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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창간 14주년 특별기획의 하나로 <행복사회의 리더십>을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지난해 오연호 대표기자가 연재한 '행복지수 1위 덴마크의 비결을 찾아서'의 속편격이다. 덴마크 행복사회의 뿌리를 찾아가면서 우리는 더 나은 행복사회를 위해 오늘 어떤 씨앗을 뿌릴 것인지를 모색해본다. 이 연재는 2014년 9월 초 단행본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오마이북)로 출간될 예정이다. [편집자말]
▲ [오연호의 특별취재 리포트]달가스의 황무지 개간운동은 왜 성공했나
ⓒ 오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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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트(Passat)는 오늘도 잘 달리고 있다. 지금은 유틀란트 반도의 중북부에 있는 비보르(Viborg)를 향하고 있다. 달가스 기념관을 보고 싶어서다.

달가스(Enriko Mylius Dalgas, 1828~1894)는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이다. 아마도 덴마크인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 달가스가 아닐까? 나는 초등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서 그를 만났다. 불굴의 애국정신으로 덴마크의 황무지를 개간해 옥토로 만들어 놓았다고 배웠다.

나는 비보르로 달리면서 마치 초등학생 때로 시간여행을 하는 듯했다. 내가 위대하다고 생각했던 덴마크 아저씨, 그의 흔적을 곧 만날 수 있다니…. 오랜만에 초등학교 은사님을 만나는 것처럼 들떴다.

사형선고 받은 땅, 황무지에 희망의 씨앗 뿌리다

 달가스(Enriko Mylius Dalgas, 1828~1894)
 달가스(Enriko Mylius Dalgas, 1828~1894)
ⓒ DD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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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가스는 그때 내겐 황무지(荒蕪地)와 거의 동의어였다. 그런데 '황무지'라는 단어를 접할 때 나는 시골출신답게 산골짜기를 생각했다. 어릴 때 난 나무꾼이었다. 동네 청년들을 따라 지게를 지고 나무하러 산에 올라가면 깊은 산중에 외딴 집이 있었다. 이런 곳에 사람이 살다니.

한 가족이 거기에 살면서 산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다. 논밭이 될 수 없는 척박한 곳인데 개간을 한 것이다. 어린 나는 그것을 보면서 감동했다. 메마른 산등을 곡식이 자랄 수 있는 논밭으로 바꿔놓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까?

교과서에서 만난 달가스도 그런 감동을 주었다. 자연스럽게 산골짜기에서 개간하는 달가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런데 덴마크에 와보니 그런 달가스는 없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덴마크는 높은 산이 없다. 제일 높다는 산이 고작 172m다. 어디를 가나 땅이 거의 평평하다. 산이 없으니 산골짜기도 없다. 그래서 비보르를 향해 달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달가스는 우리 고향의 농민들보다 더 편했겠다.'

그런데 실상을 알고보니 내 생각이 짧았다. 지금 차로 달리고 있는 이 유틀란트 지역은 평평하긴 했지만 최악의 조건을 가진 땅이었다. 덴마크에서 황무지는 '히스랜드(Heathland)'로 불렸다. 히스라는 식물만 자랄 수 있고 그 어떤 다른 식물도 자랄 수 없는 척박한 땅이라는 말이다.

히스는 철쭉과 비슷한 모양으로 자라는, 키가 작고 억센 식물인데 습하고 영양이 거의 없는 땅에서 자란다. 히스의 존재는 땅의 묘비명인 셈이다. '여기 땅은 다 죽은 지 오래 되었으니 기대하지 말라'는.

덴마크의 유틀란트 지역이 왜 히스랜드가 되었는지는 학자마다 분분하다. 북해에 인접해있는 데다가 산이 없으니 강한 바닷바람에 몹쓸 땅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반면 원래 쓸 만한 땅이었는데 인간들이 벌목을 하고 방치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 입장을 따르는 이들은 이곳이 원래 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는 땅이 좋았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19세기 중반 달가스의 도전은 사형선고를 받은 지 오래된 땅을 되살리는 작업이었다.     

"밖에서 잃은 땅을 안에서 찾자"

 황무지 개척의 리더 달가스의 동상 앞에서. 엘스씨는 달가스 정신을 잇기 위해 36년째 일하고 있다.
 황무지 개척의 리더 달가스의 동상 앞에서. 엘스씨는 달가스 정신을 잇기 위해 36년째 일하고 있다.
ⓒ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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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보르의 달가스기념관에 도착했다. 5층 건물인데 이곳에 기념관뿐 아니라 달가스가 만든 회사와 단체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 크리스찬 엘스(Christian Als)씨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71세의 노인인 그는 35년 동안 달가스 회사에서 일했다고 한다.

엘스씨는 우리를 건물 밖 달가스 동상이 서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언덕 위의 달가스는 당당한 모습으로 차들이 달리는 도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엘스씨가 설명한다.

