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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핑을 마치는 사람들과 일몰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꾸따 해변.
▲ 일몰 전의 해변 서핑을 마치는 사람들과 일몰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꾸따 해변.
ⓒ 박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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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그랬다. 환각적인 꾸따(kuta) 해변의 햇빛은 발리 섬 남쪽인 그곳을 어떤 곳과도 비교하기 어렵도록 특유의 정취를 만들어낸다. 서퍼들은 바다와 호흡하듯 보드 하나에 몸을 실어 리듬을 만들어 내고 상인들은 나른하지만 생기를 잃지 않는 오전이었다.

일주일 후면 떠날 예정이기에 수중에 얼마 남지 않은 달러를 환전해야 했다. 일주일 동안 있을 생활비도 빠듯해서 좋은 거래를 해야 할 상황. 다행히 공항과 가까운 이 해변엔 365일 전세계의 여행자들로 활기를 띠는 곳이라 환전소뿐 아니라 상점에서 환전을 해주는 곳도 많았다.

늦은 아침을 먹고 골목골목을 산책했다. 환전소들이 눈에 보이고 달러를 환전해준다는 표시로 옷 가게, 기념품 가게, 오토바이 대여소 등의 상점까지 오늘의 환율을 표시해놨다.

"괜찮은데?"라며 들렀던 가게

가게 앞에 진열된 오늘의 환율과 버스 가격
▲ 오늘의 시세 가게 앞에 진열된 오늘의 환율과 버스 가격
ⓒ 박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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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꽤 괜찮은데!'

내 눈을 확 끄는 숫자들! '환전을 하려면 안으로 들어오라'는 문구와 함께 다른 곳보다 꽤 높은 환율이 보란 듯이 적혀 있었다. 별 생각 없이 들어갔던 것은, 여행에 대한 나의 자만심 탓으로 돌려야 할까? 가게 안에 들어가니 데스크 너머의 남자직원이 서 있고 인사를 하자, 얼마를 환전하려고 하느냐 물었다.

"밖에 적혀 있는 환율 봤는데 오늘의 환율이지?"

아직 앳된 얼굴의 남자직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가 말한 금액을 세기 위해 익숙한 폼으로 서랍을 열었다.

"하나, 둘, 셋, 넷… 열."

열 장의 지폐를 세어 차곡차곡 책상에 늘어놓는다.
눈으로 보기에도 열 장이 한 묶음인 지폐가 열 개니 십만 루피아다. 저기에 나머지 금액만 더하면 환전할 수 있는 금액인 것이다. 그가 돈을 세어 올리는 즉시 나 또한 재확인을 했다. 모든 돈을 다 세서 올리더니 그가 말했다.

"다 세어 봤어? 됐지?" 

인도네시아의 다른 지역들과 달리, 힌두 문화인 발리 섬.
▲ 힌두 사원 인도네시아의 다른 지역들과 달리, 힌두 문화인 발리 섬.
ⓒ 박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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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돈을 모두 끌어 모으더니 합쳐서 잘 정리한 후, 나에게 건넨다. 루피아를 받아 든 후, 그에게 달러를 건네고 거래를 마쳤다.

환전 이후, 식당에서 늦은 점심으로 2000원짜리 볶음밥을 먹었으며 골목을 산책한 후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숙소에서 숙박비를 지불해야 했고 남은 일정 또한 예산과 맞춰서 돈 계산이 필요했다. 그런데 어쩐지 지갑을 꺼내는 순간 그다지 두둑하지 않은 지갑이 느껴졌다. 지갑 안의 돈을 모두 꺼내서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지갑에는 환전 금액의 60%밖에 없다.

'설마…. 설마….'

"요새 그런 사기는 없어진 줄 알았는데..."

해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가족
▲ 가족 해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가족
ⓒ 박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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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지갑 안에 쑤셔 넣었다고 해도 가방 어딘가엔 있겠지 싶어 가방을 탈탈 털어 돈을 찾았다. 역시 돈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히 생각했다. 환전이 잘못됐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기에는 나의 동선이 너무나 짧고 간단했다. 식당 안에서 밥값을 지불할 때도 정확히 기억나고…, 그렇다면? 그렇다면? 바로 방을 나가 숙소 사무실로 갔다.

"혹시 이곳에 묵었던, 아니 묵지 않았어도 사람들에게 들은 얘기로, 여행자들이 환전하면서 사기 당했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어?"

"그게 무슨 말이야? 어떤 사기를 말하는 건데?"

사무실 근처에 하릴없이 앉아있던 몇몇도 무슨 일인가 싶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들은 숙소의 직원 왈.

"환전 사기네. 예전엔 그런 일이 자주 있었어. 아니, 근데 아직까지 그런단 말이야? 돈을 환전해주면서 눈속임으로 돈을 아래로 빼고 나머지만 건네는 수법이지. 원래 그렇게 가게에서 환전해주는 건 불법이기도 하고 그런 문제가 하도 많이 일어나서 경찰에서 단속을 많이 했거든. 요즘은 없어진 줄 알았는데."

