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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99년부터 국내외에 숨겨진 근현대사의 현장에서 묻힌 역사의 진실을 찾고자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다. 중국대륙과 미주, 일본, 러시아 등 국외와 국내 항일의병지를 취재노트와 카메라를 메고 여러 차례 누빈 바 있었다. 그 역사 현장들은 거의 100년이 지난지라 대부분 그 원형이나 흔적을 찾기가 몹시 어려웠다. 여기에 '나만의 특종'이라는 제목으로 주로 역사 현장 답사 사진에 얽힌 뒷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긴다. - 기자의 말

"옛날 황해도 도화골에 사는 심청은 앞 못 보는 아비 심학규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제물이 되어 인당수에 몸을 던졌다. 그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동하여 심청은 황후로 환생했다. 황후가 된 청은 아버지를 뵙고자 날마다 맹인들을 위한 잔치를 벌이다가 마침내 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아버지 심 봉사는 딸을 만난 기쁨에 눈을 뜨게 되었다."

심청전의 줄거리다. 그런데 현대판 아들의 죽음으로 아버지가 세상 눈을 뜬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이 시대의 아름다운 부자 이야기를 되새겨 본다.

아들의 흉상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아버지 박정기 선생
 아들의 흉상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아버지 박정기 선생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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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아버지 박정기씨, 1929년생이시다. 경남 동래(지금은 부산광역시)에서 중농 집안 종손으로 태어난 그는 1954년 부산수도국에 들어간 이후, 날마다 수도 파이프나 만지면서 외곬으로 33년을 보냈다. 정년퇴임 후에는 목욕탕이나 차려 '목욕탕집 주인'으로 남은 인생을 마감하는 게 당신의 소박한 꿈이었다. 그런 그가 1987년 1월 14일, 막내아들 종철군을 잃은 뒤부터는 전혀 다른 인생길을 걷고 있다. 아들의 죽음이 평범한 소시민을 꿋꿋한 민주 투사로 아버지의 운명을 확 바꿔놓았다.

나는 2002년 연말 한 원로 시인(고은 선생)의 출판기념회에서 박정기씨와 인사를 나눴다. 곧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2003년 5월 9일에서야 이루어졌다. 마침 그날은 중간고사 날이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부지런히 창신동에 있는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약칭 유가협)를 찾았다.

이날 오후 3시, 종로구 창신동 '한울삶' 부근 한 찻집에서 만나 곧장 서울대학교로 향했다. 택시에 오른 뒤 기사에게 서울대학교로 가자고 부탁했다. 택시는 서울 역을 거쳐 남영동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곳 남영동 대공 분소는 박종철 열사가 고문치사한 장소가 아닌가?

나는 기사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사진 두 컷을 찍고 다시 택시에 올랐다. 박정기씨는 겉모습만 조금 변했을 뿐, 그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다고 했다. 오후 4시 무렵, 우리는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 인문대학 뜰에 세워진 '민주열사 박종철의 비' 앞에 도착했다. 박정기씨는 우선 비 앞에 참배객들이 두고 간 마른 꽃다발을 치운 뒤, 비 뒤에 놓인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 1991년 10월 24일 종철이를 추모하는 벗들이"라고 새겨진 돌로 가서 새들이 남긴 하얀 배설물을 닦았다.

아버지는 이런 일들을 늘 해 왔듯이 매우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마치 대학 관리인처럼 스스럼없이 했다. 그는 과묵한 전형적인 경상도 사내였다. 청소가 끝나자 아들의 흉상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순간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자식은 가슴에 묻고 산다는데….

