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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한 해가 저물어간다. '다사다난'이라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그야말로 우리 사회 곳곳이 단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한 해였다. 여야 정치권은 물론이고, 지역, 학계, 언론, 종교, 심지어 학교에 이르기까지 갈기갈기 찢겨 극단적인 갈등 양상이 이어지고 있다. 문제는 통합과 타협은커녕 봉합조차 어려운 지경에 이르고 있다는 거다.

갈등마다 양상과 이유는 다 기억할 수조차 없을 만큼 다양했지만, 주지하다시피 그 시작은 '부정선거'였다. 국가기관의 불법적 대선 개입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고 단죄하라는 '유일한' 요구와 그것을 덮기 위한 새 정부의 '칼춤'이, 1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갈등의 요체다. 갈등이 지속되다보니 내 편 아니면 네 편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횡행해 이성은 마비되고 타협은 설 자리를 잃었다.

급기야 시민단체와 종교계를 넘어 정치권에서조차 현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새 정부 출범 후 1년이라는 관행적 '허니문'은 일파만파 확산하는 부정선거 파문에 묻혀 이야기 꺼내기조차 민망하게 됐고, 정치권은 온갖 극악한 말들이 오가는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대통령마저 가세한 형국이니 그 끝이 어딘지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대선 공약 중 맨 앞자리였던 '국민 통합'은 언론에서도, 정치권에서도, 심지어 이를 내건 대통령의 입에서조차 사라진 옛이야기가 됐다. 하긴 온 사회가 엉망진창이 돼버린 이 난국에 대선 공약이랍시고 '국민 통합'을 한다면 지나가던 소도 웃을 일이다. 상식과 몰상식의 경계마저 흐릿해져 버린 지난 한 해를 보내며 정치적 불신과 가치관의 혼돈 그리고 무력감이 온 몸을 휘감고 있다.

2013년은 '멘붕'으로 시작해 '멘붕'으로 끝났다
단지 전교조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좌빨' 교사로 내몰렸다. 심지어 지난 16년간 아무 문제 없이 해오던 수업이 '일베'로부터 '종북'으로 찍혀 간첩 신고를 당해야 했다.
 단지 전교조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좌빨' 교사로 내몰렸다. 심지어 지난 16년간 아무 문제 없이 해오던 수업이 '일베'로부터 '종북'으로 찍혀 간첩 신고를 당해야 했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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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2013년 올해는 '멘붕'으로 시작해 '멘붕'으로 끝났다. 건전한 상식으로 여겨오던 신념이 난데없이 몰상식하다며 낙인찍혔고, 단지 전교조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좌빨' 교사로 내몰렸다. 심지어 지난 16년간 아무 문제 없이 해오던 수업이 '일베'로부터 '종북'으로 찍혀 간첩 신고를 당해야 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를 언급하고,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을 보여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올해 '멘붕'의 화룡점정. 2학기 기말고사를 앞둔 며칠 전 한 아이로부터 달갑지 않은 조롱을 들어야 했다. 말꼬리 물고 늘어진 장난일 뿐이라 그냥 웃고 넘겼지만, 결코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일전에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아이들 앞에서 이렇게 평한 게 문제가 됐다.

"공과 과를 같이 평가할 때, 개인적으로 박 전 대통령을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 '평범한' 말에, 한 아이는 어디서 스크랩을 했는지 신문기사 하나를 꺼내 읽더니 마구 웃기 시작했다. 얼마 전 '박정희 전 대통령 탄신제'에 참석한 김관용 경북도지사가 했던 말을 실은 기사였다. '우리 사회 건강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가 박 전 대통령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라는.

"경북도지사님이 선생님더러 '건강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거네요. 말하자면, '몰상식하다'는 이야기잖아요. 하하하."

졸지에 제자들로부터 '몰상식한' 교사로 낙인찍힌 것이다. 그저 웃자고 하는 이야기에 죽자고 달려들 것까지는 없었지만, 나름 '반격'을 가했다.

"한 사람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과연 상식과 몰상식을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있을까?"

'건강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이라는 전제는 더없이 폭력적인 언사다. 발언자가 권력을 지닌 지도층 인사인 국민이라면 모두가 존경해야 한다는 협박이거나, 적지 않은 국민들을 몰상식하다며 대놓고 편 가르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기실 이런 망언을 일삼는 사람들이 현 정부엔 유독 많은 것 같다.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대통령의 복심이자 입인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이다. 직무상 청와대의 공식적 입장을 밝히는 그의 발언 마다에는 한결같은 '공식'이 있다. 본질은 외면하고 지엽적인 말꼬리를 부여잡고 생뚱맞게 '이 나라의 국민 맞느냐'며 몰아붙이는 방식이다. 거칠게 말해서, 이 나라의 국민이 될 '자격'을 언급하며 순식간에 국민과 비국민이라는 이분법으로 몰아간다.

