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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왁자지껄한 밤을 며칠간 보내고 나니 잠시 내가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잊은 듯 했다. 더 지내다 가라 했지만, 자꾸만 모든 것에 정이 드는 것을 보니 리우를 떠날 때가 되었나 싶었다.

주말이라 모처럼 늦게까지 자도 될 텐데 그녀는 한사코 아직 쌀쌀함이 가시지 않은, 해도 뜨지 않은 새벽 공기 속에서 우리 둘에게 당부의 말을 건넸다. 많은 나라를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누군가의 배웅을 받는 것이 처음이라 그랬는지 배낭이 내 뒷모습을 가리고 있다는 생각에 살짝 돌아본 곳에서 그녀는 차가운 공기를 견디며 손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프리실라가 술을 마시지 않을 때의 모습을 본 것이라고는 처음 만날 날과 이때 뿐이었다.

"여기 브라질이야. 그리고 새벽이고. 남자 둘이긴 하지만 그래도 조심해."

때마침 터미널로 향하는 버스가 도착했고 준(JUN)과 나는 그녀에게 미처 대답할 겨를도 없이 아무도 타지 않은 텅 빈 버스에 올라탔다.

"Adeus, Prischilla."

최대한 천천히, 입 모양을 동원해 그녀에게 소리 없는 인사를 건냈다. 그렇게 이과수로 가는 장거리 버스를 탈 때까지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여행을 하면서 둘이라서 좋을 때는 바로 이럴 때다. 22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버스에서 함께 보낼 수 있는 여유, 행여나 목적지를 놓쳐도 함께 헤쳐나갈 동지가 있다는 안도감. 덕분에 긴장이 풀렸는지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잠으로 보내며 제법 개운한 상태로 브라질의 최남단 국경마을, 포즈 데 이과수(Foz de Iguazu)에 도착했다.

포즈 데 이과수(Foz de Iguazu) 주변의 풍경은 아마존을 떠올리게 한다.
 포즈 데 이과수(Foz de Iguazu) 주변의 풍경은 아마존을 떠올리게 한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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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브라질이지만, 이과수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우리가 아는 이과수 폭포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양 국경에 걸쳐 있기에 우리는 우선 브라질 쪽 이과수 마을인 포즈 데 이과수의 한 호스텔에 짐을 맡겨두고 바로 남미의 대자연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 탔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이과수 폭포에서 일하는 직원으로 가득 찬 버스를 본 준이 '우리가 제대로 탔구나' 싶어 싱긋 웃어 보였다.

처음으로 만나는 남미의 대자연은 아프리카 와는 분명히 다르다. 낮고 좁게 풀이 자라는 아프리카와 달리 우거지고 높은 나무들이 들어찬 남미의 숲은 멀리서 봐도 확연히 눈에 띌 만큼 진한 녹색이다. 기대감이 최고조에 달해 신이 난 준과 달리 빅토리아 폭포에서 겪었던 트라우마가 떠오른 나는 한참 동안 주변을 두리번거린 후에야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이다. 이과수 폭포에는 원숭이가 없어서.

원시 지구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이과수 폭포
 원시 지구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이과수 폭포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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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내렸을 때부터 느꼈지만, 이곳의 녹색은 남다르다. 한국의 수많은 형용사를 모두 동원해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짙은 녹음으로 가득찬 이과수는 트레킹 코스의 입구부터 탄성을 자아낸다. 너비 4.5km, 평균 낙차가 70m 에 달하는 이과수 폭포는 누가 세어봤는지 크고 작은 물줄기가 300여 개나 된다고 하니 하나의 물줄기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빅토리아 폭포와는 사뭇 달랐다. 덕분에 걸음을 옮길 때마다 보이는 폭포가 조금씩 달라 계속해서 색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폭포 전체를 한 눈에 바라보는 풍경이 일품인 브라질쪽 모습.
 폭포 전체를 한 눈에 바라보는 풍경이 일품인 브라질쪽 모습.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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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빅토리아 폭포와 비교하면 어떤지 나의 의견을 물었다. 빅토리아 폭포, 나이아가라폭포와 함께 세계 3대폭포라고 불리는 이과수 폭포를 처음으로 봤으니 호기심이 생길 법도 하다.

그렇지 않아도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빅토리아 폭포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던 나는 "글쎄"라는 말로 대답했다. 어쩐지 너무 많은 것을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대자연을 보면서도 다른 무언가를 떠올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세상의 모든 폭포를 돌아보고 왔다고 한들, 지금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 풍경만큼 시리도록 뜨거울 수 있을까.