진열되어 있는 오토바이가 아닌, 주차되어 있는 오토바이들.
▲ 오토바이 진열되어 있는 오토바이가 아닌, 주차되어 있는 오토바이들.
ⓒ 박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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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격앙됐다. 사기를 친 그를 향한 분노라기 보다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너무 순진하게 당한 내 자신이 한심스러워서였다.

'다른 곳보다 높은 환율을 쳐줄 땐 암거래를 하는 것이니 의심을 했어야 했는데…. 이제 어떻게 하지?'

숙소를 나온 후 곧장 그 가게로 갔다. 몰론 이번에도 혼자서. 일단 사기 당한 그 돈이 내겐 절박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렇게 눈 뜨고 코 베인 내 자신에게 화가 나서 바로잡아야 마음이 좀 진정될 것 같아서였다.

그래도 다시 한 번... 그대는 발리니즈

현란한 메이크업에 뒤지지 않는 전통 춤과, 연기력으로 인상깊었던 발리전통공연.
▲ 공연 후, 인사하는 배우들. 현란한 메이크업에 뒤지지 않는 전통 춤과, 연기력으로 인상깊었던 발리전통공연.
ⓒ 박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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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나 기억나지? 아까 환전하러 왔었어."

침착하고자 했으나 떨리는 목소리였을 것이다. 아까는 없던 그의 옆에 건장한 남자까지 둘이었다.

"나 여기서 환전했고, 그 후에는 OO식당에서 2000원짜리 밥을 먹었더. 그리고 숙박료를 내야 해서 지갑을 보니 내가 가진 돈은 한참 적더라. 나 지금 발리에 온 것이 세 번째 방문이고 난 발리가 좋아. 내가 아는 모든 발리 친구들은 하나같이 발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좋은 사람들이고. 나에게 이런 안 좋은 기억을 만든 네가 너무 원망스러워. 나 너에게 환전한 돈으로 여기서 일주일을 더 있어야 해. 내 돈 돌려줘."

너무 구구절절 읊어댔나 싶었지만 진심이었다. 그 말이 설마 그의 양심을 찌르기라도 했던 걸까. 일단 발뺌을 하고 볼 줄 알았던 청년이 입을 뗐다.

전통 의상을 입은 채, 오토바이를 세워두고 담소중인 남자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 담소중인 발리 남자들 전통 의상을 입은 채, 오토바이를 세워두고 담소중인 남자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 박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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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얼마를 원하는 건데?"

"당연히 내가 받기로 한 돈을 돌려줘야지."

"그렇게는 안돼. 환율이 그렇지가 않다고!"

그리고 기세를 밀어붙여 그의 양심을 주물러댔다.

"어떻게 사람들에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 발리에 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발리니즈(Balinese, 발리사람들)의 인간미를 기억하고 오는 거라고! 발리에선 나쁜 기억이 하나도 없었는데…. 네가 정말 미워!"

"그래, 맞아. 발리니즈는 좋지! 네 말이 맞아. 암…, 그렇지…."

직원 옆에 있던 건장한 중년의 남자는 발리니즈가 좋다는 말이 너무나 당연한 말이라는 의견을 추임새로 실었고 그래도 환율이 그렇지가 않으니 이해를 하라며 나를 다독였다. 그 또한 가게 주인이었을 것이다.

유명 브랜드 숍들과 힌두 사원이 함께 있는 곳.
▲ 꾸따 해변의 번화가 유명 브랜드 숍들과 힌두 사원이 함께 있는 곳.
ⓒ 박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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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돈을 돌려 받았다. 너희가 써놓은 환율대로 쳐서 내놓으라고는 했지만 기대도 않던 요구였고, 상황을 미안하게 여겨 시세대로 쳐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기대했던 결말대로 이뤄졌다. 그 날의 환율 시세대로 돈을 돌려받았고 끝까지 난 그를 용서하지 않은 채 떠났다.

"다음부턴 이러지 마. 여기 오는 사람들은 발리가 좋아서 오는 사람들이야. 네가 자꾸 그러면 좋았던 발리도 싫어지게 돼!" 

앙칼지게 내 뱉는 나의 마지막 말에 머쓱해하는 두 남자를 뒤로 하고 그 곳을 떠났다.

그래도, 그래도…, 순수한 발리니즈다.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2012년 4월부터 2013년 4월에 걸친 2회의 인도네시아 종단여행을 바탕으로 합니다. 현지 장소의 표기는 현지에서 이용하는 발음을 기준으로 합니다.



태그:#발리 , #인도네시아 , #세계 여행, #우붓 꾸따 해변, #환전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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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를 담은 사진에세이 [same same but Different]의 저자 박설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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