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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하면 이 재판부에서 선고할 수 있도록 일단 하는 데까지 해보겠다."

공직선거법·국정원법 위반 등으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등의 재판을 심리하는 이범균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1부 부장판사가 지난달 22일 공판 중 한 얘기다.  최대한 빨리 이 사건을 어떻게든 결론 내겠다는 의지가 담긴 말이었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지난 8월 16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국정원 댓글 의혹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청문회에 출석해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지난 8월 16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국정원 댓글 의혹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청문회에 출석해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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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선거법 270조가 '선거 재판은 기소일로부터 6개월 내에 1심 선고를 해야 한다'고 규정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는 사법연수원 21기로 내년 2월 있을 법원 정기 인사 대상에 포함돼 있다. 이 부장판사가 여러모로 '신속한 재판 진행'에 신경써온 까닭엔 이 인사로 자신이 이 재판을 끝까지 심리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우려가 깔려 있었던 것.

하지만 그는 지난 9일 열린 18차 공판에서 "1월에 결심해서 2월에 판결문을 쓰는 건 재판부의 욕심이 아니었나…. 이런 생각이 든다"며 '속도 조절' 얘길 꺼냈다.

파일 열기조차 힘들만큼 자료 많아... 재판부 '속도 조절'

이 부장판사가 '재판부의 욕심이었다'고 한 이유는 검찰이 제출한 증거물이 너무 방대하기 때문이었다. 검찰은 지난 6월 원세훈 전 원장을 기소할 때만 해도 공소장에 올라간 범죄사실은 국정원 직원들이 '오늘의 유머' 등 웹사이트에 남긴 게시물과 댓글, 찬반클릭 등 3688건이었다. 그러나 국정원 직원들이 트위터로 대선에 개입한 수사 결과가 추가되고 2차례 공소장이 변경되면서 제출된 증거물의 숫자는 약 121만 건으로 늘어났다.

9일 재판부는 법정에서 이날 증인으로 출석한 국정원 직원의 트위터 활동 내역이 담긴 엑셀파일을 열어보려 했지만, 파일 용량이 커서 제대로 열리지도 않았다 . 변호인 쪽에선 그 분량 때문에 '증거 검토 시간이 부족해 방어권을 충분히 보장하기 어렵다'는 논리를 펼쳤다.

검찰 역시 공소사실이 너무 많아 범죄에 이용된 각 트위터 계정 사용자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은 채 증거물로 제출하는 등 허점을 드러냈다. 이 부분은 변호인측과 재판부 모두의 지적을 받았다.

결국 이 부장판사는 9일 공판에서 "빨리 진행하는 데에 집중하다가 (큰 흐름을) 놓친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증인 신문을 해선 효과가 없다"고 말했다. "시간을 정해놓고 이때까지 (판결)하자고 할 사건도 아니고, 시간이 걸려도 다 하는 게 맞다"고도 했다. '빨리 선고하는 게 중요한 사건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들린다.

2차 공소장 변경 뒤 재판부 앞에는 트위터는 물론 인터넷 게시물 등을 증거로 인정할지 여부를 결정하고, 검찰과 변호인 쪽이 추가신청할 증인이 타당한지 등을 판단하는 과제가 놓여 있다. 그야말로 산더미 같은 숙제다. 자연스레 '이번 재판부가 선고하긴 어려울 것'이란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검찰로선 살짝 당혹스러운 일이다. 한 관계자는 이 문제를 두고 "재판 심리를 이렇게 많이 했는데, 여기서 판단을 안 받으면 그 다음은 답이 안 나온다"며 가급적 현 재판부에서 선고가 나길 원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대개 재판부가 바뀌면, 선고만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공판절차를 갱신해야 한다. 법원은 효율적인 진행을 위해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리진 않지만 대략적인 내용을 확인하는 절차를 밟는다.

'조현오 사례' 재연?... 검찰은 당혹, 야당은 걱정

이때 재판부의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 사법부의 독립성은 헌법으로 보장받지만 법원의 잣대가 들쭉날쭉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기도 하는 부분이다. 실제로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으로 조현오 전 경찰청장은 재판부 교체로 법정구속 8일 만에 석방됐다.

야당 역시 재판부 교체를 우려하고 있다. 한 야당 법사위원은 "정부가 황찬현 서울중앙지법원장을 감사원장으로 데려가서 (법원) 인사의 폭을 넓힐 이유가 있냐, 승진대상인 이범균 부장판사를 빼내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신경민 민주당 의원도 10일 오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이 부장판사가 이동하거나 승진하면 재판이 연기되거나 재판 중지 사유가 발생한다"며 "인사나 승진을 핑계로 재판이 중지되지 않길 바란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이에 차한성 법원행정처장은 "어느 정도 인사가 있을지 모르겠다"며 여러 상황을 고려하겠다"고 답했다.


태그:#원세훈,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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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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