시선을 조금 먼 곳으로 돌리니 이 거대한 물줄기의 시작으로 보이는 넓은 협곡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이 신비로운 대자연의 비밀을 감추려는 듯이 쉴 새 없이 물안개를 만들어 내는 그 깊숙한 곳은 어쩐지 폭포 속으로 빨아들이는 악마의 달콤한 유혹과도 같았다. 기본적으로 폭포는 흘러내리면서 침식에 의해 상류 쪽으로 점점 깊숙이 파고 들게 된다. 얼마나 긴 세월에 걸쳐서 생겨났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달콤한 유혹을 우려해서였는지 사람들은 그곳에 '악마의 목구멍'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악마의 목구멍은 아르헨티나 쪽으로 가야 볼 수 있다.
 악마의 목구멍은 아르헨티나 쪽으로 가야 볼 수 있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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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달콤의 유혹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담아 폭포 위에 만들어진 나무데크를 따라 걸으면 한 층 가까이서 '악마의 목구멍'을 바라볼 수 있지만, 가까이 갈수록 커지는 굉음과 바람에 날리는 수증기 때문에 카메라에 담기는 쉽지 않다. 조금더 깊숙한 곳을 들여다 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누르며 돌아서는 순간 누군가가 외쳤다.

"It's Rainbow! (무지개다!)"

흐린 하늘 사이로 살짝 비춘 햇살에 어느새 떠오른 무지개를 바라보는 사람들. 차가운 물보라에 발길을 돌리려던 나는 그 무지개에 붙잡혀 옷이 흠쩍 젖을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면 어떠랴. 또르르 또르르. 모자를 타고 흐르는 물방울 소리마저 벅찬 풍경이 눈앞에 있는 것을.

악마의 목구멍을 보다

미리 알아둔 정보에 의하면 버스 두 번이면 아르헨티나 쪽 이과수마을로 국경을 넘을 수 있다고 했으나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빨리 이과수 폭포를 보고 온 참이라 여유가 있긴 했지만 국경에서 출국심사를 마치고 나서 갈아탈 버스가 좀처럼 오지 않는다. 어쩌다 지나가는 버스는 우리의 티켓을 보며 그 티켓으로는 탈 수 없다며 고개를 저을 뿐이다. 그러나 괜찮다. 우리는 둘이니까.

둘이라서 좋은 건 안정감이다.
 둘이라서 좋은 건 안정감이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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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에서 멍하니 기다린 지 30분. 슬슬 배도 고파지고 다른 배낭여행자가 보이지 않자 조금씩 초초해지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로 가는 아무 버스나 타면 되지만 우리에게는 남은 브라질 화폐가 없었다. 결국 준이 몸짓 발짓으로 사정을 해가며 미국 달러를 버스기사에게 팁으로 주고 버스에 탑승한 우리는 온 사방이 붉게 물들어질 때가 되어서야 아르헨티나의 푸에르토 이과수(Puerto Iguazu)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술을 마시지 않고 잠든 밤, 22시간의 버스이동을 끝내고 이과수 폭포를 본 후 국경까지 넘어 잠 든 그 다음날은 새벽부터 비가 왔다. 숲이 울창한 지역이라서 그런지 유난히 강한 비내음에 잠이 깬 나는 창 밖에 내리는 비를 보고는 오늘 과연 이과수를 가야할 것인가 고민에 빠졌다.

뒤늦게 준을 깨우니 창밖의 비를 보고 녀석도 울상이다. 여행에는 날씨가 제일 중요하니 말이다. 이대로 남쪽으로 이동을 할지 말지 고민이 계속 되던 찰나, 옆방에서 머물던 네덜란드 커플이 어제 아르헨티나 쪽 이과수를 보고 왔음을 기억해 내고 말을 걸었다.

"아르헨티나 쪽 이과수는 어때?"
"믿기 힘들 정도로 놀라워. 안 가보면 후회할 걸?"

제법 긴 이야기가 이어졌지만 '안 가보면 후회'라는 한 마디에 내 마음은 결정되었다. 애초에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면 하고 후회하자 싶어서 떠난 여행이 아니던가. 설마 악천후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일이야 생길까 싶었다.

밀림을 뚫고 달리는 아르헨티나 이과수의 관광열차.
 밀림을 뚫고 달리는 아르헨티나 이과수의 관광열차.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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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로 입구까지 버스로 이동하는 브라질과 달리 아르헨티나의 이과수는 놀이공원에나 있을 법한 아담한 기차를 이용한다. 떠들썩한 출발 알림과 함께 기차는 아마존을 떠올리게 하는 울창한 밀림을 뚫고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세차게 내리던 비도 그쳐 우리는 또 한번 두근거리는 마음을 품고 남미의 대자연을 볼 마음의 준비를 했다.

기차에 탑승한 사람들은 모두 '악마의 목구멍'(La garganta del diablo)에 내렸다. 브라질 쪽과 달리 폭포의 상류에 위치한 아르헨티나 이과수는 원시림으로 뒤덮힌 강의 상류를 지나 이윽고 악마의 목구멍에 도달한다.

