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아이를 키우는 것은 세월이다,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학생 딸이 14살이 되었으니 꼬박 14년을 같이 살았다. 내 손가락 하나를 자기 온 주먹으로 꼭 쥐어 잡아도 넘쳤던 때부터 몸을 뒤집고, 걸음마를 시작하고, 말을 배우고, 뜨거운 미역국을 뒤집어 써 응급실에 달려가고, 혼나서 울다 잠든 볼을 만지고, 첫 운동회, 숨을 헐떡이며 뛰어와 일등했노라 자랑스럽게 스탬프 찍힌 손을 내밀던 시간, 늦게 오는 엄마를 기다리다 양말도 벗지 못하고 잠든 시간, 친구에게 따돌림 당해 어깨를 들썩이며 울던 시간, 좋아하는 아이돌 콘서트에 다녀와 숨도 안 쉬고 떠들던 시간. 그 모든 시간이 합쳐서 '너'를 만들었다 생각하면 눈물 날 만큼 감동적인 것이 자식 키우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 아기가 태어난 날, "최종범 인생 끝! 이제 최별로 시작!"이라고 아내에게 메시지를 보냈던 젊은 아빠 때문이다. 삼성전자 서비스 노동자 최종범은 이제 막 "아빠, 엄마"를 부르는 별이를 두고 정말, 별나라로 떠났다.

 

앞으로 별이가 자라면서 넘어지고 일어서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할, 수많은 세월을 두고 떠났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되돌아오는 긴 골목길 끝자락에 서성이며 기다려줄, 든든한 아빠가 별이에겐 이젠, 없다. 한 사람이 사라지는 것은 하나의 세계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와 연관된 수많은 기다림과 설렘, 아쉬움이 추억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아빠가 떠난 빈 자리의 별이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최별 인생으로 다시 시작하겠다"던 아빠는 없지만...


 

 삼성전자서비스 천안센터 기사였던 최종범씨의 둘째 형 최종호씨 등 유가족들이 지난 11월 6일 오전 서울 서초동 삼성본관 앞에서 삼성의 사과를 요구하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삼성전자서비스 천안센터 기사였던 최종범씨의 둘째 형 최종호씨 등 유가족들이 지난 11월 6일 오전 서울 서초동 삼성본관 앞에서 삼성의 사과를 요구하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 남소연


별이아빠 최종범은 노동조합을 시작하고 꿈이 생겼었다. 삼성의 옷을 입고 삼성의 이름으로 일해 왔지만, 단 한 번도 삼성의 노동자가 아니었던 거짓말 같은 일들이 끝나리라 생각했다. 한겨울 아파트 옥상에 올라 일을 해도, 고객에게 깔끔하게 보여야 한다고 화이트셔츠와 넥타이, 홑 잠바 하나로 버텨야 했던 시간들. 성수기에는 하루 종일 식사할 시간도 없이 업무량에 좇기고 비수기에는 배고픔을 달랠 만큼의 임금들, 그렇게 허기져서 시작한 노조가 희망이 되었다.


노조는 사회에 불평불만이 많은 자들이 만드는 것이라는 뼈에 박히는 말들을 들어도 분노와 서러움을 달래주는 동료들이 있기에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오후 10시 퇴근이 기본인, 명절에도 가족을 만나지 못하면서 일해도 끝나지 않는 가난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늦은 저녁밥도 넘기지 못한 채 상사에게 들어야 했던 욕설은 그의 존엄을 들었다 놓았다. 그렇게 위장도급으로 인한 불법파견,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비정규 노동자 서러움과 한은 결국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노동부조차 뻔한 불법파견을 인정하지 않는 절망스런 사회가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았다. 그래서 그는 동료들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소망을 남겨 두고 떠났다.

 

최종범씨 아내와 황상기씨 삼성본관 앞에서 농성중인 최종범씨의 아내와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 노동자 고 황유미님 부친 황상기씨가 발언을 하고 있다.
최종범씨 아내와 황상기씨삼성본관 앞에서 농성중인 최종범씨의 아내와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 노동자 고 황유미님 부친 황상기씨가 발언을 하고 있다. ⓒ 반올림


지난 토요일은 별이아빠와 엄마가 돌잔치 예약한 한 날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면, 돌상에서 무엇을 고를까 호들갑 떨면서 지켜보는 어른들 사이에서 홀로 사랑을 독차지했을 별이의 날이었다. 그러나 혼자 남겨진 엄마는 돌잔치를 취소했다. 엄마는 아빠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삼성본관 앞 차가운 거리에 설 결심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엄마는 별이를 할머니 손에 맡기고 삼성이 책임지고 해결할 때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결심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매일같이 삼성 경비와 경찰들과 전쟁을 치르며 천막도 없는 비닐을 덮고 12월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별이 아빠 동료들은 13일, 돌을 맞는 별이의 생일잔치를 아빠 대신 차려주고 싶어 한다. 별이의 아빠가 되어 함께 하겠다고 나섰다. 그들과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모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돌잔치를 차리기로 했다. 어쩌면 하늘에서 별이 아빠도 그것을 바라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돌잔치의 '아빠'가 됩시다

 

 세상 모든 아빠들의 딱 한 번뿐인 돌잔치, 오실 거죠?
세상 모든 아빠들의 딱 한 번뿐인 돌잔치, 오실 거죠? ⓒ 박진


문득 오래된 영화 <편지>가 떠올랐다. 이젠 고인이 된 영화배우 최진실씨가 박신양씨와 함께 나왔던 영화다. 떠난 남편을 잊지 못해 삶을 놓으려던 부인에게 도착한 죽은 남편의 편지. 그 편지에 기대 부인은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자신만이 건너야 할 사막이 있는 거라고, 사막을 건너는 길에 나는 오아시스를 만났다, 푸르고 넘치는 풍요로움으로 넘치는 그 오아시스를 지나, 나는 이제 그 사막을 건너는 법을 안다, 한때 절망으로 건너던 그 사막을 나는 이제 사랑으로 건너려 한다."

 

우리 모두 떠난 별이아빠가 보낸 편지가 되어주자. 사막을 건너는 별이엄마와 별이에게 쉬어갈 수 있는 오아시스도 되고 모래바람을 피할 수 있는 한 그루 나무가 되자. 때로 사막을 함께 건너는 낙타가 되자. 그리고 별이아빠가 전태일이 되어 떠난 자리, 삼성에 민주노조가 튼튼히 뿌리내리도록 함께하자.

 

삼성이 삼성서비스 노동자들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도록 힘을 모아주자. 삼성이 별이엄마와 별이에게 사과하고 별이아빠가 차가운 냉동고에서 훌훌 털고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자. 무엇보다 별이가 살아가야할 이 세상을,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주자.

 

언젠가 별이아빠를 만났을 때 고마웠다고 뜨거운 눈물로 안아주면, 웃으면서 우리가 건너온 사막이 지금은 푸른 녹음이 울창한 숲이 되었다고 토닥여 줄 수 있는, 별이 빛나는 돌잔치를 온 마음으로 축하하는 오늘부터. 우리 모두는 별이아빠가 되자.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삼성노동인권지킴이·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입니다. 

<별이 빛나는 돌잔치>
돌잔치 : 12월 13일(금) 오후 3시 예수회센터(서강대 옆)
최종범 열사 추모문화제 : 저녁 7시 삼성본관 앞


# 별이돌잔치#삼성최종범#삼성#최종범열사#삼성서비스
댓글1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4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www.rights.or.kr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