"내가 이 비를 세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만 오면 다른 분들에게 미안해요. 서울대학교에서만 민주화운동으로 죽은 이가 여럿이나 되고, 종철이 이전에 우종원, 최우혁, 김용권, 김성수 같은 이도 지금까지 의문사로 남았는데, 우리 종철이만 이렇게 비까지 세웠으니 정말 죄송해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은 한번 죽는데,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간 사람이 얼마나 많나요. 종철이는 죽었지만, 그를 기억하는 이가 많으니 복이요, 그 복으로 내가 더 많은 자식을 얻었으니, 그 놈이 애비에게 잔뜩 복을 안겨주고 간 거지요. 여태 자식의 시신도 못 찾은 이도 얼마나 많습니까?"

득도한 스님 같은 말씀이었다. 마침 가까운 등나무 아래 나무의자가 있기에 나란히 앉았다.

아들의 비석에 묻은 새들의 배설물을 닦는 아버지
 아들의 비석에 묻은 새들의 배설물을 닦는 아버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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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의 그날

"이 일대를 그놈이 얼마나 쏘다녔겠어요. 아주 바지런한 놈이었거든요. 아직도 어디선가 '아부지'하고 그 놈이 달려들 것 같은 착각에 빠져요."

- 그날(1987. 1. 14.) 얘기를 들려주세요.
"그날도 예삿날처럼 공사 현장에 있었는데, 본청 총무과장이 오후 7시에 다방에서 좀 보자고 해요. 약속시간 다방으로 갔더니 네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인상도 험악하고 순간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어요. 직감적으로 찬 기운이 확 돌더군요.

두 사람은 부산사람이었고, 두 사람은 서울에서 내려온 사람이었어요. 부산사람(안기부 요원과 운전기사)은 바람처럼 사라지고, 남은 두 사람이 대뜸 위압적으로 "서울에서 왔소. 곧장 서울로 갑시다" 하는 데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군요. 어떻게나 그들 서슬이 무서웠던지 '내가 왜 서울에 가야 하느냐?'는 반문도 못하고, "집에 가서 옷이라도 갈아입고 갑시다"고 하니 마지못해 응해 주더군요. 집에 가자 아내와 은숙(종철 누나)이가 "종철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라고 묻더군요.

"내, 서울 가서 알아보고 전화하마"라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왔어요. 서울 행 밤 열차를 타고 올라오면서 별별 생각이 다 들어서 그들에게 몇 번이나 "무슨 일이냐"고 물었으나 "가 보면 알 겁니다"는 퉁명스런 한 마디 뿐이었어요.

새벽녘 서울 역에 도착하자 새까만 양복을 입은 네댓 덩치들이 마중을 나왔어요. 그 분위기가 너무 살벌해서 '아차'하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들은 나를 어디론가 데리고 갔어요(나중에야 그곳이 남영동 대공 분실이라는 걸 알았다). 나는 한사코 종철이를 먼저 보여 달라고 했어요. 그러나 그들은 내 말은 들은 체도 않고 목욕탕으로 데리고 간 뒤 밤차를 타고 왔으니 몸이나 닦자는 거예요. 대충 몸을 닦고 나오자 그들은 해장국밥을 시켜주고는 다시 (남영동 대공 분실) 가건물 2층에서 기다리게 하대요. 무작정 기다리고 있으니 바짝 조바심이 났어요. 그래서 "우리 종철이나 보여주시오"라고 그들에게 애원했어요.

그러자 그들은 번갈아 내가 있는 방을 드나들면서 "마음을 크게 먹으세요"하면서 계속 나에게 엉뚱한 질문(주로 내 과거 전력이나 집안의 사상문제 여부 등)을 했어요. 그래서 내가 짜증을 내면서 "이 사람들 와이라나. 종철이나 빨리 보여줘요"라고 했으나 여전히 딴 청만 하는 게예요.

나는 점차 불길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마침내 그들이 나를 다른 사무실로 데려 가대요. 실내는 책상에 세 개 있었고, 덩치 좋은 형사들이 빙 둘러 서 있었어요. 자신을 박원택 계장이라고 소개한 자가 사건의 말문을 열었어요."