사진으로는 악마의 목구멍이 뿜어내는 엄청난 에너지가 전혀 표현되지 않는다.
 사진으로는 악마의 목구멍이 뿜어내는 엄청난 에너지가 전혀 표현되지 않는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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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내린 비의 습기와 원시림이 뿜어내는 향이 뒤섞인 이과수의 공기는 맑다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마치 공장에서 방금 만들어진 것처럼 신선하고 향이 살아있는 맛있는 공기. 그러나 그 공기마저도 악마의 목구멍 앞에서는 수증기와 안개에 가려 사라지고 만다. 초당 5만8000톤이라는 엄청난 양의 물을 쏟아붓는 악마의 목구멍은 발을 들이기가 무섭게 입구부터 굉음을 뿜어낸다.

한 발 더 뻗으면 악마의 유혹으로 빨려들어갈 것 같은 펜스의 끝에 서면 카메라는커녕 눈을 뜨기도 힘들 만큼 세찬 물보라가 온몸을 덮치고 온통 회색벽이 시야를 가로막는다. 하늘의 비는 이미 그쳤지만, 이래서야 비가 그쳤는지 알아차릴 수도 없다. 오후에 있을 버스 때문에 겨우 발길을 돌리긴 했지만, 등 뒤의 굉음소리에 자꾸만 고개가 돌아가는 것을 보니, 우리는 목구멍이 아니라 영혼을 팔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그 압도적인 풍경에 짓눌려있었다.

아르헨티나 쪽의 이과수 폭포... 상상 뛰어 넘어

백악기의 지구의 모습이 이랬을까.
 백악기의 지구의 모습이 이랬을까.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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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쪽의 이과수 폭포는 나의 상상을 훨씬 뛰어 넘는다. 이과수 폭포 전체 면적의 80%가 아르헨티나에 속하긴 하지만 전망대가 이렇게 많으리라고 예상치 못했던 우리는 오후의 버스 시간을 맞추기 위해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들처럼 온 공원 안을 뛰어다녔다.

악마의 목구멍이 적당히 멀어지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무렵이 되자 이번에는 울창한 원시림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이 경이로운 자연을 보고 미국의 영부인 엘리너 루즈벨트가 '불쌍한 나이아가라'라고 탄식했다고 하니, 이쯤되면 또 한 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비와 규모뿐 아니라 모든면에서 이과수 폭포는 나머지 두 폭포, 나이아가라와 빅토리아를 압도한다. 특히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원시림으로 뒤덮인 폭포의 주변 풍경은 그야말로 백악기의 지구를 떠올린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아래 어디선가 무언가가 날아오를 것 같은 그런 풍경.

이 압도적인 대자연을 언제까지 볼 수 있을까.
 이 압도적인 대자연을 언제까지 볼 수 있을까.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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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폭포에서 쏟아내는 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폭포의 수명은 짧아진다. 그 파괴력에 상류가 조금씩 조금씩 깎여나가면 폭포는 점점 깊어지고 언제가는 소멸할 것이다. '회광반조'라고 했던가. 촛불이 사그러지기 전에 한 차례 크게 불꽃을 일으키듯이, 매일 매일 조금씩 깊어져가고 있을 이과수 폭포는 오늘도 거대한 악마의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결국 버스시간 때문에 우리는 몇 개의 포인트를 남겨두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에게 여행은 백미터 달리기처럼 금방 끝나지 않을 테니 다행이다. 그 울음소리를 다시 한번 들을 수만 있다면, 그때는 혼자여도 좋겠다. 너도 많이 쇠약해져 있을 테니까.

간략여행정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걸쳐 있는 이과수 폭포는 양 국가에서 각각 관람이 가능하다. 관람을 위해선 우선 브라질 쪽은 포즈 데 이과수(Foz de Iguazu), 아르헨티나 쪽은 푸에르토 이과수(Puerto Iguazu) 라는 마을에 도착해야 한다.

브라질에서 이과수 폭포를 보고 아르헨티나 쪽으로 가기위해서는 국경을 넘어야 하는데, 단순히 이과수 폭포만을 보기 위한 당일 방문일 경우에는 국경에서 간단한 절차만 걸치면 다녀올 수 있다. 1년 사계절 여름 밖에 없는 곳이지만 양쪽 모두 오후 5시 이후에는 입장이 제한되며 이왕이면 관람객이 적은 아침 첫 차를 타는 것이 좋다.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리긴 하지만 폭포 전체를 바라보는 파노라마 뷰는 브라질 쪽이 아름답고, 악마의 목구멍과 여러가지 액티비티를 즐기기에는 아르헨티나 쪽이 낫다. 다만 아르헨티나 쪽은 훨씬 넓고 포인트가 많기 때문에 적어도 반나절 이상은 잡아야 한다.
아래는 이과수 폭포의 입장료(2012년 10월 기준)
브라질 이과수 폭포 : 41R(한화 약 23,000원)
아르헨티나 이과수 폭포 : 130AR(한화 약 31,000원)

국경을 넘는 방법 및 폭포에 대한 좀 더 상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를 참조.
http://saladinx.blog.me/30150144099

덧붙이는 글 | 2012년 7월부터 올 4월까지 200일간 5대륙 22개국을 여행했다.



태그:#이과수폭포, #세계3대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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