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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과 새 숲은 늘 그 자리에 서있고, 새는 언제나 자유롭게 오간다. |
ⓒ 김민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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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난다.
나무는 한번 뿌리를 내리면 평생 그곳에서 살지만, 새는 비상하는 순간부터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나 한 곳에 살아도, 머물지 않아도 자유로운 영혼들이다.
한 곳에 산들 인생사는 얼마나 짧은가?
짧은 삶이라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건만, 그 짧은 삶을 얼마나 부조리한 것들에 옭매여 살아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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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동문 봄이 오는 남한산성, 이제 벚꽃과 연록의 빛이 산을 채색하기 시작했다. |
ⓒ 김민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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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동문에 섰다.
1936년 병자년 겨울, 청의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 한양 도성으로 처들어오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한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은 1636년 12월 14일부터 이듬해 1월 30일까지 47일의 과정을 소설로 덤덤하게 풀어낸다.
혹독한 겨울에 남한산성으로 들어와 꽃이 피는 봄이 되기 전에 청의 대군에게 무릎을 꿇었으니, 저 봄도 맞이하지 못했겠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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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동문 연록의 빛과 벚꽃과 변하지 않는 성벽의 색감이 조화롭다. |
ⓒ 김민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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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나 하남시 쪽으로 이어진 동문, 한강과는 반대편이었으니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갇힌 이들에게는 이런저런 통로가 되어주었을 터이다.
중학교시절, 천호동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남한산성 입구에서 내리면 동문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 수어장대까지 올라갔다. 점심을 먹고 하산하는 길에는 거여마천동 쪽으로 하산하여 집으로 가는 긴 여정이었다. 3년 내내 같은 장소로 소풍을 갔었기에 남한산성의 지리를 잘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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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동문 인걸은 간데없지만, 그들은 남아 산천을 지켜보고 있다. |
ⓒ 김민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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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말, 고등학교 시절 자전거를 타고 남한산성에 오르면 동문 근처의 계곡에서 더위를 식히곤 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많지않고, 계곡도 수량이 풍부해서 수영도 할 수 있었다.
대학시절에도 남한산성은 하이킹 코스였다.
북문으로 이러진 도로를 따라 성남쪽으로 남한산성을 내려오는 길은 가파르지만 자전거 브레이크만 이상이 없으면 10여 분이면 힘들이지 않고 내려올 수 있는 코스였다. 함께 출발했던 친구의 자전거 브레이크가 파열되어 한 시간 넘게 걸어오기도 했었지만, 그렇게 남한산성은 나와의 관계를 맺어오고 있다.
어쩌면 나와 관계가 있다는 것도 내 이기적인 생각일지 모르겠다. 산은 늘 그 자리에 있었고, 늘 그렇게 사시사철 미세하게 변해가면서 나뿐 아니라 그곳을 찾는 이들과 그들을 찾지 않았던 이들이라도 관계를 맺고 살아온 것이다.
단지, 나 스스로 거리를 두거나 혹은 거리를 좁힌 것 뿐이다.
봄이 오는 산.
저 봄을 맞이하기도 전에, 엄동설한에 성에 갇혀있다가 항복을 하고 말았단 말인가?
만일 저 봄을 맞이할 수만 있었더라면 전쟁의 양상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달라졌다면, 그것이 민초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이런저런 병자호란에 대한 생각들을 하다 제 나라도 지키지 못했던 무능했던 인조, 그를 더받들던 가신들과 그 다툼들 속에서 민초들만 고난 속에 내팽개쳐진 것은 아닌가 싶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 같은 현실이지만, 저 산에 봄이 오고 있지 않은가?
봄이 오고 있다는 것, 그것이 위안이다.
이번 봄은 워낙 빠르게 오고 가는 중이라서 그런지 가늠이 되질 않는다. 지난 주 까지만해도 텅 빈 숲이었는데, 이제 연록의 이파리들이 제법 무성한 나무도 있고, 산마다 수채화 물감이 연하게 퍼져가는 듯 계절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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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의 숲 아직은 빈 공간이 더 많지만 곧 빽빽하게 숲은 가득찰 것이다. |
ⓒ 김민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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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직은 빈 곳이 더 많다.
채울 여지가 더 많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오로지 채우려고만 하면 더는 채울 수 없고, 비울 때에만 채울 수 있다는 것을 봄의 숲은 보여준다. 지난 가을과 겨울, 다 비웠기에 이렇게 채워져 가는 중이며, 이 과정은 이렇게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벚꽃이 꽃비가 되어 내려 꽃눈처럼 쌓였다.
이제 막 지나간 계절인 겨울을 그리워하며 다시한번 소복하게 세상을 덮어보려는 듯한 꽃들의 몸부림이다.
그 몸부림이 안타깝지만도 않은 것은, 그렇게 꽃잎을 놓아야 또 풍성한 삶을 살아갈 터이기 때문이다.
봄이 오는 남한산성, 그곳에서 봄을 본다.
그리고 그 곳에 서려있는 우리네 역사를 돌아본다. 그 이듬해, 이 흐드러진 봄을 보지 못했던 역사의 아픔이 서럽다. 그래도 봄은 어김없이 왔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