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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큼한 과일향기가 날 정도로 맑고 신선한 거리가 인상적이다. 남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에 걸맞게 야자수나무가 길거리를 메운다.
▲ 세르비아의 길거리 상큼한 과일향기가 날 정도로 맑고 신선한 거리가 인상적이다. 남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에 걸맞게 야자수나무가 길거리를 메운다.
ⓒ 김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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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마드리드 아토차 중앙역의 아침은 아침을 준비하는 사람들과 출근을 위한 직장인들로 붐빈다. 견고하고 웅장하기보다는 아담한 형태로 갖추어진 모습이 유럽의 작은 공항을 연상케 한다.

에스컬레이트를 내리면 수십 대의 열차가 대기하고 세빌리아행 renfe ave 2080호가 한국과 같이 여 승무원의 일렬 대기로 승객을 기다리고 있다. KTX 유형의 고속열차는 산뜻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실내를 장식하고 있다. 어딘지 깔끔한 품위가 묻어나는 유럽인들의 미적 감각이 베어있다.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이 흘러나오고 음악 해설이 함께한다. 승객들은 속삭이듯이 대화를 나누고 합석의 좌석에는 나를 포함해 모두가 노트북을 펼치고 무엇인가를 검색하고 메일링을 하고 있다.

여행은 이동 경로의 과정이다. 만나고 느끼고 그리고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다른 문화와 환경 속에 짧은 시간이나마 같은 일원이 되어 합석하고 있다는 것이 신선한 만남으로 이어진다. 앞좌석의 동행인 듯 한 이들은 전형적인 스페인 여인같이 눈이 깊고 매혹적인 모습이다.

광활한 들판이 차창 밖으로 펼쳐진다. 넓게 펼처진 광야라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같다. 영국 남부의 아담하고 윤기있는 고즈넉한 평야와는 달리 이곳은 왠지 척박한 토양일 듯 한 느낌을 갖게 한다. 금방이라도 비가 오고 안개가 끼고 그리고 햇살이 드리우는 종잡을 수 없는 날씨가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것을 본다. 아침햇살을 머금은 구름이 엷은 색종이와도 같이 투사된 모습으로 찬란하다.

유럽은 평지의 국가이다. 완만한 시대적 변화과정이  이러한 면에서 연유한 것이나 아닐지... 그러한 생각이 든다. 문득 한국이 생각난다.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그리고 우리들의 국내생활이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압축적으로 순환의 주기가 짧고 빠르다.

그만큼 변화의 과정이나 속도 그리고 폭도 자연히 커질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국가는 항상 주변국들의 논의의 주제로 등장하고 국토는 분단과 함께 좁고 작다. 인구밀도가 높다는 것은 거주자의 생활의 범주나 사고의 폭이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국제화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유연하고 폭넓게 수용하는 것이 해답일지도 모른다.

햇살이 멀리 고지에만 잠긴다. 마치 빛나는 보석같이 오뚝 솟아있다. 추억이라도 담고 있을 것 같은 아련한 거리감이 왠지 쓸쓸하다. 그 아래로는 풍력 발전기의 팔랑개비가 하이얀 속살을 드러낸 채 힘겹게 돌아가고 있다. 여린 몸짓 그리고 움직임이 정지된 들판에서 홀로이 외롭게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 하다.  

이전의 담배공장이었던 세비아 대학. 학내의 건축물이 마치 박물관 같이 고색창연하고 웅장하다.
▲ 세비아 대학 이전의 담배공장이었던 세비아 대학. 학내의 건축물이 마치 박물관 같이 고색창연하고 웅장하다.
ⓒ 김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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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아는 맑은 향수 냄새를 풍긴다. 어딘지 해변의 신선함과 차가운 맑음이 있는 도시 같다. 이러한 세비아에 대한 첫인상은 아마도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가지는 자연스러운 것인 것 같다. 수십 년전 그리스의 작가 카잔차키스도 그의 스페인기행의 세비아 편에서 이와 같은 단상을 제일 먼저 언급하고 있다.