얼마 전 박창신 신부의 'NLL과 연평도 포격 발언'을 문제 삼아 그가 속한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사제들에게 "그 사람들의 조국이 어디인지 모르겠다"고 일갈했고, 부정선거로 인한 대선 결과에 불복한다는 개인 성명을 발표한 장하나 민주당 의원에게도 "우리나라 국회의원이 맞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박창신 신부든, 장하나 의원이든 본질은 하나... 대통령은 부정선거 책임지라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와 최경환 원내대표를 비롯한 의원들이 9일 오후 긴급의총 직후 국회 로텐더홀에서  18대 대선을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박근혜 대통령 사퇴를 주장한 장하나 민주당 의원의 출당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새누리, 장하나 의원 출당 및 제명 요구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와 최경환 원내대표를 비롯한 의원들이 9일 오후 긴급의총 직후 국회 로텐더홀에서 18대 대선을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박근혜 대통령 사퇴를 주장한 장하나 민주당 의원의 출당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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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신 신부든, 장하나 의원이든, 모두 본질은 하나다. 국가기관이 동원된 부정선거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책임지라는 것. 그런데 그것에는 귀를 틀어막고 마구잡이 '종북' 딱지를 붙이면서 국민의 '자격'을 운운하고 있는 것이다. 순식간에 정의구현사제단과 장하나 의원의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비국민'이 돼버렸다. 한번 묻고 싶다. 당신이 생각하는 국민의 '자격 기준'이 무엇인지를.

이정현 수석의 거침없는 발언을 듣노라니, 오래 전 봤던 영화 <실미도>에서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684부대 훈련병들을 모두 사살하라는 중앙정보부장의 명령에 맞선 부대장의 저항을 묘사한 그 장면.

"684부대를 완전히 정리해주십시오."
"어디로부터 내려진 명령입니까?"
"국가의 명령입니다."
"중앙정보부가 국가입니까?"
"권력을 가진 자가 의지를 갖고, 결정을 하고, 명령을 내리면, 그것이 곧 국가의 명령입니다."

데자뷰. 권력이 국가를 참칭하던 시대가 다시 온 것인가.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면, 현 정부가 낡은 레코드판마냥 틀어대는 민주주의 국가라면, 사제와 국회의원이라는 직업과 신분을 넘어, 박창신이든 장하나든 그 누구든 자신의 생각과 소신을 밝힐 수 있어야 하고, 마땅히 존중 받아야 한다. 그에 대한 판단은 소수 권력자들의 몫이 아니다.

이정현 수석도 수많은 '박창신들'과 '장하나들'의 입장에선 철저히 '비국민'이다. 현재 권력을 누가 쥐고 있느냐의 차이일 뿐, 그런 논리를 그대로 들이댄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놓고는 무슨 '국민 통합'을 되뇌고, '대탕평'을 운운하는가. 이미 '비국민'으로 규정한 마당에, 사제를 파문시키고, 국회의원을 제명하는 데 그치지 말고, 차라리 권력의 힘으로 그들을 국외로 추방하라.

지칠 줄 모르는 그들의 '칼춤' 때문일까. 올해 세밑은 유난히 썰렁하고 음산하다. 예년 같으면 송년회 약속 잡자며 북적일 때인데, 조만간 만나 술 한 잔 나누자는 사람이 드물다. 자칫 정치 이야기 잘못했다간 드잡이하며 싸우기 십상이고, 시쳇말로 죽이 잘 맞아도 욕 나올 이야기밖에 없으니 술 맛만 떨어진다나.

하긴 요즘 송년회 술자리 등에서 정치 이야기는 일종의 금기다. 혹 말을 꺼낼라치면, 주변 지인한테서 가장 많이 듣는 얘기가 "소나기는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말이다. 요즘처럼 하 수상한 시절엔 입 다물고 조용히 사는 게 최고라는 것이다. 공안 통치의 시대를 떠올리며 그저 웃자고 하는 이야기일 테지만, 퇴근 후 술자리 대화조차도 어디선가 엿듣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며 연신 손가락을 입에 댄 채 쉬쉬 거리기 일쑤다.


태그:#이정현 홍보수석, #장하나 의원, #박창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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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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