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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정현종

그 섬에 가고 싶은 외로운 이들은 이제 썸을 타고 싶다. 봄바람 건듯 불어 꽃내음 풍겨오고 흩날리는 벚잎처럼 살랑거리는 마음 주체할 길이 없을 때, 왠지 연애보다는 썸 생각이 간절하다.

썸씽(something). 연인이 아닌 남녀 사이에 뭔가가 있다는 의미에서 시작한 이 단어가 유행처럼 번졌다. 서로 좋아하는 마음은 있지만, 아직 연인은 아닌 뭔가 애매한 관계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서로 썸만 타다 속마음도 표현 못하고 엄한데 시집 장가갔지만, 개성 넘치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청춘들은 자발적으로 썸을 즐긴다.

모바일과 SNS로 대변되는 신인류의 새로운 사랑 방정식인지 모르겠지만, 그 안에 숨겨진 썸의 기회주의적 본능을 알아차리는 이는 거의 없다.

연인이 되기 전에 겪는 오묘한 긴장관계는 이전까지 연애의 한 부분으로 간주됐으나, 썸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고부터 이러한 관계는 연애나 사랑과는 다른 하나의 독립적인 관계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애매하고 불분명한 관계가 구체화되고 많은 이들이 이에 공감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한나 아렌트가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분석한 바에 의하면 사랑은 일종의 갈망이다. 불멸의 것을 갈망하지 않는 한, 언젠가 사라져 버릴 것을 소유한 대가로 얻어지는 것은 상실의 두려움뿐이다.

필멸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질적 딜레마다. 대상에 대한 갈망과 상실의 두려움이라는 관점으로 파악한 사랑 개념을 현실에 대입하면 썸의 동기가 비교적 분명해진다. 소유의 안정성을 담보할 수 없는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상실의 두려움을 회피하려면 소유하는 사랑 대신 소비하는 사랑을 선택하면 된다. 썸이란 삼포세대라 자조하는 우리 시대가 선택한 사랑의 대체제인 셈이다.

사랑의 대체수단으로서 썸은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썸은 설렘의 쾌락을 충족시키면서도 상대에 대한 책임이나 의무는 없다. 사귀지는 않았으니 이별할 일도 없고 이별의 아픔을 겪을 일도 없다. 썸을 타다 질리면 다른 사람으로 갈아 탈 수도 있다.

'자니?'라는 메시지로 시작되는 서로 다른 이성들과의 동시다발적 채팅은 짜릿하면서도 스릴 넘친다. 원하면 바로 충족시킬 수 있는 인스턴트 식이다. 예측할 수 없고 불확실한 사회변화와 함께 찾아온 것은 책임을 회피하고 쾌락만을 누리는 가벼운 사랑의 몸놀림이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주인공 토마스처럼 우리 시대도 점차 관계의 가벼움에 몰두하고 있다.

썸을 강제하는 사회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이러한 관계의 확산과 유행에 기여하는 숨은 공로자를 간과할 순 없다. 주목해야 할 것은 미디어와 문화 자본이 재생산해 내는 썸의 상품화다. 그들은 인터넷과 SNS를 중심으로 유행하던 새로운 관계의 양상을 예쁘게 포장해 하나의 문화 상품으로 시장에 내놓았다.

TV에는 이게 썸이 맞냐며 그린라이트를 켜달라는 오락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고 서점에는 남녀의 심리를 분석하는 연애심리 서적과 연애 스킬을 전수하는 책이 불티나게 팔린다.

앱스토어에는 즉석만남을 주선하는 앱들이 넘쳐나고, 심지어 남녀 간에 주고받은 메시지의 패턴을 분석해서 서로 호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수치로 나타내 주는 앱도 등장했다. 사람의 감정이 측량하고 분석할 수 있는 객체로 환원된 것이다.

객체화된 감정은 인간과 점차 분리되어 이제 하나의 상품으로써 소비되고 유통될 수 있게 됐다. 문화 자본과 기회주의적 본능을 탑재한 썸이 결합하여 피상적이며 소비적인 관계를 더욱 부추기는 양상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진심보다 스킬이 더 중요시 되고 관계의 효율성을 따지면서 그 사람을 만날지 말지를 결정한다. 픽업 아티스트, 조건만남 같은 것들이 상품화된 썸의 부산물인 것이다. 설렘과 두근거림으로 포장된 썸의 가식을 벗겨 보면 물질과 쾌락의 욕망으로 가득 찬 썸의 본능에 마주하게 된다.

자본주의와 결합한 썸이 내세우는 효율성과 합리성의 논리 안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갇혀버렸다. 상실의 두려움과 사랑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선택한 썸 때문에 이제는 오히려 관계의 본질을 상실할 위기에 처하게 됐다.

썸을 탈수록 사랑을 향한 갈증에 더욱 목이 타는 이유는 그것이 결국 감정을 채우지 못하고 소모만 시키는 피상적 관계의 결정판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좌절과 상실의 두려움에 직면할수록 우리에게 필요한건 썸이 아니라 내밀한 관계의 진정성으로 마음의 안식이 되어줄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태그:#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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