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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드렁한 일상을 보내던 시골의 한 처녀의 눈에 낯선 남자가 들어온다. 그런데 남자는 그녀가 일하는 식당에서 누구도 하지 않았던, '책읽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책 제목은 '안나카레리나'다. 그녀는 그 책 읽는, 도시에서 온 남자가 이 촌구석으로부터 자신을 빼내 줄 유일한 구원자인줄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린다.

그녀의 이름은 '테레사'고, 그의 이름은 '토마스'다. 체코의 소설가, '밀란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옮김, 민음사>은 이렇게 시작된다. 일단, 좀 더 소설 속으로 들어가보자.

가벼움과 무거움, 영혼과 육체, 이해받지 못한 말들, 영혼과 육체, 가벼움과 무거움, 대장정, 카레닌의 미소 등 소설은 모두 7부로 구성되어 있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표지 가벼움과 무거움, 영혼과 육체, 이해받지 못한 말들, 영혼과 육체, 가벼움과 무거움, 대장정, 카레닌의 미소 등 소설은 모두 7부로 구성되어 있다.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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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에 흘러 떠내려가던 '양초를 바른 갈대바구니에 담긴 아기(테레사)'는 토마스의 침대끄트머리에 불시착하고 말았다."

어떤 몇 개의 우연들, 즉 프라하의 외과의사 중 한 명은 테레사가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는 시골에 수술을 하기 위해 가야 했는데 가기로 결정되어 있던 과장이 좌골신경통으로 꼼짝 못하게 되자 토마스가 대신 가게 된 것을 시작으로, 식당들 중 하필이면 테레사가 일하는 식당에 들른 것,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은 것, 주지 않아도 될 명함을 테레사에게 주고 떠난 것들이 토마스와 테레사의 운명적인 만남을 결정하고 있다.

몇 주 후 언제라도 촌구석을 탈출해야 했던 테레사는 운명처럼 겨드랑이에 '안나카레리나'를 끼운 채, 토마스의 집 문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렇게 토마스와 테레사는 좇고 쫓기는 관계가 된다.

주인공들 각자의 가벼움과 무거움

토마스는 테레사를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방법은 테레사와 사뭇 다르다. 왜냐하면, 토마스는 사랑과 섹스를 별개로 하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마치 취미생활처럼 편협한 독신의 자유, 즉 다양한 파트너와의 정사를 즐기며 자신의 존재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이다. 이것을 테레사는 이해할 수 없다. 이성간의 육체적 사랑을 가볍게 여기는 토마스에 비해, 테레사는 최대한 진지하게 모든 것을 걸고 최대한 무겁게 삶의 일부로 토마스와의 사랑을 갈망한다.

저자는 촌구석에 살았어도 도서관의 책을 모두 읽어버린 테레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도권 교육을 받은 왠 만한 지식인들보다 뛰어난 지식과 직관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그녀는 토마스의 정부이자 친구이기도 한 사비나의 도움으로 사진기자가 된다. 이 즈음 테레사의 강력하지만 언제고 폭발할 것만 같은 직접적인 토마스에 대한 사랑과 사비나의 경쾌하고 탐미적인 섹스 파트너로서의 토마스에 대한 사랑은 무거움과 가벼움의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소설의 배경을 보자. 2차 세계대전 후 서유럽과의 공존을 추구하던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는 약간의 여유도 용납하지 않는 소련의 전체주의적 공산주의에 점령당한다. 많은 지식인들이 프라하에 남아서 체제에 순응하던가 망명해야 하는 시기가 소설의 시공간적 배경으로 깔려 있다.

토마스의 여성편력은 테레사에 의해 저지당하고, 테레사의 진지함은 토마스에 의해 조롱당한다.  둡체크의 이른바 '프라하의 봄'이 소련의 침공으로 종언을 고하게 되는 시점에 테레사는 토마스와 스위스로 떠나게 된다. 강과 새의 도시 취리히에서도 테레사는 토마스의 여성편력에 고통스럽다. 토마스를 떠나 다시 프라하를 찾는 테레사, 그녀를 좇는 토마스.

한편 제네바로 떠난 사비나는 유부남 프란츠를 만나게 된다. 8개월간의 만남은 사비나에겐 여전히가벼웠으나 프란츠에게는 의미를 부여하기에 충분했다. 아내와 결별을 선언하고 돌아온 프란츠에게, 배반으로 응답하는 사비나. 그녀에게 구속과 억압은 그대로 죽음으로 가는 열차 행 티켓인데, 프란츠의 선택은 구속과 억압, 즉 체코를 점령한 소련의 침공으로 설명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사비나를 욕할 새도 없다. 프란츠는 사비나로 인해 자유를 찾고 곧 젊은 여자친구를 얻게 된다. 살면서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자유를 만끽하게 된 것이다.