아들의 흉상 앞에 나란히 선 아버지
 아들의 흉상 앞에 나란히 선 아버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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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더라

"한 다부지게 생긴 자(나중에 알고 보니 조한경)가 "자기는 그동안 하나님을 믿는 종교인으로 살아왔고, 국가에 충성해 왔다. 경찰이 수사를 하다보면 피의자에게 위협을 주는 일도 있는데, 아드님을 조사할 때 발을 구르면서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습니다"고 하더군요. 그러고는 "(종철이가) 술을 많이 마셨는지, 밥을 줘도 안 먹고 물만 많이 먹더라"고 하면서, 저네들에게 유리한 말만 잔뜩 늘어놓는 거예요.

마침 종철이 형과 내 삼촌이 왔기에 그 자리에서 한 번 사건의 시말을 재연해 보라고 하니까 박원택이 지시하고 조한경이가 재연하대요. 그래서 실장실에 가서 똑같이 재연해 보라니까 대공 분실장 전수린 앞에서도 똑같이 합디다. 그것이 치안국장 강민창이가 발표한 그대로예요. 하지만 그때 그 발표를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요. 멀쩡한 젊은 놈이 책상을 치자 죽는다는 건 소도 웃을 일이지요. 그날 오후 네 시경에야 경찰병원 영안실에 있는 종철이의 시신을 봤습니다. 그새 부산 가족들도 비행기를 타고 와서 같이 봤지요, 종철이는 온몸이 이미 굳어 있었어요.

그때 제 집사람이 아들의 시신을 보더니 그 자리에서 쓰러지더군요. 그들의 작전이 맞아떨어진 거지요. 그 순간 나는 남은 가족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더군요. 이런 와중에 저들은 나에게 거의 강제로 도장을 받아가 부검을 했어요. 처음 시신을 검진한 분이 중앙대 의대교수 오연상 박사였고, 부검한 분은 고려대 법의학 교수 황적준 박사였어요. 입회검사 안상수, 지휘 검사는 최환씨였고요.

다음날 벽제 화장장으로 갔지요. 영구차에서 종철이의 시신을 담은 관이 내려지자 아내가 또 기절했습니다. 그러자 경찰은 대기시켜 놓은 앰뷸런스에 아내와 은숙이를 싣고 갔어요. 나는 아들의 화장에 합의해 준 일이 없었어요. 그때 나는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또 다른 불상사가 날까 봐 저들에게 끌려 다니기만 했어요. 아들의 뼛가루를 가지고 임진강으로 갔습니다. 거기 샛강에다 뼛가루를 뿌렸어요. 그날은 강물도 얼지 않았고 비까지 뿌렸습니다. 그날의 내 모습을 한 신문기자가 단 한 마디로 요약했습니다.

남영동 대공 분실
 남영동 대공 분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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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쉽게 용서해 버리면 고문을 근절시키지 못함

- 그때 고문 경찰관은 어떻게 되었나요?
"조한경 10년, 강진규 8년, 황정웅과 반금곤은 5년, 6년을 실형 받았고, 이정호는 3년을 받았지만 모두 형량대로 다 살지 않고 가석방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지휘선에 있었던 강민창 치안본부장, 박처원, 유정방, 박원택 등도 여태 잘 살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자기네 사람은 철저하게 감싸더라고요. 일제 때 독립군을 고문한 경찰이 해방 후에도 잘 사는 거나 마찬가지지요."

- 그들을 용서할 생각은 없습니까?
"나도 용서란 말이 좋은 줄은 잘 압니다. 한때는 '저들은 하수인이다'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저들의 변하지 않는 오만한 태도를 보면 도저히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독하게 마음을 먹어요. 저들은 아직도 자기들의 잘못을 모르고 있어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하다가 생긴 실수라고 가볍게 여겨요. 그런 자에게 '좋은 게 좋다' 식으로 용서해 버리면 이 땅에 고문을 근절시키지 못하고 부당한 권력은 계속 이어갑니다.