햇살이 너무 밝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서 무엇을 관조할 수 없을 정도로 대지는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매력을 갖고 있다. 거리에는 오렌지 나무가 즐비하지만 따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상상을 할 수 없을 풍경이다. 이슬람의 역사가 담긴 안달루시아 지방의 도시답게 어딘지 아랍적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길거리의 야자수나무의 일렬종대를 지나면 작은 식당의 야외 테이블이 즐비하게 널어서 있다. 그래도 이곳에는 겨울인지 그다지 사람들이 많지 않다.

구시가를 내리는 왼편으로 공원이 보인다. 유럽의 어디를 가도 안락한 여유공간으로서의 공원과 잔디와 벤치는 기본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것 같다. 푸르른 녹색의 나무들과 정원들이 눈을 신선하게 한다.

세비아의 히랄다 탑은 마치 한 마리 공작이 우뚝 솟아 오 른 듯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그리고 알카사르의 압도적인 모습은 어느 유럽의 건축물 못지않게 장관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선적으로 발길을 이끄는 것은 아마도 스페인 광장일 것이다. 마치 드레스덴의 성처럼 완벽한 대칭을 갖춘 것 같았다.

둥근 원형을 활용하여 하나의 완전한 일체감을 느낄 수 있는, 비록 원형 경기장 같은 모습일지라도 그속에서 우리는 어딘지 모르게 아름답고 수려하다는 느낌을 갖는다. 원형경기장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 같은, 하지만 그 내부를 구성하는 구도는 어딘지 인간들에게 친근감을 주는 곳으로 느껴졌다.

담배공장이었다는 세비아대학 건물은 마치 성곽과도 같이 주변에 수로가 있었다. 머나먼 시간관념의 늪에서 빠져나와 수백년전의 어느 공간에 잠시 들르는 착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어떠한 생각을 할까. 수업도 좋지만 혹시 과거와 현대를 왕래하는 타임머신의 기사로 하루를 시작하는 즐거움을 가지지나 않을까.

어느 대학과 같이 학교 앞은 햇살에 야외노천 식당이 개설되어 있다. 젊음은 특권이라고 했다. 그 특권의 시간 속에서 많은 성취를 이룬 자는 교문을 나서면서 당하는 특권의 무장해제에도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스페인은 플라멩코의 나라이다. 하지만 플라멩코는 춤이 아니다. 그것은 광기이다. 온몸을 쏟아 부어 나오는 에너지를 한곳으로 결집시킨 열정의 발산이다. 미친 듯이 자신을 잊어버리는 망각의 동물처럼 방금 한 동작의 전후를 온통 연속적인 자기몰입으로 귀결시키는 율동의 미학이다.

무엇이 그토록 저 댄서의 영혼과 육체를 하나로 만드는 마법의 신기가 있을까, 어떻게 해서 자신의 온 존재를 잊고 오로지 춤에만 열중하는 정열의 표현이 가능할까, 그리고 무엇이 좁은 무대의 연주자를 뒤로 하고 작은 캐츠트너츠의 음악에 오로지 의지해 자신의 스토리를 얘기하고 있을까.

현실 속의 플라멩코

평화와 안식의 대명사 같이 유럽의 공원은 넉넉하다. 그 공간이 던지는 메시지는 여유와 관용이다.
▲ 세비아의 공원 평화와 안식의 대명사 같이 유럽의 공원은 넉넉하다. 그 공간이 던지는 메시지는 여유와 관용이다.
ⓒ 김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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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스페인은 돈키호테와 플라멩코 그리고 투우의 나라라 했다. 도심의 레스토랑이지만 플라멩코의 무대는 마치 동굴을 연상케 한다. 스페인의 많은 건축물들이 동굴의 종유석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것을 보듯 그들 집시의 거처가 동굴이었음을 말해주는 듯 했다.

