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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이 되면 독립운동이 떠오른다. 1919년 2월 8일 재일 조선유학생들의 독립선언이 일본의 중심 도쿄에서 일어났다. 재일 조선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은 역사적인 3·1운동으로 이어져 우리 민족이 독립민족, 독립국가임을 전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조선청년독립단'의 조선유학생을 변호한 변호사가 있었다. 그 변호사는 다른 변호사와 달리 피고인들이 잘못했으니 선처해 달라는 변호를 하지 않았다. 그는 법정에서 조선인의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일본의 식민주의를 고발했다.

그런데 그 변호사는 일본인이었다. 그가 바로 조선인들이 자랑스럽게 '조선인의 벗','우리의 변호사'라고 불렀던 후세 다쓰지이다. 조선의 독립운동을 생각하면, 피압박 민중의 해방을 생각하면, 그리고 변호사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면 그의 이름이 떠오른다.

일본의 식민주의 공격하고 조선의 독립운동을 옹호

후세 다쓰지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그가 2004년 10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은 뒤부터다.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이었다. 1879년 출생한 후세 변호사의 공적사항은 조선청년독립단 사건 변호 이외에도 1923년 국내 강연회를 통한 조선인 차별 철폐 주장, 1923년 박열의 일본 황태자 암살기도 사건 변론, 1923년 의열단원 김지섭 지사 변론, 1924년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의 유언비어 유포 항의 등이 있다. 그 외에도 그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상대로 나주지역 농민의 510만평에 이르는 토지반환소송을 제기하여 조선 농민들의 권리 옹호에도 앞장섰다.

하지만 그의 변호사 활동은 1930년대 들어서면서 중단된다. 일본 정부는 1932년 그를 징계재판에 회부하면서 변호사 자격을 박탈하고 다음 해에는 신문지법 위반으로 금고 3개월에 처한다. 이후 1939년 일본 제국주의의 가장 악랄한 법이었던 치안유지법에 의하여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아예 변호사 등록이 말소되게 된다. 치안유지법에 의하여 탄압을 받은 피압박 민중을 위하여 변호하였던 변호사가 바로 그 치안유지법에 의하여 탄압을 받게 된 것이다.

변호사 자격이 박탈된 것은 우리의 국보급 변호사인 한승헌 변호사를 생각나게 한다. 치안유지법은 그의 아들의 생명도 빼앗아 갔다. 그의 아들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조사를 받다가 옥사했다. 일제 패망후 그는 다시 변호사 활동을 하게 되는데 '조선건국 헌법초안'을 저술하고 조선인을 변호하는 등 피압박 조선민중들을 위해 살다가 1953년 9월 13일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하여"

후세 변호사를 보는 우리의 시선은 조선의 독립을 옹호하고 일본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공격한 점에 초점이 있다. 하지만 후세 변호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의 독립운동, 민중운동을 지원했고 일본의 무산계급,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변호와 인권옹호 활동에 매진했다.

그는 일본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일본 사회주의자들을 변호했고, 수해이재민의 구원활동 등을 통하여 일본 내 약자를 위해서 힘써 투쟁했다.  판검사 등용시험에 합격했으면서도 법관이 아니라 변호사의 길을 걸었고 스스로 '민중의 변호사'라고 칭했다. 그는 '일본 무산계급의 맹장'으로 소문이 났으며 일본 정부로부터는 '적색변호사, 좌익변호사'로 불렸다.

이처럼 그는 당시 조선인만이 아니라 대만의 민중 등 피압박 식민지 민중과 일본내 사회적 약자를 위해 변호사직을 상실하면서까지 투쟁했다. 그는 한 국가의 틀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가 일본이라는 출신국가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인도 조선인도 대만인도 모두 인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자유와 인권, 평등과 평화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가 조선의 독립운동에 깊은 공감을 느낀 것은 바로 세계의 자유와 인권, 평등과 평화가 조선에 집중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문제는 결코 조선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조선은 세계평화와 혼란을 좌우하는 문제이다. 전세계의 문제이며 전인류의 문제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식민지 조선의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조선의 독립만이 아니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을 쏜 사실을 연상시킨다. 대사상가의 생각은 어찌 이렇게도 같을까?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하여' 이것은 그의 묘비명이다. 그의 삶과 철학을 가장 압축적으로 잘 보여준다. 그는 일본의 양심이었을 뿐 아니라 식민지 조선과 대만의 벗이었다. 일본 민중의 변호사이면서 조선인과 대만인의 변호사였다. 진정한 국제주의자였고 진정한 인본주의자였다.

한국과 일본, 동아시아가 가져야 하는 공동의 기억이 있다

한국과 북한, 일본, 중국, 대만이 있는 동아시아는 국제정치와 경제에서 이미 중요한 지역이다. 수많은 사람과 물자가 오간다.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국이나 유럽연합에 뒤지지 않는다. 동아시아는 서로 의존하고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발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긴장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영토분쟁이 더 격화되고 있다. 방공식별구역 설치로 물리적 충돌가능성까지 거론된다.

뿌리는 과거 동아시아에서 발생했던 전쟁과 식민, 내전과 국가폭력이다. 한 나라 차원에서나 동아시아 전체 차원에서 과거사가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는 과거에 대하여 너무나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개관식 때 일본 정부가 보여준 반응은 안중근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에 대한 기억이 일본과 한국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동아시아에서는 과거에 대한 공통의 기억이 없다. 특히 동아시아의 미래를 보여줄 공통의 기억이 없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미래가치는 자유와 인권, 평등과 평화일 수밖에 없다. 동아시아는 이미 전쟁과 식민, 내전과 국가폭력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 길이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을 대신할 만한 가치는 오로지 인류 공통의 가치인 자유와 인권, 평등과 평화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치를 제시하고 실천한 동아시아 공통의 대사상가, 대실천가를 찾아 그에 대한 기억을 공동으로 가져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대사상가, 대실천가를 변호사 중에서 찾는다면 그 첫 번째는 당연히 후세 변호사일 것이다. 독립운동을 생각하면서 독립운동에 그치지 않고 동아시아의 자유와 인권, 평등과 평화를 위해 싸웠던 진정한 변호사, 진정한 국제주의자, 후세 변호사를 추모한다.

덧붙이는 글 | * 이 칼럼은 한국미래발전연구원 홈페이지(www.futurekorea.org)에 동시 게재합니다.
* 김인회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사법위원장, 참여정부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 등을 지냈으며 <문재인 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한다>(2011) 등의 저서를 냈습니다.



태그:#변호사, #후세 다쓰지, #김인회,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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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래발전연구원(http://www.futurekorea.org/)은 민주주의와 한국사회의 지속가능 발전을 위한 진보적 정책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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