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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수도 외곽 마을 풍경
 에티오피아 수도 외곽 마을 풍경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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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를 꼭 장학생으로 선발해 주셔야 해요. 사실 제가 얼마 못 살고 죽기 때문입니다."

에티오피아에서 만난 어느 여인. 웃음을 잃은 지 오래된 사람 같았다. 검은 얼굴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 좌절감이란 표현이 무색하리 만치 세상을 다 포기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곳이 과연 사람이 사는 곳일까 싶을 정도의 환경. 쓰러져 가는 흙벽 속 집안은 오랫동안 청소를 못한 듯했다.

"무슨 불치병이라도 걸린 걸까요? 좀 물어봐 주실래요?"

맨 땅에 놓인 소파엔 누덕누덕 때가 묻었다. 참기 힘든 악취. 형식적인 질문만 하고 어떻게든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에 핵심만 물었다. 암하릭어 통역을 맡은 에티오피아 거주 한국인 하옥선씨에게 병명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밖에 나가서 이야기를 하잔다.

"저 아주머님이 에이즈에 걸렸는데, 병원에서 얼마 살지 못한다는 사망선고를 받은 모양 이에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살아야 할 방편을 만들어 줘야겠다는 생각에 장학금 신청을 한 모양입니다."

1년 전 그 아주머니는 에이즈 판정을 받았단다. 남편은 집을 나간 지 오래란다. 아주머니 혼자 구걸도 하고 막노동도 하면서 근근히 아이를 키워 왔다고 하옥선씨는 덧붙였다.

화천군이 에티오피아 장학 사업을 벌이는 이유

한국전 참전용사의 어느 가정. 이 아이들이 자라 휼륭한 일꾼이 되길 기원했다.
 한국전 참전용사의 어느 가정. 이 아이들이 자라 휼륭한 일꾼이 되길 기원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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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일. 이무영 화천부군수를 단장으로 윤선희 담당, 최인한 주무관으로 팀을 꾸린 우리 일행은 에티오피아로 떠났다. 한국전쟁 당시 참전했던 후손들에 대한 장학금 지급대상자 선정을 위해서다.

화천군은 지난 2009년부터 지금까지 한국전 참전 용사 후손 132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이들은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다양하다. 지원 동기는 2009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9년 5월 26일 강원도 화천군 동촌리 평화의 댐 인근에 위치한 커다란 종 앞에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을 비롯해 노벨평화상 수상자 등 수많은 평화 애호가들이 모였다. 37.5톤 규모의 '평화의 종' 준공식 참석을 위해서였다. 이 자리에 모인 수많은 사람 중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 있었다. 에티오피아에서 왔다고 자신을 소개한 한국전 참전 에티오피아 용사들. 백발이 성성한 그들은 마치 고향에라도 온 듯 흥에 겨운 이야기를 나누다 때로는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한국전에 참전했다는 이유로 우리들은 에티오피아 수도인 아디스아바바 변두리 지역으로 쫓겨나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참전용사 회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확인이 필요했다. 같은 해 정갑철 화천군수는 그들의 생활상을 확인했다. 그들은 말대로, 힘들게 살고 있었다. 이후 정 군수는 이들에게 장학금을 줄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화천군의 계획이 알려지자 인근의 7사단, 27사단, 15사단에서도 동참을 희망했다. 이들 부대에서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을 부대별로 매달 100만 원씩 기부한다. 순수 민간인들의 참여도 이어졌다. 시민 20명 연간 560만 원을 보내온다. 군부대, 민간인, 화천군이 한국전 참전 에티오피아 장병 후손들에게 보내는 연간 장학금 액수는 5000여만 원에 이른다.

주 에티오피아 한국대사관에선 장학사업도 돕는다

오태일 하옥선 부부가 주 에티오피아 한국대사 사공효식 영사로 부터 장학금을 전달 받아 확인하고 있다.
 오태일 하옥선 부부가 주 에티오피아 한국대사 사공효식 영사로 부터 장학금을 전달 받아 확인하고 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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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에티오피아 정부를 통해 장학금을 전달하는 것으로 기획됐다. 그러나 에티오피아 정부에서 세금공제, 갈취 등 실제로 수혜자들에게 전달되는 금액은 절반도 안 될 거라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주 에티오피아 한국대사관'(이하 대사관)에 협조를 구하기로 했다.

일반 서민들의 계좌가 없는 나라 에티오피아에서는 개별 계좌가 있어도 외국으로부터의 달러 지원은 철저히 통제된다. 결국 전달 방법은 두 가지다. 직접 현지에 가서 전달하거나 대사관을 통하거나. 담당자가 매달 장학금 지급을 위해 에티오피아 출장을 간다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대사관 또한 어느 지자체에서 보내온 장학금을 인출해 대상자를 불러 전달하기 어렵다. 고유 업무에 비해 인력이 부족한 게 현지 대사관 실정이란다.