불이 꺼지고 마치 한국의 창을 대하듯 일반 관중은 무대와 바로 접해서 앉는다. 두 명의 키타리스트의 반주가 시작된다. 모두들 생김새는 인도와 중동 계열이다. 주위의 남자들의 박수와 노래로 플라멩코의 춤은 시작과 끝을 이룬다. 그리고 어두침침한 불빛이 일어나고 주위는 마치 쥐죽은 듯 고요한 침묵이 흐른다.

플라멩코, 그것은 절규였다. 소름이 끼치도록 슬픈 그들 내면의 통곡이었다. 어떠한 해석이 필요 없을 정도로 그들의 춤과 언어는 모든 이들의 가슴에 일종의 진한 울림을 내던졌다. 아프도록 그리하여 상처 같은 흔적이 되어버린 그들의 쓰라린 자기고백의 현장이었다. 때로 박수가 터지고 관객 또한 스스로에 함몰되어져 갔다.

흰옷을, 그리고 빨강의 그리고 회색의 그리고 검정의 옷들을 걸쳤다. 3명의 여자와 2명의 무용수가 교대로 무대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그리고 뒤로 둘러앉은 키타반주와 손뼉과 애를 끊는 목소리의 남자가수들의 열창이 실내를 온통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발로 리듬을 맞추는 그리고 손으로는 마치 승무의 곱고 연한 선이 때로는 숨가쁜 플라멩코의 급박한 질주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율동이 하나의 육체와 영혼의 언어로 압축되어져 그 자체로 의미가 되었다. 그 언어의 이면에 숨은 집시의 노래는 정말 신비하게 들려도 그것은 그들의 생활의 애환이 담긴 일상어였다. 그러기에 그것은 억압과 발산, 그리고 절제와 폭발의 미학이다. 집시족의 언어를 춤으로 승화한 예술적 자기표현의 극치이다. 항상 극적인 반전의 있을 듯 하나 실상은 한을 풀어내는 집시적 표현을 춤과 노래로 풀어내고 있다. 그것이 플라멩코 감상법인지도 모른다.

플라멩코의 순간에 동원된 모든 수단은 일체감의 귀결이었다. 그것들은 하나의 역할과 의미를 갖추면서 시종일관 관객을 사로잡는 마법의 순간을 주도했다. 때로는 사자같이 포효하고 때로는 사슴같이 순수한 자태로 무용수는 스스로를 불살라가고 있었다. 비록 한사람씩 교대로 무대를 장식하고 있어도 그 감당할 수 없는 폭발력은 앞의 관객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남자무용수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혼신의 몰입으로 마치 신들린 사람 같았다. 자기를 인식하지 않는듯한 마치 무한한 우주공간에 내던져져서 유영하는 무국적자같이 한없는 연민을 느끼게 하였다. 하지만 그의 춤사위는 모든 집시적 감정의 총집결같이 완벽했다. 한과 슬픔, 사랑, 기쁨, 애환 등을 춤꾼의 쟁이 의식으로 노래하고 춤추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물론 뒷줄의 반주꾼들이다. 기술적으로 손과 발 그리고 입은 항상 시를 쓰고 있는 뒷좌석의 시인들이다.     

여인들은 희고 붉은 옷을 입고 있다. 다리의 가늘고 유연한 모습과는 달리 유방은 관능적이고 터질 듯이 풍만하다. 부드럽고 절제된 모습이지만 때로는 터지는 그 순간폭발력은 남자 무용수의 격정 못지 않게 힘이 있고 강하다. 때로는 유혹적이고 때로는 숨막히는 성적호기심이 분비될 정도로 요염하다. 

플라멩코는 생활의 애환을 춤과 노래를 통해 승화하는 놀이판이다. 여러 세월이 깃든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와 관습의 현재진형형이다. 노래와 손뼉 그리고 기타반주를 통해 처절할 만큼 극단적 자기표출을 이루어내고 있다. 마치 한국의 민요와 창을 보는 듯하다. 소리꾼의 소리에 맞추어 춤추며 창을 읊는 우리의 소리같다. 단지 동양적 여린 순수로 정적인 표출방법이 서양의 동적 표현으로 대치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율동은 움직임이 크고 애를 끊는 순간폭발력의 실체같이 힘이 있을 뿐이다.

