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큰사진보기
▲  러시아 쇼트트랙 대표팀의 안현수(러시아명 빅토르 안)이 15일 러시아 소치 해안클러스터의 아이스버그 스케이팅 팰리스에서 열린 2014 소치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000ｍ 결승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뒤 손을 들며 기뻐하고 있다. 2014.2.15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토요일인 지난 15일, 소치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000미터 결승전. 신다운 선수가 4위로 들어온 뒤 실격 처리되면서 한국은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만약 이것으로 끝났다면, 노메달의 아쉬움은 예전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기대했던 메달 획득이 무산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직후의 장면이 묘한 착잡함을 불러왔다. 신다운 선수를 제치고 금메달을 딴 안현수(빅토르 안) 선수가 러시아 국기를 들고 경기장을 도는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에 나온 것이다. 한국 선수로 나왔어야 할 선수가 러시아 대표로 나와 금메달을 딴 뒤 러시아 국기를 들고 환호하는 모습이 가슴속에서 심한 착잡함을 일으켰다.

그 뒤 안현수 선수는 시상대에서 밝은 표정으로 러시아 국가를 불렀다. 이 장면을 보고 마음이 편했을 한국인은 없었을 것이다. 대한민국과 빙상연맹이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가? 이런 생각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다.

자기 백성을 외국에 빼앗기는 건, 군주의 '치욕'

이번 일은 단순히 메달의 문제가 아니다. 안현수 선수는 빙상연맹(대한빙상경기연맹) 파벌싸움의 희생자 중 하나다. 그는 한국체대파와 비한국체대파 간에 벌어진 파벌싸움의 와중에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출전권을 잃고 러시아로 귀화한 선수다.

빙상연맹과 그 상급 단체인 대한체육회는 국민체육진흥법에 의거하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인가로 설립된 사단법인이다. 빙상연맹이 대한체육회의 주관 하에 진행하는 국가대표 선발 및 운영은 대한민국 정부의 위임 하에 행하는 행위다. 대한민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빙상연맹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빙상연맹이 국가대표 선발 및 운영 과정에서 파벌싸움에 기인한 불공평 행위를 저질렀다면, 이 문제의 궁극적 책임은 대한민국 정부가 져야 한다. 따라서 안현수 문제는 단순히 체육계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자체의 문제가 된다. 이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국가를 공정하게 경영하지 못해 자국 국민을 외국에 빼앗긴 사안이다.

자기 백성을 외국에 빼앗기는 것은 옛날에는 군주의 치욕으로 간주되었다. 국민이 주권자인 오늘날의 국민국가 못지않게 왕실이 주권자인 옛날의 왕조국가에서도 백성을 빼앗기지 않고 잘 지키는 일은 군주를 평가하는 핵심 기준으로 인식됐다.

이 점은 공자·맹자뿐만 아니라 노자의 사상체계에서도 중시되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성인(聖人)은 자기 고집이 없으며 백성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는다"고 한 뒤 "성인은 백성을 갓난아이처럼 다룬다"고 했다. 백성은 갓난아이처럼 소중히 다뤄야 할 존재라고 강조한 것이다.

물론 옛날 군주들이 백성을 중시한 목적은, 백성을 농토에 투입해 국민총생산을 늘리고 세금을 많이 거두려는 데 있었다. 그런 이기적인 목적이 저변에 깔려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백성을 갓난아이처럼 소중히 생각하라는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며 국가를 경영했다. 

백성을 함부로 다루면, 언젠가 화를 당할 것이다

큰사진보기
▲  ‘수령은 백성을 위해서 있다’는 다산 정약용의 사상. 백성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강조한 문구다.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고대 국가들이 백성을 얼마나 중시했는가는 노나라의 좌구명이 쓴 <춘추> 해설서인 <춘추좌씨전>에서도 나타난다. <춘추>는 공자가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역사서다. <춘추좌씨전>에 따르면, 기원전 505년에 오나라는 초나라를 침공하면서 진나라(陳나라, 진시황제의 진나라가 아님) 군주인 회공(懷公)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그러자 회공은 대신들을 모아 파병 문제를 논의했다.

이때 봉활이란 신하가 "오나라는 복을 받지 못하고 있고 초나라는 화를 당하지 않고 있으니, 오나라의 파병 요청을 거절하십시오"라고 건의하자, 회공은 "지금 초나라가 싸움에서 밀리고 있는데, 초나라가 화를 당하지 않고 있다니 이 무슨 말이냐?"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봉활은 "나라가 잘될 때는 백성을 몸의 상처처럼 소중히 다루고, 나라가 안 될 때는 백성을 흙이나 풀처럼 가벼이 다루는 법입니다"라면서 "오나라는 백성을 함부로 다루고 초나라는 백성을 소중히 다루기 때문에, 조만간 화를 당할 쪽은 초나라가 아니라 오나라입니다"라고 말했다.

봉활의 말을 들은 회공은 오나라의 요청을 거절했고, 덕분에 초나라는 국가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백성을 소중히 다룬 쪽이 결국 승리한 것이다. 참고로, 회공과 봉활의 대화 내용은 이해하기 쉽게 편집한 내용이다. <춘추좌씨전>의 원문 문장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원문의 취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편집했다.

