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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2015년)이면 해방된 지 70주년. 하지만 200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강제 동원된 피해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최남단 오키나와에서 최북단 홋카이도까지 일본 전역에 남아 있는 전쟁 유적에는 조선인의 강제동원 역사가 각인되어 있다. 이 연재는 강제 동원된 피해자들의 증언과 함께 전쟁 유적의 현장을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긴 여정을 기록하는 작업이다. 기자는 지난해 6월 도쿄의 한국대사관에서 발견된 '일정시 피징용자 명부'의 검증 작업에 동행하면서 강제 동원의 역사가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현재임을 실감했다. 이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기자 말

‘일정시 피징용자 명부’ 가운데 보은군 삼승면 달산리 지역의 명단을 일일이 확인하는 조사관
▲ 강제동원 피해조사 ‘일정시 피징용자 명부’ 가운데 보은군 삼승면 달산리 지역의 명단을 일일이 확인하는 조사관
ⓒ 안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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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타이 상(군인)이라고 했어."
"○○는 □□와 같이 갔다는 게야. 보급대로 갔지."
"○○ 형님도 일본에 가기는 갔는데, 다르다는 거야. 군대생활 하구 오구. 남양군도까지 갔다 왔다데."

충청북도 보은군 삼승면 달산리 달산1구 경로당에서 지난 18일 오후 조사팀을 기다리던 노인들이 기억의 단편들을 선명하게 쏟아내기 시작했다. 지난해 6월 일본 도쿄의 한국대사관에서 발견된 '일정시 피징용자 명부' 검증 작업을 위해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아래 강제동원 피해조사 위원회)' 조사팀이 현장을 찾아 참고인들을 통해 명부에 있는 인원들의 피해 여부를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달산리에서 왜정 때 일본에 징용가신 분들 이름 등을 확인해 보려고 왔거든요. 한 명씩 호명할 테니 기억나시는 분이 있으면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류재욱 강제동원 피해조사 위원회 조사1과 조사관이 경로당에 모인 노인들에게 간단한 설명과 함께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주일 한국대사관에서 국가기록원으로 이관 받은 명단을 기초로 2개월에 걸친 분류, 문서 확인 작업을 거쳐 충북 보은군 삼승면과 경북 성주군 성주읍을 표본 조사 지역으로 설정하고 심의관을 비롯해 총 11명의 조사관을 파견해 현장 실사 작업을 벌였다. 삼승면과 성주읍을 표본 조사 지역으로 선정한 것은 자연마을 형태로 인구 이동이 적은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6명의 조사관이 파견된 달산리는 1구과 2구가 있어 2개 팀으로 나뉘어 조사가 진행되었다.

"처음에 이운섭이라는 분 아세요? 1919년생인데, 징용 가서 돌아가신 분이에요."
"이만섭일 거요. 운섭이라는 이름은 듣는 일이 처음인데…."
"누군가?"

남편이 징용으로 끌려갔다는 것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이옥희(87) 할머니.
 남편이 징용으로 끌려갔다는 것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이옥희(87) 할머니.
ⓒ 안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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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새기며 단편적인 사실들이 하나씩 조각 맞추기를 하고 있었다. 조사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들을 한 할머니가 옆방에서 건너왔다. 조사원들과 조사 작업을 벌이던 자리에 있던 할머니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다른 할머니를 불러들였다. 이옥희(87) 할머니였다.

"이운섭이라는 분 아세요?"
"이은섭야."
"그분 일본에서 못 돌아왔어요?"
"유골로 왔어요!"

할아버지·할머니 기억 속에 자리 잡은 피해의 역사

대일항쟁기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을 위한 위로금 등 지급 신청 접수가 연장되었음을 안내하는 포스터를 설명하고 있다.
▲ 피해 신고 안내 대일항쟁기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을 위한 위로금 등 지급 신청 접수가 연장되었음을 안내하는 포스터를 설명하고 있다.
ⓒ 안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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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할머니가 이름을 확인하자 주변의 할머니들도 기억을 더했다. 당시 호적에 있는 이름과 일상에서 사용하는 이름이 다른 경우는 다반사였다. 이옥희 할머니의 남편도 23세 때 징용으로 끌려갔다.

