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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만에 다시 돌아온 탄광촌 사북에는 석탄이 더 이상 생산되지 않았다. 탄광 노동자들 월급날이면 흥청대던 읍내에는 전당포가 대신 흥청댄다. 1990년 '폐광지역 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메인카지노가 들어서면서 변한 모습이다.

하지만 아직도 사북, 고한 일대에는 탄광촌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사북의 동원탄좌, 고한의 삼척탄좌의 각종 시설과 자료들이 그대로 있고, 탄광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머물러 살았던 광업소 사택도 있다. 물론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빈집이다. 석탄을 캐는 과정에서 함께 나온 폐석인 경석이 거대한 산이 되어 남아 있고, 광산 노동 과정에서 진규폐에 걸린 이들의 힘겨운 삶도 있다.

사북 동원탄좌 수갱 - 지하 수백 미터 막장에서 캔 석탄을 수직으로 끌어 올리던 탄광 엘리베이터
 사북 동원탄좌 수갱 - 지하 수백 미터 막장에서 캔 석탄을 수직으로 끌어 올리던 탄광 엘리베이터
ⓒ 이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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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석탄' 하면 가정용 난방 연료로서의 연탄의 재료를 떠올리지만,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우리 경제 성장의 과정에서 석탄은 가장 핵심적인 에너지원이었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파동으로 국제 유가가 급등하면서 정부는 석유를 대체할 수 있는 에너지 자원으로 석탄 개발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그 결과 사북과 고한 등 강원지역 탄광 지역은 석탄 생산 중심지로 성장하면서 전국에서 모여든 수많은 탄광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다.

석탄 생산 전성기 탄광 노동자들의 삶

1970년대 이후 석탄 산업이 전성기를 누리면서 탄광지역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이에 따른 주택난이 심각했다. 폭발적으로 늘어난 탄광 노동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사택이 지어졌지만 빠른 시일 내에 날림으로 지어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사북 동원탄좌 석탄유물 전시관
 사북 동원탄좌 석탄유물 전시관
ⓒ 이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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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800미터의 지장산 중턱에 자리잡은 사북광업소 광부사택은 외부인들의 발길이 좀처럼 닿지 않는 이방지대다. 160동의 연립주택에 760가구 3000여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마을 입구에는 "아빠, 오늘도 안전!"이라는 표어가 붙어 있어 이들의 실생활을 한 마디로 대변하고 있다. 산비탈에 옹기종기 서 있는 연립주택은 무척 낡아 있었고 …(중략)… 한 가구가 방 2개 부엌 1개(8평)으로 구조가 똑같으나 수리를 하지 않아 벽과 천장이 허물어져 물이 새는 집이 많다. 화장실도 5~6개 동에 1개 꼴로 30가구가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수도도 비슷하게 설치돼 있으나 겨울철이면 물이 나오지 않아 개울물을 식수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북청년회의소 편 <탄광촌의 삶과 애환 중에서>)

한 세대가 사는 7평 내외의 집 5~6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광부 사택을 사람들은 닭장이라 불렀다. 그나마 이런 집도 없어 6개월에서 1년을 기다려야 입주할 차례가 왔다.

사북 동원탄좌 석탄유물 전시관
 사북 동원탄좌 석탄유물 전시관
ⓒ 이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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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 노동자들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빈번하게 발생하는 광산 사고였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막장에서 목숨을 걸고 일을 했던 탄광 노동자들은 막장을 나와 장화를 씻고 나서야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탄광촌 사람들은 앰뷸런스 소리에 치를 떨었다.  막장에서 일하던 가족이 병원으로 실려 가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안전모 색깔은 차별의 상징

1970년대 석탄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정부나 언론에서는 광부라는 말 대신 '산업 전사'라 불렀다. 지하 1000m 이상 내려가서 섭씨 30도가 넘는 비좁은 막장에서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드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석탄 채굴을 했던 그들의 수고에 비하면 산업 전사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호칭이다. 하지만 지하 막장을 인생 막장인 것처럼 탄광 노동자들을 낮추어 보던 시선에 비하면 그나마 조금은 나았다고나 할까. 

사북 동원탄좌 석탄유물전시관 입구
 사북 동원탄좌 석탄유물전시관 입구
ⓒ 이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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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전사이라 불렸던 탄광 노동자들에게는 대통령 하사품도 내려왔다. 사북 동원탄좌 자리에 전시된 석탄 유물들 중에는 대통령 하사품도 전시되어 있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버스 안내양들에게 외투를 하사했다는 뉴스를 들었던 기억으로 미루어보면  탄광 노동자들에게만 특별히 주어진 혜택은 아니지 싶다.

추상적인 산업 전사라는 명칭과 다분히 정치적 의미가 담긴 대통령 하사품이 아닌 실제적인 상황에서 탄광 노동자들은 어떤 대우를 받았을까.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탄광 갱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쓰는 안전모는 탄광 노동자들이 쓰는 노란색, 관리직들이 쓰는 흰색, 외부 시찰단이 쓰는 청색 등으로 구분되었다. 위계질서를 명확히 구분한 것이다. 탄광 노동자들은 흰색 안전모를 쓴 관리직을 "빽바가지"라 부르며 비아냥거렸고, 정치인들이 대부분인 청색 안전모를 쓴 사람들을 만나면 "안전!"이란 구호를 외치며 거수경례를 붙여야 했다.

고한 삼탄아트마인 전시 사진, 청색 안전모를 쓴 국회의원들과 흰색 안전모를 쓴 관리직이 구분된다.
 고한 삼탄아트마인 전시 사진, 청색 안전모를 쓴 국회의원들과 흰색 안전모를 쓴 관리직이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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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모 색깔을 통한 위계질서 확립과 차별은 탄광 노동자들의 커다란 불만 중의 하나였다. 탄광 노동자들의 파업 요구 중에 안전모 색깔에 따른 차별 철폐도 빈번하게 등장했다. 이러한 차별은 1987년 6월항쟁과 같은 해 7~9월의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겨우 없어졌다.  

고한 삼탄아트마인 전시 사진, 노태우 대통령도 주변 사람들도 모두 흰색 안전모를 쓰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집권했다.
 고한 삼탄아트마인 전시 사진, 노태우 대통령도 주변 사람들도 모두 흰색 안전모를 쓰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 집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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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갱 속에 들어가 석탄가루 뒤집어쓰며 일을 하고 나오는 광부들은 온몸에 석탄가루를 뒤집어 쓴 상태였다. 당연히 일을 끝낸 후 몸을 씻을 시설이 필요했다. 하지만 산업 전사라 우대(?)받던 1970년대 광업소 내에 탄광 노동자들이 씻을 수 있는 시설이 없었다. 각자 집에 가서 해결해야 했다. 탄광 노동자들을 위한 샤워 시설은 1980년 사북 항쟁 이후에 겨우 만들어졌다.
 
1970년대 '한강의 기적'의 원동력이 되었던 석탄의 역사란, 산업 역군라 불리면서도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했던 탄광 노동자들의 탄광 노동자들이 살아온 역사를 의미한다. 사북, 고한, 함백 등의 폐광 지역에는 탄광 노동자들의 삶과 자취가 진하게 남아 전해지고 있다.


태그:#탄광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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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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