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처가에서 김장김치 보냈구나."

식탁 위에 놓인 김치통 두 개. 지나가듯 아내에게 한마디 던졌다. 뭐라고 한다는 말이 사실을 확인하는 정도의 밋밋하고 건조한 짧은 문장이 되어 튀어나온 것이다.

매년 김장철이면 처가에서 김치가 공여된다. 얻어먹는 주제에 고마운 마음으로 김치를 받아야 하지만 그게 잘 안 된다. 고마움을 표하는데 인색한 성격도 아니다. 왜 그럴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렵지 않게 두 가지 이유가 잡힌다.

가부장적 사고가 똬리를 틀고 있으니

아닌 것처럼 말해도 내 마음 한켠에는 남녀의 역할을 가르는 가부장적 사고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이성적으로는 아내와 남편의 완전한 평등을 말하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남자이니 이래야 되고 아내는 주부이니 이것 정도는 해야 한다'는 경직된 사고가 자리잡고 있으니.

그렇다.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가부장적 관념이 처가에서 가져온 김치를 별반 고마워하지 않게 만드는 거다. 김치 담그는 건 아내의 몫. 제 역할을 못하다보니 처가가 대신해 주는 것이고, 그러니 순도 높은 고마움을 표시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곤 하는 것이다.

또 한가지 이유가 있다. 맛이 비교되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김치를 공여해주는 사람은 장모님 말고도 한 사람 더 있다. 아내의 시어미니다. 매년 시댁과 본가에서 담가주는 김치로 겨울을 난다.

처가 김치, 시댁 김치... 맛 비교하는 남편

사람 얼굴이 천차만별이듯 김치 맛도 그렇다. 배추를 얼마큼 어떻게 절여서 어떤 양념에 어느 정도 젓갈을 써서 버무리는가에 따라 맛 차이가 클 수 있다. 내 입맛에는 '어머님 김치'가 '장모님 김치'보다 더 낫다. 길들여진 탓도 있을 테지만 다수의 사람들의 객관적 평가도 그렇다.

'어머님 김치'에 대해서는 "정말 맛있다"는 말을 유난히 자주하곤 했다. 맛이 괜찮아서 그랬던 것 말고 다른 속내도 포함돼 있다. 팔순의 노인이 며느리에게 담가주는 김치. 그러니 노인의 아들 입장에서는 미안한 마음이 가득할 수밖에.

이 미안함이 "맛있다"는 말 앞에 "정말" "아주" 등의 수식어를 붙이게 만드는 것이다. 듣는 아내 입장에서는 거북할 때도 있었을 터, 두 곳의 김치가 거의 같은 날 도착하는 경우에는 언짢다 못해 많이 속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처가 김치에 시큰둥, '어머님 김치'에는 찬사연발

작년이었다. 양쪽 집에서 김치가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하필 그날따라 '어머님 김치'는 아내의 시어머니가 손수 들고 오셨다. 처가 김치에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던 나는 '어머니 김치' 앞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우리 어머니 김치 맛 여전히 최곱니다! 오래 오래 사세요. 어머니 안 계시면 이렇게 맛있는 김치 어떻게 먹겠습니까."

어머니 듣기 더 놓으라고 너스레까지 떨었다. 갓 담근 김치를 볼이 터져라 우걱우걱 씹으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얘기가 툭 나왔다.

"저기 있는 게 처가에서 보내온 김치거든요. 푹 익혀서 찌개용으로 먹어야지 그냥은 맛이 좀 그래요."

미안! 내년엔 꼭 '처가 김치'에 찬사 보내야지

그날 저녁 아내가 축 처진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한 얘기 때문에 실망스럽고 다소 속상한 눈치였다.

"여보, 당신 처가 김치가 그렇게도 맛이 없어요?"

아하! 내가 너무 지나쳤구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속으로 다짐했다. 꼭 기억해두었다가 내년에는 처가 김치가 도착하면 "정말 맛있다"는 감탄사와 함께 아내 보는 앞에서 장모님에게 "맛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전화 드려야지.

그렇게 다짐해 놓고도 올해 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으니 어쩌랴. 작년 다짐을 까먹은 것이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슈퍼로 달려갔다. 유기농 국산 콩두부를 사가지고 와서 아내에게 "두부김치하고 소주 한잔하자"라고 제안했다.

"정말 맛있어요?" 형광등 100개보다 더 환한 아우라

두부와 함께 김치를 먹으며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연신 '맛있다'는 말로 대신했다. 처음에는 못 들은 척하더니 반복해서 "맛있다"고 하자 아내가 반응을 한다.

"정말, 정말로 맛있어요? 작년 김치보다 훨씬 맛있어요?" 이렇게 물으며 정색을 한다. 그래서 난 아내에게 큰 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 당신 시어머니 김치보다 훨씬 맛있어. 장모님 숨은 솜씨 대단하구나!"

아내의 얼굴이 환해졌다. '형광등 100개 켜놓은 것' 같은 그 누구의 아우라보다도 더 환하게 빛이 났다. 이번 처갓집 김치는 맛있었다. '미안한 마음'을 양념삼아 한번 더 버무린 김치라서 그런가.

덧붙이는 글 | '김장' 공모글



태그:#처가 김치, #시댁김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정치, 시사 분야 개인 블로그을 운영하고 있는 중년남자입니다. 오늘은 어제의 미래이고 내일은 오늘의 미래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미래를 향합니다. 이런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민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