"8월에 가서 그 이듬 해방되고 나왔지."
"할아버지는 무사히 오셨어요?"
"다친 데 없고 무사히 잘 왔어요."
"일본에서 무슨 일하셨어요?"
"무슨 일 한 것은 몰라요."
"지진때문에 죽을 뻔했다고 맨 그 소리만 하더라고."

주일 한국대사관에서 발견된 '일정시 피징용자 명부'는 총 65권에 22만 8724명이 수록되어 있다. 함께 발견된 '3·1운동시 피살자 명부'는 1권 630명, '일본 진재(震災)시 피살자 명부'에는 1권 290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1953년 4월 2차 한일회담 준비를 위해 전국 단위로 조사를 하고 도별로 취합한 명단이다. 1953년 1월 내무부가 최종적으로 취합했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12월 15일 부산의 대통령 임시관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지시해 이루어진 조사 명부다. 이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일정강점기의 피해자 명부다. 이 명부는 생년원일, 면리 단위의 하부 주소, 동원기간, 동원지, 귀환 및 사망 여부 등이 기재되어 있다.

이 명단의 실사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정혜경 강제동원 피해조사 위원회의 조사1과 과장은 "정부 수립과 6.25전쟁 등 혼란한 시기에 정부가 책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한 사례다"면서도  "일부 문서는 잘 보이지 않거나 연도별로 혼재되어 있어 장기간에 걸친 문서 검증 작업을 비롯해 현장 검증 작업을 거쳐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1945년 해방된 이후 68년이 지나서야 일본 땅에서 발견된 피해자의 명부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70년 가까운 세월을 품은 피해의 역사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현장 조사를 통해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일본이 국가 차원에서 시행한 강제동원의 역사가 60여 년의 세월을 넘어 비로소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충북 보은군 삼승면 달산리에서는 징용, 보급대, 군인 등 다양한 형태로 강제동원되었다.
▲ 달산리 마을 전경 충북 보은군 삼승면 달산리에서는 징용, 보급대, 군인 등 다양한 형태로 강제동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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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동원된 조선인이 몇 명인가에 대한 종합적인 통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 본토를 포함해 사할린, 중부 태평양(남양군도), 만주, 동남아시아 등지로 국외 동원된 노무자수는 104만5000명, 군인은 20만9000명, 군무원은 6만3000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한반도 내에서도 연인원 650만 명이 강제동원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단지 식민지 민중이라는 이유만으로 총을 든 군인, 누워서 탄을 캐는 광부, 이름 모를 장소에서 고통에 몸부림친 위안부들이 이름만 다른 '강제 동원'으로 고향을 떠나야 했다. 차별과 멸시, 구타와 배고픔이 일상인 가장 위험한 위치에 식민지 조선인이 놓여 있었다." - 정혜경, <조선 청년이여 황국 식민이 되어라>에서

"17살에 결혼했는데, 3일 만에 남편을 끌고 갔어"

강제동원 피해조사 위원회에 따르면 기존 수집된 명부 중 단일 기준 최대의 강제동원 피해자 명부는 1957∼1958년 당시 노동청이 강제동원 피해신고를 받아 작성한 <왜정시 피징용자 명부>다. 약 28만 명이 수록된 이 명부는 신고 접수 후 검증 과정을 거치지 않고 50여년간 방치되어 있었다. 2006년 6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2년 6개월에 걸쳐 2000명 이상의 시·군·구 공무원이 투입돼 전수 조사가 진행되었다. 최종적으로 11만8520명의 강제 동원 피해자를 확인했다.