에티오피아 어느 가정의 주방. 15식구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쌀 때문에 죽을 만들어야 했단다. 반찬은 없다. 소금으로 족하다.
 에티오피아 어느 가정의 주방. 15식구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쌀 때문에 죽을 만들어야 했단다. 반찬은 없다. 소금으로 족하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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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적인 송금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사관으로 보내 주시면, 출금해서 보관은 우리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사관 관계자의 배려로 해법을 찾았다. 이제 화천군에서 보낸 장학금을 대사관에게 건네받아 대상자에게 개별적으로 전달해 줄 사람만 찾으면 된다. 그때 자발적으로 나선 사람이 오태일, 하옥선 부부다. 10여 년 넘게 에티오피아에서 물리치료사 일을 해온 이들 부부는 그곳 정보에 해박하다.

따라서 현재 화천군의 에티오피아 장학금 지급 시스템은 이렇다. 화천군은 매월 군부대를 비롯한 일반 후원자들이 보내온 금액과 군 예산을 합친 400여만 원을 달러로 환산해 대사관으로 송금한다. 이 금액을 대사관 직원이 에티오피아 화폐인 비르(1비르는 한화 60원)로 인출해 하옥선씨에게 전달한다. 하씨는 전달 받은 금액을 분류(초등학생 개인당 450비르, 중고생은 600비르, 대학생은 750비르)해 개별적으로 지급한다.

화천군에서는 매년 현지 출장을 통해 신규 장학생을 선발한다. 졸업생만큼 신규 학생들을 선발하는 절차다. 또 성적이 낮은 학생들에 대한 역인센티브(100비르 삭감) 및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에겐 인센티브(100비르 상향조정) 부여 또한 중요한 일 중 하나다. 선의의 경쟁 유도를 위해서다.

눈물나는 '인생 유전'

에이즈 보균자 아이릉 남기고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 이를 불쌍해 여긴 이웃에서 아이를 돌본다.
 에이즈 보균자 아이릉 남기고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 이를 불쌍해 여긴 이웃에서 아이를 돌본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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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에 도착한 다음날인 4월 2일. 우리 일행은 신규로 신청 가구에 대한 실태조사에 나섰다. 하옥선씨가 참전용사회에게 넘겨받은 대상자들이다. 이들이 참전용사 후손인지에 대한 확인은 정부에서 지급한 수첩이나 한국전 사진 등 증빙이 될 만한 자료 확인으로 이루어진다. 가정환경 또한 장학금 지급의 판단기준으로 삼는다. 예정인원보다 신청자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다 쓰러져 가는 집. 쇠똥을 바른 벽체는 구멍이 숭숭나 있다. 문이라고 걸쳐 놓은 천을 들추고 들어가자 맨땅에 놓인 소파에 앉은 한 아주머니가 퀭한 눈으로 우리 일행을 맞았다. 그는 묻는 말에만 대답했다. 무덤덤했다. 장학금 지급 대상인 두 아이는 학교에 있다고 했다.

"사실 난 이 아이의 부모가 아닙니다. 윗집에 사는데 아이의 엄마가 없어 돌보고 있어요."

태어난 지 이제 겨우 1년 남짓 된 한 살배기 아이. 툭 건드리면 우는 게 정상이다. 환경 탓일까. 아이는 뉘여 놓으면 누운 자세로, 안고 있으면 안긴 자세로 불편하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이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고 했다. 에이즈에 걸렸던 엄마, 아이를 낳기 곤란한 상황이었단다. 낙태를 위한 비싼 병원비를 낼 형편이 되지 않았다. 엄마는 결국 아이를 낳다 죽었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이 어린 아이는 에이즈 보균자로 태어났다. 설명을 듣는 내내 자꾸 눈물이 났다.

한국전 참전용사 어느 가정. 이 정도면 그래도 잘 사는 편이다.
 한국전 참전용사 어느 가정. 이 정도면 그래도 잘 사는 편이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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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0여 가구 이상 방문했는데, 아주 잘 사는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빈민층이었다. 조사 가정 환경은 거의 비슷했다. 집에 아무도 없어 가족 누군가 구두닦이를 한다는 곳으로 찾아 가기도 했다. 또 어떤 아이의 안내를 받아 찾아간 곳엔 아에 집이 없기도 했다.

"집도 없는데, 왜 우릴 여기에 안내했니?"라는 물음에 꼬마 아이는 지난해 집이 폭우로 떠내려갔다고 했다. 잠은 어디서 자느냐고 묻자, 한참 동안 우리 일행을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도로변에 불안하게 만들어 놓은 철재 박스. 이곳에서 잠을 자고, 학교에 다니며 구걸해서 살고 있단다. 참전용사의 후손인지 확인할 그 어떤 것도 없다. 그저 참전용사회장님의 추천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 에티오피아 두 번째 이야기는 '시체와 함께 사는 할머니'편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신광태 기자는 강원도 화천군청 기획담당입니다.



태그:#아디스아바바, #에티오피아, #화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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