지식인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프라하를 다시 찾은 토마스는,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킨 체코의 위정자들을 경멸한다. 그 체코의 위정자들이, 실은 소련비밀경찰과 정부에 속아서 저지른 잘못이라고 변명한들 그들이 결백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토마스는 이런 자신의 견해를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범한 것을 당시엔 비록 알지 못했지만, 스스로 결백하다고 느끼지 못했기에 자신의 눈을 찌르고 떠난 비극에 빗대어 주간지에 투고한다. 소련과 체코의 위정자들의 전체주의에 반기를 든 것이다.

토마스는 장래가 촉망되는 유능한 의사다. 토마스의 삶이 테레사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온전히 그의 선택으로 여겨지는 것은,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태도에 있다. 그가 잡지사에 소련의 전체주의적 사회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게재한 것이 테레사 때문은 아닐 것이다. 가능한 많은 여자와의 육체적 관계를 가볍게 여기는 토마스가 체제 비판적인 글을 투고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토마스의 정치적 견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토마스가 테레사에게 섹스와 사랑의 차이를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에서 실소를 금할 길이 없었는데, 그것은 어쩌면 많은 여성들과의 자유연애가 사회구성원들의 다양한 측면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존중하는 것이라면, 즉 자유와 인권의 문제라면, 육체적으로 테레사에게만 집중해야 하는 것, 다시 말해 테레사를 사랑하지만 테레사하고만 섹스가 허용되는 것은 토마스의 자유와 다양한 취향에 위배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억지스러운 비유로 인정하지만, 이 비유에 최대한 관용을 베풀어 보자. 그렇다면 토마스는 자유와 억압의 갈래를 자유연애와 독점연애로 이분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소설을 읽다가 이 지점에서 최근 채동욱 전검찰총장의 혼외자식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혼외자식 문제는 그야말로 개인적인 문제다. 그러니 당연히 개인적으로 해결됐어야 할 문제다. 국정원 선거개입사건을 수사하기 위해서는 내연녀가 없어야 하고 혼외자식도 없어야 한다는 논리는 어불성설이다.

프랑스의 올랑드는 재임 중에 아내를 갈아치웠는데도 멀쩡하다. 여기에 그의 어정쩡한 정치적 입지에 빗대어 개인의 삶을 조롱하는 일은 없다. 자유와 인권은 아주 사소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일수록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더군다나 채 전총장의 혼외자식문제를 밝히는 중에 불거진 불법 혹은 탈법적인 과정은 전혀 수사가 진전되고 있지 않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전체주의적인 사고방식이 팽배해진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프라하의 봄'이 소련에 의해 진압된 것은 반세기 전의 일이니 말이다. 그 소련은 지금 어찌 되었는가.

완전한 사랑

사랑, 완전할 수 없다. 항상 미완의 테마다. 그래서 예술로서의 사랑은 결혼이 아니라 죽음으로 완성될 수 밖에 없다. 이 소설 속에는 그 사랑의 과정에 개 '카레닌'이 있다. 신에 의해 권리를 부여 받은 인간은 동물을 죽이거나 살릴 수 있게 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동물 중 하나인 개가 인간의 삶에 깊이 개입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와 방법을 찾게 해주는 매개로 등장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프라하로 돌아가 문제의 글을 투고한 토마스는 결국, 의사이기를 포기하고 청소부 일을 하게 된다. 청소부 일을 하면서도 그의 여성편력은 쉬지 않는다. 의사로서의 삶에서 청소부의 삶으로 사회적 위계가 격하되었지만 토마스는 개의치 않는다. '바구니에 실려 떠내려온 아기' 테레사와 함께 사는 삶을 운명으로 여기고 있으니 말이다. 테레사를 떠날 수 없고 여성편력도 멈출 수 없는 토마스에게 삶은 쾌락도 아니고 구도(求道)도 아니다. 아니 쾌락이기도 하고 구도이기도 하다.

서로의 삶을 존중하며 개 '카레닌'을 사이에 두고 이어진 둘의 삶은 곧 피폐해진다. 농촌으로 파고들게 되는 이유다. 카레닌의 죽음을 통해, 토마스와 테레사는 비로서 서로를 완전하게 마주 볼 수 있게 된다. 사랑을 이유로 서로에게 목적이 되었다가 걸림돌이 되기도 했던 둘에게 완전한 사랑이 찾아온 순간이다. 존재가 가벼워지지도 무거워지지도 않도록 끊임없이 자기만의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 삶을, 다시 더욱 깊이 탐구하기를 바라는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민음사(2009)


태그:#프라하의 봄, #밀란쿤데라, #토마스, #테레사, #사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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