강제동원 피해조사 위원회는 2005년 2월부터 2008년 6월까지 직접 피해 신고를 받아 22만8126명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 뒤에 21만9442명을 최종 피해자로 판정했다. 11만339명은 명부에서 이름을 확인했지만 10만9103명은 명부에 기록이 없어 구술과 인우보증인 조사, 문헌조사, 진상 조사를 통해 확정했다. 이 조사 이후 현재는 피해 신고를 중단한 상태다. 강제동원 피해조사 위원회가 법적으로 활동 시한을 정해놓은 정부기관이기 때문이다. 국회는 지난해 12월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개정을 통해 존속 기간을 2015년 6월 30일까지 연장했다.

이모연(87) 할머니는 결혼한 지 3일만에 남편이 규슈 탄광으로 강제동원되었다가 늑막염에 걸렸다.
 이모연(87) 할머니는 결혼한 지 3일만에 남편이 규슈 탄광으로 강제동원되었다가 늑막염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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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산1구 경로당에서 조사가 마무리 되어가던 때에 이모연(87) 할머니가 들어왔다. '일정시 피징용자 명부'에 기재된 피해자는 아니었지만 이 할머니는 2005년 5월 충청북도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 실무위원회를 통해 피해 신고를 했다. 할머니는 손에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심의·결정 통지서'가 담긴 봉투를 쥐고 있었다. 일본 이름이 가와모토(川本)인 남편 이이섭이 강제동원 피해자로 결정되었음을 알리는 2011년 3월 31일자의 통지서였다. 피해자 판정을 받기 위해 6년의 세월이 걸렸다. 통지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이섭을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26조에 의거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자로 결정함."

이 할머니의 남편 이이섭은 규슈 탄광지역으로 강제 동원되었다가 해방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탄광에서 일하다 늑막염을 얻었다. 할머니는 남편의 늑막염을 치료하기 위해 주사 놓는 방법을 배워 직접 투약을 했다. 비싼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7살에 결혼했는데, 3일 만에 남편을 끌고 갔어. 하도 가난해서 결혼사진 한 장도 없어. 해방이 되어서 돌아올 때까지 연락도 없었어. 남편 늑막염 치료하느라 말도 못하게 고생했지. 끊는 물에 주사기 소독하며 내가 주사를 놔주었지."

17세의 나이에 남편들이 강제 동원된  이옥희(87) 할머니(왼쪽), 이모연(87) 할머니(오른쪽)
▲ 어린 신부들의 기억 17세의 나이에 남편들이 강제 동원된 이옥희(87) 할머니(왼쪽), 이모연(87) 할머니(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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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시 피징용자 명부'에 담겨 있는 22만8724명에 대한 실사 작업은 내년 6월까지 진행될 예정. 하지만 최근에도 새로운 명부 등이 발견되고 있어 실사 작업의 마무리 여부는 불분명하다.

2015년이면 해방된 지 70주년. 하지만 피해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이제 다시금 강제 동원의 역사 기행을 떠나려고 한다. 이 여행은 한반도는 물론 일본의 최남단 오키나와에서 최북단 홋카이도까지 돌아보는 긴 여행이 될 것이다. 지하호, 야전병원, 탄광, 댐, 군 기지, 활주로, 철도, 군수공장 흔적 등 일본 전국에 남아 있는 전쟁 유적 속에서 조선인의 피와 땀, 그리고 죽음이 점철된 현장을 돌아볼 것이다.

이 여행은 홀로 시작하는 긴 여정이지만 묵묵히 피해자 명부 조사 작업을 벌이고 있는 연구자들, 피해자들의 진상 규명 작업에 함께 하고 있는 시민단체들의 눈부신 성과에 크게 의존하게 될 것이다. 필자의 작업은 이들 연구와 조사 작업의 성과를 현장에서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역할이 될 것이다. 이제 한걸음을 내딛었을 뿐이다.


태그:#강제동원, #피해조사, #강제동원 피해조사 위원회, #일정시 피징용자 명부, #보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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