"이 도로가 저편에 있는 도시 비보르랑 연결됩니다. 원래 도로가 없었는데 달가스가 주도해 만든 겁니다. 달가스가 없었으면 이 지역의 발전도 없었지요. 그래서 동상을 이 자리에 세운 겁니다."

동상 옆에는 덴마크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그런데 그 바로 옆에 태극기도 나란히 펄럭이고 있는 게 아닌가.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일부러 걸었단다.

"내가 여기서 수십 년 근무했는데 한국인이 찾아온 것은 아마도 당신들이 처음인 것 같소."

달가스는 공병장교였다. 그는 1855년 비보르에서 군사용 도로 건설을 담당하는 중위로 군대생활을 시작했다. 1864년 덴마크가 독일에게 패해 국토의 3분의1을 잃었을 때 그는 중령까지 승진한 상태였다. 전쟁에 진 충격으로 온 나라가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달가스는 새 희망을 만들어낸다. 공병장교의 경험을 살려 황무지를 개척하기로 한 것이다. 패전 2년 후인  1866년 몇몇 친구들과 함께 황무지 개간협회(Danish Heath Society)를 만든다.

"밖에서 잃은 땅을 안에서 찾자!" 당시 덴마크에서 널리 주창되었다는 이 멋진 말은 달가스의 도전을 상징한다. 그러나 달가스가 직접 이 말을 만들어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무슨 상관이랴. 달가스는 이후 덴마크 황무지의 절반 이상을 비옥한 땅으로 바꿔놓는 선봉장 역할을 한다.

엘스씨는 우리를 지하 1층에 있는 기념관으로 안내했다. 그는 고령이지만 매우 열성적이었다. 정정하고 짱짱했다. 미리 스크린을 준비해둔 그는 약 20분간 프리젠테이션을 해줬다. 인상적인 장면은 달가스운동 이전과 이후를 대비한 덴마크 영토 그림이다. 확연이 달랐다.

 황무지 개간 전과 후가 이렇게 바뀌었다.
 황무지 개간 전과 후가 이렇게 바뀌었다.
ⓒ DD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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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하자면 원래 얼굴의 절반이 검은 점투성이였는데 성형 이후 상당수의 점을 빼내 거의 하얀 얼굴이 되었다고나 할까? 달가스와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 주도한 국토개간운동으로 30년 만에 덴마크의 황무지 7380㎢는 3120㎢로 줄었다.  

기념관에는 달가스의 시대를 보여주는 유물, 자료, 사진 등이 잘 전시돼 있었다. 한 사진은 황무지 들판에서 개간을 하는 농부 18명을 담고 있다. 그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삽자루를 쥐고 있다. 다들 표정과 눈빛이 비장하다. 합창으로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이렇게 허리 끊어져라 고생하면서 땅을 일구고 있다. 후대여, 나중에 이 땅에서 덕을 보거든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라.'    

적절한 타이밍에 더불어 함께 하라

 황무지 개간 당시 삽을 든 농민들. “잃어버린 땅을 안에서 찾자”
 황무지 개간 당시 삽을 든 농민들. “잃어버린 땅을 안에서 찾자”
ⓒ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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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스씨의 친절한 안내를 받아 기념관을 30여 분간 돌아보니 달가스 아저씨한테 좀 미안해졌다. 초등학교 교과서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우리가 배웠던 달가스는 너무 단순했다. 애국심, 투지, 근면이 그때 배운 키워드였다. 그러나 달가스는 그 이상이었다. '더불어 함께'였고, 과학이었다. 무엇이 달가스의 국토개간운동을 성공시켰나? 그 성공요인들은 오늘날의 덴마크가 '행복지수 세계 1위'의 나라가 된 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나?

첫째, 어떤 일을 성공시키려면 타이밍이 중요하다. 엘스씨는 "적기에 적절한 사람이 일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달가스는 황무지 개간을 시도한 첫 번째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덴마크 정부가 그보다 50년 전에 시도를 했었다. 그러나 농부들이 따르지 않아서 실패했다. 또 100년 전에는 독일인들이 1000명이나 몰려와 시도를 했다. 그러나 사나운 날씨와 기술부족 등으로 포기하고 돌아갔다.

달가스가 시작한 1866년에는 덴마크에 철도가 개통됐다. 농민들이 그룬트비 정신으로 만들어진 농민고등학교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1864년 독일에 패전해 국토의 3분의1을 빼앗긴 상태에서 2년이 지난 시기였기에 국민들은 절망의 바닥을 찍고 뭔가를 해야 된다고 느끼고 있던 때였다. 그때 가장 적절한 사람이 등장했다. 달가스는 공병장교였기에 땅을 알고 땅을 다스릴 줄 알았다. 추진력이 있었다. 

둘째, 위에서 아래로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기운을 모아 '더불어 함께' 해야 성공한다. 달가스는 농부들의 마음을 사가며 그들과 함께 일을 추진해나갔다. 그룬트비 정신으로 무장한 농민고등학교 출신들과 마음을 합친 것도 주효했다. 기념관에는 달가스를 처음부터 지원해준 5명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그룬트비 정신으로 만들어진 학교의 교장 루드빅 쇼더(Ludvig Schoder)이다. 이 교장은 학생들에게 "달가스와 함께 하자"고 권유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함께 힘을 보태면 이득이 생긴다'는 것을 체험한 협동조합원 농부들이 늘어난 것도 도움이 됐다.

