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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기황후>의 기황후(하지원 분)와 토곤테무르 황제(타환, 지창욱 분).
 드라마 <기황후>의 기황후(하지원 분)와 토곤테무르 황제(타환, 지창욱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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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드라마 <기황후>는 기황후(하지원 분)의 화려한 권력투쟁을 선보이고 있다. 드라마 속 기황후는, 황제라는 타이틀을 빼면 사실상 아무 힘도 없는 토곤테무르(타환, 지창욱 분)를 실력 있는 황제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그는 막강한 군사력과 자금력을 보유한 대승상 엔테무르(연철, 전국환 분) 및 타나실리 황후(백진희 분)에 맞서, 비상한 전략과 대담한 배짱으로 적들을 압도하며 황제의 권위를 높이고 있다. 토곤테무르가 점차 실력을 갖게 되는 것은 거의 전적으로 기황후의 공로다. 물론, 이것은 드라마 속의 이야기다.

<기황후>를 시청하다 보면 '어쨌든 간에 기황후는 공녀 신분으로 몽골에서 최고의 지위까지 오른 여걸이 아니냐?'라며 그의 입지전적 출세에 대해 경외감을 품게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기황후가 한민족의 역사에 끼친 영향보다는 그 개인의 출세를 더 높게 평가하게 될 수도 있다.

물론 기황후의 삶에는 보통 사람은 흉내도 내기 힘든 대단한 요소들이 들어 있다. 1334년께 공녀 신분으로 몽골 궁녀가 된 그는 짧은 시간 내에 몽골 황제 토곤테무르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황제뿐 아니라 수많은 몽골 사람들의 신뢰도 받아냈다.

1339년에 황제의 아들인 아이유시리다라를 낳고 이듬해에 제2황후가 된 기황후는 오랜 권력투쟁 끝에 1353년에 아들을 황태자로 만들고 12년 뒤 제1황후에 올랐다. 제2황후가 된 이후의 기황후는 황제 못지않은 실세 중의 실세였다. 이로써 몽골의 권력은 사실상 이 고려 여인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토곤테무르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아이유시리다라와 토구스티무르는 기황후의 핏줄이었다. 토구스티무르의 사망과 함께 몽골의 정식 황통인 쿠빌라이(칭기즈칸의 손자이자 원나라의 시조)의 혈통은 끝났다. 기황후의 혈육이 쿠빌라이 황통의 최후를 장식한 것이다. 이 정도면, 공녀 출신인 이 여성이 얼마나 대단한 족적을 남겼는지 알 수 있다.  

결국 몽골의 몰락을 초래한 기황후의 권력투쟁

기황후(왼쪽)와 타나실리 황후(백진희 분)의 적대관계.
 기황후(왼쪽)와 타나실리 황후(백진희 분)의 적대관계.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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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의 성공은 그 자신에게는 성공이었지만, 몽골의 입장에서는 제국의 몰락을 초래한 불행이었다. 몽골제국에 대한 중국인들의 반란(예컨대, 홍건적의 반란)이 가속화되고 있을 때, 기황후는 아들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권력투쟁을 불사했다. 이로 인해 몽골 조정은 제국을 지키는 일 못지않게 내부 투쟁으로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기황후의 권력투쟁은 1365년에 내전을 초래했고, 이 내전은 몽골의 몰락을 초래한 요인 중 하나였다. 내전에서 기황후가 승리한 지 3년 뒤, 몽골은 주원장의 명나라 군대에 쫓겨 원래의 터전인 몽골초원으로 옮겨가야 했다. 몽골제국의 전성시대가 바로 이때 종결된 것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보면, 기황후는 몽골제국의 영광을 끝장낸 장본인이다. 몽골제국에 대해 부정적인 기억을 갖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런 기황후의 활약이 싫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생각에 빠지다 보면, 기황후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황후를 올바로 평가하려면, 당시의 정치적 맥락을 좀더 숙고할 필요가 있다. 기황후가 제2의 조국으로 삼은 몽골제국은 오늘날의 미국과 같은 존재였다. 또 고려와 몽골의 관계는 대한민국과 미국의 관계에 비견될 수 있었다.

