리를 안고 사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우리가 오늘 살펴볼 쇼펜하우어도 우리 인생을 고통이라는 쌀 한 가마니를 안고 산다고 본 철학자이다.

 

잔잔한 호수의 나룻배에는 쌀 한 가마니를 얹어주어야 나룻배가 남실거리지 않고 잘 안착한다. 우리네 인생도 이에 비유할 수 있다. 누구나 쌀 한 가마니의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삶이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

"삶이란 욕망으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쇼펜하우어가 싫어하는 것 세 가지가 있는데 그중 1순위가 헤겔이다. 그는 헤겔을 거짓말쟁이라고 불렀다. 심지어 자기가 키우는 개의 이름을 헤겔이라고 불렀다.

 

쇼펜하우어와 헤겔은 같은 베를린 대학 철학과 교수였다. 헤겔은 전 유럽에 명성을 떨치는 노 교수라면, 쇼펜하우어는 이제 갓 들어온 새내기 교수였다. 쇼펜하우어가 교수가 되기 전 강의 평가를 받을 때 헤겔이 심사 위원이었다. 이때부터 둘 간의 논쟁은 시작되었다.

 

우리네 인생이 어찌 정답을 제시한 대로 살아지는가? 우리에게 장밋빛 미래가 있다고 선전하지 마라. 쇼펜하우어의 반박이다. 산이 높이면 골이 깊다는 말처럼 이제 서양의 철학사는 이성 중심에서 반이성으로 넘어가는 출발 선상에 서게 된다.

 

그 선두주자가 쇼펜하우어이다. 이성으로 우리의 인생을 도식화할 수는 없는 법, 누구나 각자의 인생을 산다. 각자 나름대로 고통을 안고 사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그러한 인생을 직시해야 한다. 뜬구름 잡는 식의 인생론은 의미가 없다. 교수가 된 쇼펜하우어는 헤겔의 거짓말에 속고 있는 대중들을 구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교수가 된 쇼펜하우어는 강의 시간표도 헤겔이랑 똑같이 편성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게 된다. 수강신청을 하는 학생이 없어서 쇼펜하우어 강의는 폐강되었다. 반면에 헤겔의 강의는 인산인해, 복도까지 서서 듣는 학생도 많았다. '이건 아닌데!' 쇼펜하우어는 대중들이 우리의 현실을 외면하고 헤겔이 말하는 장밋빛 환상만을 좇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교수직을 내팽개치고 여행이나 저술활동에만 전념하며 지냈다.

 

쇼펜하우어는 출생부터 순조롭지 않은 인생길의 출발이었다. 쇼펜하우어의 엄마와 아버지는 17살의 나이 차이가 난다. 아버지는 38살 엄마는 21살 때 결혼하여 쇼펜하우어를 낳았다. 아버지는 상인이고 엄마는 낭만파 여류시인이었다. 아마도 이 부부는 가정불화가 잦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쇼펜하우어는 어렸을 적부터 철학적인 생각들을 많이 한 아이였다. 엄마는 이런 쇼펜하우어가 싫었다. 인생은 즐기면서 사는 것인데, 삶이란 무엇인가 하고 고민 속에 사는 어린 쇼펜하우어가 탐탁지 않았다.

 

한편, 쇼펜하우어 아버지는 그를 자기의 가업을 이을 상인으로 키우고 싶어 실업계 고등학교로 보내 회계 공부를 시키려고 하였다. 쇼펜하우어가 철학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걸 눈치챈 아버지는 유럽여행을 시켜줄 테니 실업계로 가라고 하였다. 유럽여행 후 쇼펜하우어는 실업계로 진학하여 아버지의 뜻대로 회계사 사무실에 나가며 상업 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여행 후 쇼펜하우어는 더욱더 철학적인 문제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왜 사는가?

 

그러던 중 아버지가 자살하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쇼펜하우어는 어머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자살 이유가 평소 어머니가 아버지를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쇼펜하우어의 어머니는 아버지 자살 후 유산을 모두 챙겨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 버렸다. 혼자 남겨진 쇼펜하우어. 공부를 해야겠기에 어머니에게 돈을 요구했으나 들어주지 않자 쇼펜하우어는 유산 상속 소송을 내 삼 분의 일의 유산을 돌려받았다. 이 돈으로 쇼펜하우어는 원하던 철학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살아있는 동안 우리 서로 보지 맙시다."

 

1813년 예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어머니에게 보여드리자 그녀가 하는 말 '이건 박사학위 논문이 아니라 쓰레기군!' 그날 둘이는 엄청나게 논쟁을 벌였고 이제는 영영 남남이 되었다.

 

쇼펜하우어가 두 번째로 싫어한 것은 여자였다. 아마도 어머니의 영향이 크지 않았나 생각된다. 헤겔, 여자, 소음 쇼펜하우어가 싫어한 것 세 가지이다. 이 세 가지는 서로 연관된다. 쇼펜하우어에 있어 헤겔의 강의는 소음이었다. 물론 여자들의 소음도 무척이나 싫어했다.

 

한번은 조용히 산책하는데 여자들의 소음이 왁자지껄 들렸다. 조용히 해 달라고 부탁하는 쇼펜하우어. 그러나 여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떠들어댄다. 한 번 더 부탁. 그래도 떠드는 여자들. 결국, 대판 싸움이 벌어졌고 화가 난 쇼펜하우어는 한 여자를 들어 매쳤다. 그 여인이 쇼펜하우어에게 혹 같은 여자 마르케이다. 고소를 당한 쇼펜하우어. 법원은 평생 그녀에게 연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훗날 마르케가 죽자 쇼펜하우어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늙은 년이 갔다!"

 

쇼펜하우어에 있어 우리의 생(生)은 맹목적인 삶의 의지 때문에 고통이다. 그래서 이 의지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예술을 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종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예술은 음악을 해야 하고, 종교는 불교의 금욕을 실천해야 한다고 하였다. 최악의 생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음악을 통해 삶을 관조하면서 망각의 길로 가야 하고, 불교에서 강조하는 금욕적 생활로 우리의 욕구를 끊어버리고 없애버려야(斷滅) 한다고 하였다.

 

젊은 날 방황하던 니체는 어느 날 우연히 헌책방에 들렀다가 쇼펜하우어의 책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집어 들고는 경기(驚氣)를 일으켰다. 당장 집으로 사 들고 와 이틀 밤을 새우면서 읽고 또 읽었다. 신학 공부를 하기 싫어했던 니체 앞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시한 것이 쇼펜하우어의 책이다. 이렇게 쇼펜하우어의 생철학은 니체를 거쳐 현대 실존주의 철학으로 이어진다.

 

"세계란 결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구조로 되어 있지 않으며,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의지일 뿐이다."


태그:#김재훈, #인문학 교실, #철학칼럼, #쇼펜하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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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대한민국 교사로 산다는 것'의 저자 김재훈입니다. 선생님 노릇하기 녹록하지 않은 요즘 우리들에게 힘이 되는 메세지를 찾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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