희망·근면 만으로는 부족, 지식·과학 있어야 한다

셋째, 참여자에게 실질적인 이득을 줘야 성공한다. 농부들이 황무지 개간에 열심히 동참한 배경에는 애국심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나에게 확실한 이득이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개간이 끝나면 참여한 농민들은 일정한 땅을 소유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4만5000명의 '내 땅을 가진 농부'가 새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당시 덴마크에서는 달가스 드림(Dalgas Dream)이라는 말이 생겼다. 아메리칸 드림에 견준 말이다.

덴마크 농민들은 황무지 개간운동을 전후로 약 30만 명이 미국으로 이민갔다. 미국에서 서부개척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덴마크에서 먹고 살기 힘든 이들이 이민을 간 것이다. 그러나 달가스 드림은 그 흐름을 일부 바꿔놓았다. 미국에 가지 않고도 여기에서 내 땅을 차지하고 잘 살 수 있다! 이렇게 참여자에게 실질적인 이득을 준 점은, 앞 글에서 소개한 덴마크 최초 낙농 협동조합의 성공 요인과 맥을 같이한다.

넷째, 희망만으로는 안 된다. 의지와 근면만으로도 안 된다. 지식과 과학이 있어야 한다. 달가스 기념관을 둘러보면 마치 과학실험기구 전시실에 온 듯하다. 황무지 개간운동사는 어찌보면 흙, 물, 나무에 대한 연구사였다.

그 과정에서 표면의 흙들은 죽은 것이지만 40cm이상 파면 살아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저습지에서 물을 빼내야 땅을 개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물에 대한 과학적 연구도 필요했다. 개간된 토양에서 살 수 있는 나무를 연구하는 것도 매우 중요했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흙, 물, 나무에 대한 3대 연구가 궤도에 올랐을 때 개간운동은 날개를 달 수 있었다.

 달가스 개척운동은 과학이었다. 물, 흙, 나무에 대한 심층연구가 함께 있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연구 견본과 기구들.
 달가스 개척운동은 과학이었다. 물, 흙, 나무에 대한 심층연구가 함께 있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연구 견본과 기구들.
ⓒ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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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가스 개척운동은 과학이었다. 물, 흙, 나무에 대한 심층연구가 함께 있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연구 견본과 기구들.
 박물관에 전시된 연구 견본과 기구들.
ⓒ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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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가스 개척운동은 과학이었다. 물, 흙, 나무에 대한 심층연구가 함께 있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연구 견본과 기구들.
 박물관에 전시된 연구 견본과 기구들.
ⓒ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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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래로부터 더불어 함께'가 확고해진 후에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 유연성을 발휘했다. 정부는 개간에 필요한 자금을 일부 지원해줬다.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황무지 개간에 동원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농민들이 개간된 땅에서 농사를 지을 때 꼭 필요한 것이 바람막이 나무숲벽을 만드는 것이다. 나무를 심어도 약 20년간 아무 수익이 없는데도, 정부가 그 20년 동안 자금을 지원해줬다.

재미있는 것은, 달가스가 맨 처음 황무지 개간을 시작할 때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거절당했다는 점이다. 달가스의 개간 이야기를 접한 국민들이 성금을 모아 후원해 줄 정도로 분위기가 무르익자 정부는 뒤늦게 부분적인 지원을 했다. 그러나 정부는 끝까지 이 운동을 주도하려하지 않았다. 절제했다.

황무지 개간은 달가스의 리더십과 참여 농민들의 피땀과 연대의식, 전문가들의 과학적 연구 헌신과 정부의 절제력 있는 지원 등이 합쳐져서 가능했다. 이것이 비슷한 시기에 이뤄진, 그룬트비의 깨어있는 농민 만들기 운동, 협동조합 만들기 운동 등과 결합돼 덴마크의 농촌을 되살렸다.

그 과정에서 주인의식을 길렀고 참여, 연대의 정신을 가꿨다. 덴마크가 오늘날 '행복지수 세계 1위' 나라가 된 것은 150년 전에 그런 씨앗을 뿌렸기 때문이다. 다음 이어질 글들에서는 농촌에서 뿌린 이 씨앗이 어떻게 덴마크 전체로 퍼질 수 있었는가를 추적한다.

 오연호 대표 기자가 연재했던 <'행복사회의 리더십'-'행복지수 1위 덴마크 비결을 찾아서'>가 2014년 9월1일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오마이북)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오연호 대표 기자가 연재했던 <'행복사회의 리더십'-'행복지수 1위 덴마크 비결을 찾아서'>가 2014년 9월1일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오마이북)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 오마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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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myNews 대표기자 & 대표이사. 2000년 2월22일 오마이뉴스 창간. 1988년 1월 월간 <말>에서 기자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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