나는 현재 '유가협'을 이끌고 가는 사람입니다. 강하게 마음을 먹지 않으면 거대한 권력과 맞서 싸울 수 없습니다. 그들은 국가 공권력에다가 막대한 자금으로 회유하고 협박 공갈을 일삼아 왔어요. 정말 그동안 학생 하나 죽거나 실종시키는 일에 그들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의문사의 진상을 밝히지 못한 사건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늘 힘없는 백성만 당해 왔지요. 그래서 늘 흐려지는 내 마음을 추스르면서 스스로 독해지려고 애썼지요."

- 제가 보기에는 박종철 열사는 그래도 인복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분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억울한 죽음으로 끝날 뻔했지요. 먼저 시신을 검안했던 중앙대 부속 병원의 오연상 박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종철이가 숨을 거둔 후 불려갔던 그분이 입을 다물었다면 일이 커지지 않았을 겁니다. 또 당시 부검에 입회했던 안상수 검사의 용기도 높이 살 만합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그분은 검찰복까지 벗었지요. 그리고 당시 전민련 상임의장 이부영씨의 역할도 컸습니다.

영등포 교도소에 갇힌 몸으로 범인이 축소되었다는 것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그분의 용기 덕분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교도소에서 나온 그분의 쪽지를 그해 5월 18일 미사에서 밝혀 5공 정권의 부도덕성을 백일하에 입증했지요. 목숨을 돌보지 않고 진실을 밝혔던 김승훈 신부님도 용기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쪽지를 전달한 교도관, 황인철, 김광일 변호사 그밖에 내 일처럼 앞장섰던 수많은 애국 시민들…. 정말 그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아들로 세상 눈이 뜬 민주투사 아버지 박정기 선생
 아들로 세상 눈이 뜬 민주투사 아버지 박정기 선생
ⓒ 박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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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아비 눈을 뜨게 했지요

- 아들 때문에 아버지의 인생길이 바뀐 셈입니다. 아들을 원망해 보지 않았습니까?
"내 소원은 퇴직 후 목욕탕 사장으로 손자들 재롱 속에 내 인생을 마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들을 잃고 내 눈이 떠졌습니다. 종철이가 죽고 난 뒤 곧 정년퇴임을 하게 되었고, 그 뒤 유가협에 참석하게 됐지요. 여기 와서 세상 돌아가는 걸 보니까 내 아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몇 해 전 강경대 사건 때는 재판 방청 중에 법정 소란으로 석 달 남짓 교도소 생활도 했지요. 이 모두가 아들 때문이지만 한 번도 그놈을 원망해 보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그놈이 내 눈을 띄워준 효자지요.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산다는 데 죽는 날까지 내 힘자라는 데까지 지가 바라던 세상이 오도록 투쟁의 대열에 앞장 설 겁니다."

- 아들이 바라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자주', '민주', '통일' 이 세 말입니다. 사실 해방 후 모든 문제는 조국 분단에서 시작했습니다. 이 분단 문제 해결은 사회 갈등의 시작이요, 끝입니다. 분단 극복이 쉽지 않은 줄 압니다. 하지만 남북이 인내하면서 서로 끊임없이 교류하고, 정부 간뿐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도 교류가 더 잦아져야 합니다."

박종철 그는 누구인가
1965년 4월 1일, 부산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시절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1984년 3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에 입학하여 학생운동을 했으며, 1986년 4월 11일 청계피복노조가 주도한 가두 시위 도중 연행, 구속되어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선배 박종운의 거처를 추궁 받으며 경찰에게 고문을 당하던 중, 대의와 신의를 지키며 생을 마쳤다. 그의 거룩한 죽음이 그해 6월 항쟁의 기폭제로 민주화의 큰 물길을 돌린 계기가 되었다. / 박종철 평전에서 발췌  

고 박종철 열사
 고 박종철 열사
ⓒ 박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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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박정기, #박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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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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