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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기말고사가 없는 세인트 존스 대학엔 학생의 다음 학기, 다음 학년 진학을 위해 튜터(교수)들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돈 래그'라는 시스템이 있다는 걸 지난 기사에서 설명했다. (관련 기사 : 교수들의 공개 뒷담화... 안 당한 사람은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돈 래그에서 튜터들이 어떻게 학생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뒷담화(?)하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하지만 정말로 돈 래그가 무시무시해지는 때는 바로 2학년 마지막 돈 래그에서다.

1학년 때는 학생이 말을 좀 안 듣거나 고치라는 부분을 고치지 않아도 "그래, 아직 처음이니까" 하며 봐준다. 하지만 2학년 2학기 돈 래그에서 더 이상의 관용은 없다. 그래서 이 돈 래그는 특별한 이름이 붙는다. 'Enabling Don Rag'라고 해서 'enable'이란 단어는 '-을 할 수 있게 하다'라는 뜻이다. 즉, 학생이 세인트 존스에서 수업을 계속 할 수 있게 할지 말지를 모든 튜터들이 모여서 결정하는 특별한 돈 래그다.

2학년이 끝날 때, 3학년 진학 전 이 특별한 돈 래그가 있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이제 2년 정도 있었으니 세인트 존스 커리큘럼에 적응을 했을 법한 때라는 것. 둘째, 다른 학교로 편입을 하려면 이 시기가 가장 적절한 시기이기 때문이고, 셋째, 가장 중요한 이유로서 3, 4학년 수업이 1, 2학년 때와 다르게 엄청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튜터들은 2학년 돈 래그를 더욱 더 객관적인 입장에서 판단하려고 노력한다. 특히나 3, 4학년 수업은 칸트, 헤겔, 하이데거 등 아주 심오한 철학 책 등은 물론 과학, 수학 수업에서는 맥스웰, 뉴턴, 아인슈타인 등을 한꺼번에 배우기 때문에 수업들이 많이 힘들어진다. 그런데 3, 4학년으로 진급시켰다가 학생이 못 버티거나, 수업에서 자꾸 문제를 일으키고 분위기를 해치게 되면 더 복잡해지기 때문에 그 학생을 위해서도, 다른 학우들을 위해서도 옳은 결정을 내리는 게 중요해지는 것이다.

특별 돈 래그에서는 1학년 때와는 다르게 돈 래그가 연달아 두 번 열린다. 첫 번째 돈 래그에선 원래와 똑같이 학생과 학생의 수업을 맡은 튜터들이 모여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두 번째 돈 래그에서는 학생이 전혀 참여할 수 없고, 많은 수의 튜터들로만 이루어진 돈 래그 위원회가 따로 모여 2학년 학생 전원을 대상으로 하나 하나 판단하게 된다.

첫 돈 래그에서 별 문제 없이 만장일치로 통과된 학생의 경우 빠르게 넘어가지만, 만약 한 명의 튜터라도 어떤 학생의 3학년 진학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면 그런 학생들의 케이스가 이 두 번째 돈래그에선 더 중요하게 다뤄지게 된다.

그 후 문제가 되었던 학생이 학업을 계속하게 할지 말지에 대해 (총장을 포함한) 튜터들 모두가 투표를 하게 된다. 근데 그 투표마저 통과를 못하게 되면 그 학생은 총장에게 불려가 총장과 면담 후, 다시 최후의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2학년 특별 돈 래그를 통과하지 못해서, 또는 2년간의 빡센 공부에 지쳐서, 2학년 후에는 제법 많은 학생들이 휴학을 결정하기도 한다. 또 (자진해서) 다른 학교로 편입을 가는 학생들도 많다. 그래서 3학년이 되면 클래스 인원수가 월등히 줄게 되는 걸 느낄 수 있다.

공부중인 학생
▲ 도서관 공부중인 학생
ⓒ St.John's Coll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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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장과의 면담에까지 이른 나의 3학년 돈래그

그렇다면 "2학년 특별 돈 래그까지만 무사히 통과하면 한숨 놓을 수 있나?" 그건 또 아니다. 나 역시 2학년까진 큰 어려움 없이 돈 래그를 마쳤다. "어렵다는 3, 4학년 과정을 거칠 능력이 나에게도 있다고 생각하신 거겠지? 야호!"하면서 자뻑(?)에 빠져 3학년에 진학했다. 그러나 1학기를 마치고 돈 래그 결과 결국 마지막 관문이라는 총장에게 불려가는 상황에까지 이르고 말았으니….