검은 옷의 빨강 숄을 걸친 여인이 등장한다. 관객을 홀리는 듯한 동작이 연속과 단절을 반복한다. 선이 곱다. 유연하고 빠르다가도 일순간 클라이막스에서는 폭발한다. 우아하고 관능적이고 매혹적인 모습에 얼굴에서 눈을 땔 수 없게 만든다. 관객은 환호하고 열광하고 박수한다. 남자 둘이 절도있고 규율적이다. 박력이 넘친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 모두들 나와 피나레를 장식하고 있다.

상상 속의 플레멩코

세비아의 스페인광장이다. 독일의 드레스덴성과 같이 대칭의 건축구도가 화합과 조화를 갖춘 듯 하다. 웅장하다기 보다는 정갈한 느낌의 둥근 원형의 광장이 어딘지 모성적 사랑을 담고 있는 듯 하다.
▲ 스페인광장 세비아의 스페인광장이다. 독일의 드레스덴성과 같이 대칭의 건축구도가 화합과 조화를 갖춘 듯 하다. 웅장하다기 보다는 정갈한 느낌의 둥근 원형의 광장이 어딘지 모성적 사랑을 담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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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멩코는 슬프도록 아름답다. 자리에 앉아 아예 두눈을 감고 그 모습을 연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애절한 슬픔의 심연을 상상할 수 있다. 그 춤이 가지는 많은 우연과 필연의 사연 속에는 분명 우여곡절이 내재해 있다. 그것을 댄서는 굵직한 눈썹의 강렬한 만큼이나 인상적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그리고는 그 속에서 우리는 예술적 가치와 감동으로서 플라멩코에 빠져든다. 왠지 끝나지 않을 만큼 폭발적이고 경쾌하고 그리고 순결하게 다가오다가 어느 순간 요염한 여인의 입술만큼이나 부드럽게 우리들을 혼란하게 한다.  
 
그들이 왜 이 춤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구체화하는지는 집시의 애절한 일상의 고단함의 표출일지도 모른다. 유랑하는 자, 무소속인 자, 그리고 비주류인 자. 집시의 일생은 늘 그렇게 아웃사이더의 소외감과 자기표현의 억제가 존재하였을 것이다. 그 속에서 녹아 굳어진 집시의 한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듯이 자신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양 무속인의 굿처럼 자신을 버린 후에 이윽고 자신을 거두어들이는 일종의 자기유기와 같은 처절한 실험정신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집시는 항상 고독하고 외로운 군상들의 집단이었다. 그리고 그들만의 춤의 언어로 교감하고 체득하고 그리고 살아갔다.

오늘 세빌리아 집시의 숨막히는 비상과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깊은 감동은 곧 집시의 일부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를 보는 관객은 그 플라멩코의 공연 중의 키타소리만큼이나 맑고 정화되는 자신을 느꼈을 것이다. 열정 속에서 자신의 삶을 일구어가는 집시들의 소박하고 참된 삶의 모습은 우리들에게는 감동같이 다가오는 메시지다. 하지만 그들의 가슴 속에 머물고 있는 순수와 애절한 삶의 태도는 우리들이 함께 공유해야할 가치인지도 모른다.      

또 플라멩코는 피를 토하는 열정에 받쳐 무아지경이 된다. 그 속에서 무희는 천상의 몸놀림으로 몸부림치듯 처절하게 춤을 춘다. 그리고는 또 다른 실체로 태어나는, 그것은 고통 뒤에 분명하게 찾아오는 일종의 해방감과 자기발견 같은 것이다. 거기에 집시들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살아간다. 결코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의 이름으로 극단적 자기해체를 통해 스스로를 보호하는 니힐니즘을 실현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2013년 2월의 여행 기록입니다. 김진환 기자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무역학과 교수입니다.



태그:#스페인 , #세비아, #플라멩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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