이민족의 귀화를 적극 추진한 고려 군주들

큰사진보기
▲  조선 정조 임금이 화성 건설 공사에 참여한 백성들에게 술을 권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품. 정조의 백성 사랑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문 근처에 있다.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백성을 소중히 다루는 것이 군주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인식됐기 때문에, 옛날 군주들은 자기 백성을 잘 다루는 것 못지않게 남의 백성을 유치하는 것에도 적극성을 보였다. 외국 백성을 자기 나라로 귀화시키는 것도 군주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활용된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국사교과서에서는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이란 문구가 있었지만, 이 표현은 2007년에 슬그머니 사라졌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말갈족 등 이민족을 거느린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에 빼앗기지 않으려면 더 이상 단일민족을 운운하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고구려는 말갈족 등을 자국의 패권 하에 두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귀화를 받아들여 다민족 국가를 이룬 나라였다. 고구려왕들 역시 자기 백성을 지키고 남의 백성을 귀화시키는 데 열성을 보였던 것이다. 

고려 군주들도 이민족의 귀화를 적극 추진했다. 그들은 거란족·여진족·몽골족 같은 유목민은 물론이고 대마도인들의 귀화도 적극 권장하고 이들에게 살 길을 마련해주었다. 이들의 귀화를 권장한 본질적 목적은 국경지대의 평화를 위해서였지만, 이 정책은 고려 군주의 성덕을 과시하는 방편으로도 활용되었다. 

조선 세조 2년 3월 28일자(양력 1456년 5월 2일자) <세조실록>에 따르면, 고려에 귀화한 유목민의 상당수는 백정 직업을 생계수단으로 삼았다. 이들이 주로 육류 도축업에 종사한 것은 이들이 본래 가축을 잘 다루는 유목민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백정을 달단(韃靼) 즉 타타르라고도 불렀다. 타타르는 몽골족을 가리키기도 하고 유목민을 가리키기도 했다. 백정을 타타르라고 부른 것은 이들이 주로 유목민 출신의 귀화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왕들은 이들의 귀화를 장려함으로써 자신이 세상 백성을 골고루 사랑하는 성군임을 과시하고자 했다.

귀화한 외국인들은 한민족 왕조의 은덕만 입은 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그 이상의 보답을 하기도 했다. 그런 사례 중 하나를, 지금은 북한 땅이 된 황해도 옹진군의 역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귀화 보내는 나라 아닌 귀화 받는 나라였던 한민족

옹진군에 화산(花山)이란 지명이 있다. 이 화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가 화산 이씨다. 화산 이씨의 족보를 뒤지다 보면, 좀 생소한 장면이 나온다. <화산 이씨 족보> 앞부분에는 시조의 영정을 찍은 사진이 있다. 그런데 이 시조는 한국인이 아니라 베트남 사람이다. 베트남 이씨 왕조의 태조인 이공온(재위 1009~1028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큰사진보기
▲  화산 이씨의 시조인 이공온의 동상. 베트남 하노이에 있다. 이공온은 고려에 귀화한 이용상의 조상이다.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중국어판	관련사진보기

몽골군이 세계를 휩쓸기 시작하던 13세기 초반이었다. 세계정세 변화와 베트남 내부 사정으로 인해 베트남에서는 이씨 왕조가 무너지고 진(陳)씨 왕조가 들어섰다. 이에 따라 해외로 망명하는 이씨 왕족들이 생겨났다. 이른바 보트 피플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 보트 피플 중 하나는, 배를 타고 지금의 옹진군(당시엔 옹진현)에 상륙한 이용상이다. 이공온의 후손인 이용상은 화산 이씨 가문에서 중(中)시조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화산 이씨 족보>에 따르면, 이용상은 베트남왕의 숙부로서 한때 실권을 행사한 인물이었다.

고려 정부에서는 이용상의 상륙을 환영하고 그를 고려인으로 귀화시켰다. <화산 이씨 족보>에 따르면, 당시 고려 임금인 고종은 "내 아들과 손자들도 훗날 저런 상황에 처한다면!"이라고 탄식하면서 이용상에게 호의를 표시했다. 고종은 이용상에게 왕자급인 화산군이란 작위를 주고 고려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이용상은 신세를 단단히 갚았다. 그 뒤 그는 옹진 땅을 침략한 몽골군을 격퇴하는 데 기여했다. 고려의 40년 대(對)몽골 항쟁에서 베트남 왕족 이용상도 한몫을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받아준 제2의 조국에 올림픽 금메달 이상의 보답을 했다.

여러 사례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한민족은 귀화를 보내는 나라가 아니라 귀화를 받는 나라였다. 그런데 이런 전통과 달리, 최근 한국에서는 한국에 귀화하기를 희망하는 외국인 못지않게 한국을 떠나고 싶어 하는 한국인도 적지 않다.

한국을 떠나고 싶어 하는 한국인들이 적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불공평성 때문이다. 파벌이나 계층을 초월한 형평성이 사회 전체에서 제대로 구현되지 않기 때문에 조국 한국에 대해 불만을 품는 한국인들이 생기는 것이다.

<논어> '계씨 편'에서는 "나라를 가진 자는 (백성이) 적음을 걱정하지 않고 공평하지 못함을 걱정한다"고 했다. 고대의 군주들은 자기 백성이 하나라도 더 늘어나기를 원했다. 그런 군주들을 향해 공자는, 백성의 숫자를 늘리는 데만 신경을 쓰지 말고 백성을 공평하게 대우하는 데 신경을 쓰라고 권유했다. 백성을 공평하게 대우하면 백성이 저절로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 것은 비단 안현수 선수만이 아니다. 안현수 선수 이상으로 불공평에 시달리고 당장에라도 한국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한국인이 한둘이 아니다. 이들의 소외감을 방치하면, 한국은 '귀화를 받던 나라'가 아닌 '귀화를 보내는 나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올림픽경기 시상대에서 밝은 표정으로 외국 국가를 부르는 우리 선수들이 더 이상은 나오지 말아야 한다. 스포츠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한국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소속감은 계속 약해지고 이것은 한국의 국력 약화로 연결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