내 경우는 이랬다. 3학년이 되자 정말 소문대로, 아니 소문보다 훨씬 더 수업들이 힘들어진 것이 큰 요인이었다. 비중이 너무 커진 수학, 과학 과목 때문에 문과 성향이던 나는 "2년간 세인트 존스가 (철학, 문학만을 공부하는 학교인 척) 나를 속였다!"하고 통탄을 해댔다(괜히 학교 탓).

3학년은 정말 차원이 달랐다. 매일 매일의 수업이 도전의 연속이었다. 하루같이 좌절을 겪었고 힘들어 하며 3학년 한 학기를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1학기를 마무리짓는 돈 래그를 하게 됐다. 평소와 다름 없이 격려도 받고, 가혹한 평을 받기도 하며 구구절절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주 중요한 질문 하나가 나왔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 학교에서 튜터를 해오신, 나이가 많은 튜터의 질문이었다 "미스 초, 너는 이 학교에서 행복하니?" 그 질문을 듣자마자 난 갑자기 멍- 해졌다. 그 질문을 시작으로, 보통 한 학생당 15-20분이면 끝나는 돈 래그가 1시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이제 튜터들의 토론 주제는 '미스 초는 세인트 존스에서 행복한가'가 되었다. 항상 핵심적이고 좋은 조언을 해주던 튜터가 말했다.

"제가 봐 온 미스 초는 조용하지만 진지한 학생입니다. 수업 준비, 페이퍼 등 빠지는 것 없이 제출하고 성실히 공부하는 학생이거든요. 그런데 미스 초는 우리 학교 커리큘럼 특성상 너무 힘든 공부를 하고 있어요. 미국 학생들조차도 버티기 힘든 수업들인데 외국인 학생으로서 언어적인 어려움까지 더해지니까요. 그런 이유들로 미스 초는 그동안 참 많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제 생각에 미스 초는 지금보다 더 행복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학교에 가서 다른 방식으로 공부한다면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난 수업에 있어서 문제를 겪고 있으면 튜터들과 이야기해 보고 조언 듣는 걸 좋아했는데, 대화 중 가슴 속 꽁꽁 숨어있던 서러움이 터지며 눈물바람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봐 오신 튜터들이었기 때문에 돈 래그 중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이었다.

긴 토론이 이어졌지만 튜터들은 쉽사리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고 결국 내 문제는 총장에게로 넘어가게 됐다. 총장까지 만날 상황에 놓이자 나는 예상치도 못했던 위기상황(?)에 학교를 계속 다니고 싶어도 못 다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심각하게 들게 됐다.

총장과의 면담 날짜를 기다리는 며칠간 나는 폭풍의 언덕에서 비바람에 휩쓸려 곧 날아가버릴 사람처럼 내 스스로를 붙잡으려 노력했다. 그러면서 돈 래그 동안 오고 간 '객관적 입장에서 본 내 3학년 1학기 모습'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마음을 정리해 볼 수 있었다.

며칠 후, 총장을 만났다. 총장은 돈 래그 내용을 기록한 '돈 래그 리포트'를 보더니 내 문제가 자신에게까지 넘어오게 된 이유에 대해 궁금해 하셨다. 일반적인 학생의 문제(에세이, 결석 등)와는 다른 경우였기 때문이다. '미스 초는 행복한가?'에 대해 나는 며칠간 정리한 내 생각을 말씀드렸다.

"제가 이 학교의 특별한 커리큘럼상, 또 제 언어나 성격적인 문제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실 너무 힘들고, 울기도 많이 하고, 매일 매일의 수업들이 저에게는 큰 도전이거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군분투를 사랑하고, 즐긴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과정을 통해 더 강해지고, 더 배움을 얻을 수 있다면 이 학교에서 계속 공부하는 것이 저에겐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총장님은 내 말에 동의해 주셨다. 이런 상황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든 학생의 의견을 존중하겠다고 하셨다. 다른 학교로 편입을 가는 쪽을 선택하는 것도, 남는 쪽을 선택하는 것도 그 어떤 것도 정답은 없다고.

