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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어느 해 이희호 여사의 크리스마스카드로 해마다 왼편에는 각기 다른 부부사진을 꼭 새겼다.
 지난 어느 해 이희호 여사의 크리스마스카드로 해마다 왼편에는 각기 다른 부부사진을 꼭 새겼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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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학부모의 크리스마스카드

가을은 조락(凋落)의 계절이라면 겨울은 나목(裸木)의 계절인가 보다. 지난가을, 그 황홀하게 아름답던 가로수의 황금빛 은행나무 잎도 어느새 다 떨어졌다. 이즈음은 앙상한 가지만 썰렁하게 남았을 뿐이다. 나무만 그런 게 아니고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다.

한때 나는 동네 우체국 집배원으로부터 유명인사로 대접받을 만큼 우편물을 많이 받았다. 특히 연말에는 우체통 공간이 모자랄 정도였다. 나 또한 그만큼 우편물을 많이 보내기도 했다. 연말이 되면 이런저런 인연으로 만난 이, 신세 진 이, 그리운 이 등에게 직접 쓴 연하장을, 때로는 문구점에서, 우체국에서 사다가 크리스마스카드 겸 연하장을 숱하게 보냈다.

10년 전, 현직에서 물러나고 서울을 떠나 강원 산골로 내려온 뒤부터는 오는 우편물도, 보내는 우편물도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현상에 조금도 섭섭해하거나 우울해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극한 자연의 순리로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지난날 연말이면 해마다 일백여 통씩 받던 크리스마스카드나 연하장도 이제는 시대의 흐름 탓인지, 더욱이 이메일이나 문자로 대체된 뒤로는 매우 드물어졌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종이카드나 연하장 대신 이메일이나 문자로 답을 하다가 그것마저도 이즈음은 줄어들고 있다.

어제 산책 겸 도서관에 가는 길에 우편함을 열어보자 오랜만에 우편물로 가득 찼다. 아직도 공직에 있는 친구가 고맙게 보내준 새해 달력과 이런저런 회보와 소식지 등인데, 그 가운데 낯익은 이름의 크리스마스카드가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봉투를 열었다.

"즐거운 성탄절과 새해에 가정에 행복과 건강을 빕니다." - 이희호

청와대 영부인 시절 크리스마스카드 봉투의 이희호 여사 친필 글씨
 청와대 영부인 시절 크리스마스카드 봉투의 이희호 여사 친필 글씨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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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년에는 카드 왼편에는 내외분 사진이 늘 새겨져 있었는데, 올해는 대신 2000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이 받은 노벨평화상 상장이 인쇄돼 있었다.

어젯밤 집으로 돌아온 뒤 이희호 여사에게 받은 크리스마스카드를 편지보관함에 넣었다. 그러면서 그동안 이희호 여사에게 받은 크리스마스카드를 세어보니 장수도 가장 많을뿐더러, 가장 오래도록 한해도 빠짐없이 보내주셨다.

청와대에 있을 때에도 꼭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냈는데, 꼭 내 주소와 이름을 친필로 써서 보냈다.

(관련기사: 한때 학부모였던 이희호 여사의 초대장을 받고)
(관련기사: 김대중과 나의 결혼은 모험이었다)

교사가 학부모에게 보낸 답장

청와대 시절에는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야 할 곳이 수천 수만 통이라 인쇄하거나 비서에게 대필도 시킬 만한데 나에게 보낸 카드 주소는 꼭 당신 친필이었다. 어느 해 봉투에는 주소를 깜빡 잘못 쓰신 듯, 화이트로 지운 뒤 그 위에다가 사인펜으로 덮어 써 보낸 봉투를 보고 나는 싱긋 웃었다. 그 무렵 나는 학교에서 교무부장 직책으로 화이트로 칠하거나 칼로 긁은 뒤 쓴 결재서류나 학생기록부를 일일이 찾아 그것을 쓴 선생님에게 되돌려 주는 악역을 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헤아려보니 이희호 여사의 아드님 김홍걸 군이 고교를 졸업한 지 30년이 넘었다. 솔직히 교사와 학부모는 아이가 졸업하면 끝나기 마련이다. 좀 심할 때는 아이가 졸업한 뒤 외면당하거나 욕먹지 않으면 다행일 수도 있다. 아이 재학 중 학부모와 교사 사이가 돈독할수록 그런 경우가 더 많다. 사실 이즈음 세태에 30년이 넘도록 아이의 선생님에게 해마다 빠짐없이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낸 학부모는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올해 받은 이희호 여사의 크리스마스카드
 올해 받은 이희호 여사의 크리스마스카드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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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그분 자서전 <동행> 출판기념식장에 초대받아 갔더니, 굳이 나에게는 현장에서 책을 주지 않고, 며칠 뒤 당신이 직접 사인을 해 우편으로 보내주셨다. 하지만 이제까지 나는 그분에게 특별히 볼펜 한 자루 선물 받은 적이 없었고, 서울에 살 때 내 집이 구기동이라 날마다 청와대 앞을 지나지만, 버스에서 내려 기웃거려 본 적도 없다. 아마 피차 그러했기에 지금 아흔이 넘은 학부모가 고희를 앞둔 강원도 시골에 사는 퇴역 선생에게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냈을 것이다.

오늘 아침 이런저런 일들을 생각해 보니 그동안 내가 그분에게 염치없이 일방으로 카드를 받았다. 나는 아직도 안흥찐빵 마을 홍보 자문위원이기에 그곳 찐빵집에 전화하여 찐빵 네 박스를 택배로 주문했다. 내가 부른 대로 주소를 받아 적은 뒤 안흥찐빵 마을 사장님이 한마디 했다.

"김대중 대통령 부인 이희호 그분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특별히 잘 만들어 월요일 날 보내겠습니다."
"다른 분 주문과 똑같이 만들어 보내십시오."

그동안 나는 친지들이 멀리 강원도 안흥에 있는 내 집으로 일부러 찾아오거나 인연이 돈독한 사람에게는 찐빵 한두 박스를 사서 기념으로 전했다. 이희호 여사에게는 그동안 미처 챙겨드리지 못한 듯하다.

"즐거운 성탄절과 새해에 이희호 여사님의 행복과 건강을 빕니다."
- 2013. 12. 7. 박도 올림


태그:#이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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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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