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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태백산맥'의 한 장면
 뮤지컬 '태백산맥'의 한 장면
ⓒ 연극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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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를 가로지른 가장 아픈 사건은 무엇일까. 경술국치, 을미사변, 한국전쟁 등 이름만 외도 서글픈 단어들이 튀어 오른다. 숫제 아픈 이름들 사이에서 굳이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분단'이 아닐까. 19세기를 지배했던 이데올로기들의 참극은 이 땅에서 지금까지도 형제의 얼굴을 가리는 벽으로 남아있다.

소설 '태백산맥'은 여순사건부터 6.25 직후까지를 다룬 조정래의 대하소설이다. 작품은 금기시 되어왔던 근현대사의 상처를 본격적으로 끄집어내며, 현대문학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 받는다. 소설은 지난해 순천정원박람회 기념작으로 뮤지컬화되어 무대에 올랐다. 재연 무대는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3월 6일부터 3월 8일까지 공연된다. 울울창창한 숲처럼 빈틈없는 조정래의 문체는 어떤 모습으로 뮤지컬 무대에 올랐을까.

뮤지컬 '태백산맥'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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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벌교 땅에서 태어난 형제가 있다. 장남은 한미한 집안을 일으키려 공부에 몰두하고, 차남은 아버지를 따라 소처럼 일만 한다. 차남도 공부를 하고 싶지만, 아버지에게 외면당한다. 그는 외면당한 자신의 삶에 분노한다. 인텔리로 거듭난 형은 사회주의 혁명을 부르짖고, 동생은 혼란한 시대를 틈타 출세의 기회를 잡으려 발악한다. 이데올로기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은 인척을 따라, 귀동냥을 따라 빨갱이가 되고 반공청년이 된다. 그렇게 적이 된 형제는 이데올로기의 총칼 속에 서로를 겨눈다.

뮤지컬 '태백산맥'은 소설의 동력만을 취한다. 시기도 한국전쟁 전까지만 다룬다. 백여 명이 넘는 소설 속 인물들은 몇몇 주인공들로 축약된다. 주된 이야기는 비운의 형제 염상진과 염상구, 중도를 지키는 지식인 김범우, 무당 소화와 공산당원 정하섭, 강동식과 외서댁을 중심으로 구축된다. 이야기의 저변에는 지주와 소작농의 대립, 이데올로기의 무지 속에 희생되어 가는 서민들의 이야기가 깔린다.

소설의 방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기에 세 시간여의 무대는 너무 협소했던 까닭일까. 무대는 헐겁고 낡아 보였다. 1막은 느릿한 무대 체인징으로 관객을 어색한 적막에 자주 빠뜨렸고, 산발적인 이야기는 흐릿한 물줄기의 흔적을 따라 흐르기 바빴다. 갈등이 폭발하고 해결되는 2막은 이야기의 저력을 보여줬지만, 1막의 공허함을 달래줄 뿐 완전히 채우진 못했다.

하지만 '태백산맥'은 '태백산맥'이다. 소설의 무게는 뮤지컬에도 여실하다. '땅 파먹고 사는 게 무슨 죄냐', '논두렁 치며 엉엉 울었노라' 등의 대사는 소설 속에서 느꼈던 갑갑증을 고스란히 무대 위로 치밀어 올린다. 형제 다툼에 희생된 어머니의 눈물은 '태백산맥'의 속내를 압착한다. 이야기의 날카로운 시대정신이 번쩍일 때마다, 징글징글하고 지루한 싸움의 결과인 현재를 더듬게 된다. '너희들은 형제여, 형제는 싸워서는 안 된다'는 한 줄 대사가 오래도록 빈 가슴을 먼지처럼 돌아다니는 것도 그래서다.

음악은 '태백산맥'의 색채를 입히는 데 한몫한다.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아리아는 없지만, 서민들의 중창, 합창은 한 구절마다 서러움이 첩첩산중이다. 서민의 흥겨움이 물씬거리는 음악, 빨치산 부대의 웅장한 발걸음에 맞춘 뮤지컬넘버는 웅장함과 절도가 숨 쉰다. 다만, 고저를 확실히 짚어내지 못한 단조로운 편곡은 아쉬움이 남는다.

뮤지컬 '태백산맥'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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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고 넘어갈 것이 하나 더 있다. 뮤지컬의 노랫말은 곧 대사다. 주된 이야기도 가사를 통해 전달될 수밖에 없다. 해오름극장의 음향은 귓가를 맴돌 뿐 정확한 가사를 전달하지 못했다. 합창 때는 더욱 심각해 '웅얼거림'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뮤지컬 '태백산맥'의 감동이 에누리된 것은 음향 탓이 적지 않았다.

태백산맥의 능선은 여전히 함경도를 가로질러 부산으로 흐르고 있다. 과거 그 속에는 빨치산이 살았고, 지주가 살았으며, 정 많은 옆집 아낙네와 반공청년이 살았다. 염상진의 목이 효수된 길목에서 '살아서야 빨갱이지, 죽어서는 아니여'라고 울부짖던 염상구의 외침도 아직 거기 있다. 미사일과 이산가족상봉, 그 사이의 헛헛한 가슴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또다시 살아갈 뿐이다. '태백산맥'이 품은 이야기가 오래도록 그곳에 있을 것처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테이지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태백산맥, #조정래, #뮤지컬 태백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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