학생이 선택하는 그것이 정답이라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계속 노력해 보자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 후 총장님은 3학년 2학기에 대한 조언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겠다고 말씀하셨고 그렇게 나는 우여곡절 끝에 3학년 1학기를 마칠 수 있었다.

1학기 돈 래그와 총장과의 대화는 내가 나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하고 스스로 답을 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미스 초는 행복한가'에 대한 질문과 스스로 결정한 그 마음을 간직한 채 나는 3학년 2학기를 보냈고 학기 말, 마지막 돈 래그인 콘퍼런스를 했다.   

내 스스로 나를 평가하다

메인 캠퍼스 뜰에서
▲ 햇살 좋은 날 메인 캠퍼스 뜰에서
ⓒ 조한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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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퍼런스(Conference)의 개념은 돈 래그와 반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돈 래그는 여태껏 튜터들이 '객관적으로' 학생을 판단해 왔고 학생이 나중에야 말할 기회가 주어졌지만 콘퍼런스는 처음부터 학생 본인이 판단한 자신의 수업에서의 모습을 각각의 수업 튜터들에게 발표하는 형식이다. 그 발표를 듣고 난 후 튜터들이 만약 학생이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지적을 하거나 동의를 한다.

콘퍼런스의 핵심은 학생이 이제 얼마나 자기 자신에 대해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게 되었느냐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은 스스로 학습, 발전이 가능하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 콘퍼런스를 마지막으로, 세인트 존스에서의 돈 래그는 마침내 끝이 난다.

4학년 때는 (학교 측에선) 이미 3년간 갈고 닦았으니 이제 학생은 충분히 스스로 발전할 능력이 생겼다는 뜻에서, 또는 (학생들 말에 의하면) 이제 4학년이나 됐으니 더 이상 조언을 해줘 봤자 안 고칠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이래저래 더 이상은 돈 래그가 없는 것이다.

하여튼 여기까지가 세인트 존스의 특별한 학생 평가 제도, 돈 래그에 대한 설명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돌이켜 보니 돈 래그는 나에게 있어 그 어떤 세인트 존스의 튜터들보다도 무섭고 엄격한, 객관적인 선생님이었다. 예상치 못한 칭찬과 격려를 주다가도 너무나 가혹하게 나를 꾸짖고 눈물을 쏙 빼게 만들기도 했고, 다시 내가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나를 돌아보게 이끌어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학생들에게 돈 래그가 이런 것은 아니다. 나처럼 돈 래그를 통해 혹독하게 당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내 주변의 미국 친구들은 물론 대견스럽게도 한국 후배들까지 나보다 훨씬 더 잘하고 있고, 돈 래그를 아무렇지 않게, 칭찬 폭탄을 받으며 너무나 쉽게 통과하는 친구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 진짜 좋겠다'하고 부럽기도 했고, '나만 왜 이렇게 힘들지'하면서 한편으론 내 스스로가 참 바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또 다시 생각해 보면 내가 경험한 이 돈 래그는 나를 채찍질했고, 그럼으로써 발전시켰고, 강하게 만들었다. 3학년을 보내면서 수업에 대한 어려움에 매일같이 좌절감만 느끼고 불행 구름을 항상 머리 위에 띄운 채 하루 하루 지내 왔던 내 모습을 잠시 멈춰서 객관적으로, 그리고 냉정히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없었다면 지금 4학년 마지막 학기까지 못 왔을지도 모른다. 내 어려움이 (나에게 있어선) 얼마나 가치 있는 어려움인지 스스로의 힘으로는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고, 그저 힘들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해서 고군분투 하기를 그만뒀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저 남들이 보기엔 별거 아닌, (어느 대학이나 마찬가지인) 어려움 중의 하나일 수도 있고 지극히 개인적인 내 이야기일 뿐임을 알고 있지만 이렇게 자세히 쓰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경험한 세인트 존스의 지혜로운, 그리고 융통성 있고 인간적인 학생 평가 제도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럼 이렇게, 세인트 존스의 돈 래그 이야기를 마치며, 다음 편에서는 매학기 초 모든 대학생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수강신청 광 클릭'이 세인트 존스 대학에서는 왜 필요없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덧붙이는 글 | 개인 까페 (http://cafe.naver.com/nagnegil)에도 연재중입니다.



태그:#ST.JOHN'S COLLEGE, #세인트 존스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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