몽골은 형식적으로는 고려의 자주성을 인정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정동행성이란 내정간섭기구를 통해 고려의 자주성을 억압했다. 오늘날의 미국도 형식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자주성을 인정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서울과 수도권에 배치한 미군을 통해 대한민국의 자주성을 억압하고 있다.

1364년 고려와의 전쟁을 개시했지만, 결국 패배

만약 이런 상태에서 '현대판 기황후'가 백악관 인턴으로 시작해서 미국의 퍼스트레이디가 된 뒤 미국 대통령마저 제압하고 최고의 실권자가 됐다고 가정해보자. 아무리 미국이 우리의 자주성을 억압한다 해도, 한국 여성이 미국에서 이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면 한국인들은 그의 성공에 대해 찬사를 보낼 것이다. 

만약 '원조 기황후'가 그 정도에서 그쳤다면 어땠을까? 몽골에서 최고 실권자가 되는 선에서 그쳤다면 말이다. 그랬다면, 오늘날 한국에서 기황후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황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조국인 고려가 반몽골 국가로 돌아서고 친몽골파인 친정집이 응징을 받자, 친정집도 살리고 고려도 혼내줄 목적으로 1364년에 고려와의 전쟁을 개시했다. 하지만 그는 전쟁에서 패했다.

기황후가 후세에 욕을 먹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의 친정집이 고려 서민들에게 저지른 온갖 악행도 문제이지만, 그 자신이 조국인 고려를 침공하고 동족을 해하려 했다는 점 때문에 부정적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황후에게 패배한 엔테무르(연철, 전국환 분).
 기황후에게 패배한 엔테무르(연철, 전국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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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야 자기 친정집을 괴롭히니까, 군대라도 보내서 분풀이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현대판 기황후와 결합시켜 다시 생각해보자.

한국의 반미운동이나 반미감정은 아직은 대한민국 정부와는 무관하다. 하지만 만약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반미노선을 표방하고 주한미군을 내보내자, 한국 정부가 현대판 기황후의 친정집을 친미세력이라는 이유로 응징한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상황에 맞서 현대판 기황후가 주일미군을 동원해서 대한민국을 침공한다면 어떨까? 주일미군을 보내 청와대를 점령하고 한국 대통령을 체포해서 미국 법정에 세우려 한다면 어떨까?

물론 친미세력은 쌍수를 들고 환호하겠지만, 이 경우에 대한민국 여론은 분명히 현대판 기황후에게 등을 돌릴 것이다. 현대판 기황후가 백악관의 실세가 된 것까지는 환영하고 부러워할 수 있지만, 그가 자기 조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데 대해서는 누구도 쉽게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반미노선을 표방한다는 것은 이미 한국 국민의 대다수가 미국에 등을 돌린 상태라는 뜻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판 기황후가 친정집의 복수를 위해 주일미군을 한반도에 파견한다면, 한국 국민의 대다수는 그에게 쌍욕을 퍼부을 것이 틀림없다.

시대정신과 동족 감정 위반한 비정상적 인물, 기황후

고려 말의 상황도 그러했다. 당시의 고려인들은 더 이상 몽골의 간섭 밑에서 숨죽여 지내려 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반몽골이면서도 겉으로는 친몽골을 하던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영리하고 눈치 빠른 공민왕이 반몽골을 표방한 것은 사회적으로 그런 기운이 이미 충분히 무르익었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다면 반몽골을 표방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무엇보다 그것이 성공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한민족의 대다수가 몽골에 대해 반대 노선을 표방하던 시기에 기황후는 몽골 군대를 보내 그런 분위기를 진압하려 했다. 그는 당시 고려인들의 동족 감정을 거스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고려인들의 시대정신에 어긋나는 사람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기황후는 반민족적인 노선을 걸은 여인이란 평가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 역사의 입장에서 볼 때, 기황후는 고려인들의 보편적인 반몽골 정서를 무시하고 고려를 침공한 민족 반역자였다. 그의 개인적인 성공이 이런 사실을 덮을 수는 없다. 이 점을 무시하고 그의 입지전적인 출세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고려 말의 일반적인 사회정서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몽골인의 관점이나 탈(脫)국가적 관점에서는 기황후에 대해 또 다른 평가가 성립할 수도 있다. 이 글은, 적어도 우리 한국사의 관점에서는 기황후가 시대정신과 동족 감정을 위반한 비정상적인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태그:#기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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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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