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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강화도 '오마이스쿨'로 전국투어를 다녀와서부터 목이 칼칼하더니 드디어 감기가 왔다. 1년 내내 오지 않던 감기다. 나는 감기가 오면 일단 콧물부터 나온다. 다른 증세는 없다. 열나고 몸이 쑤시기라도 하면 병원에라도 간다며 생색을 낼 텐데 열도 없고 기침에 콧물만 나니 감기 같지 않은 감기인 것이다.

'맛있는 거라도 해먹자'면서 마트에 갔다. 마트 앞에는 온통 김장거리들로 가득차 있다. 배추는 초록색 망에 3포기씩 들어 있고 어린 아이 머리통만한 무는 다발로 묶어져 있다. 바야흐로 김장철이 온 것이다. 이 때쯤 되면 나는 갈등한다. 남편, 아이, 나 세식구만 먹는 김치를 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김장거리 채소를 구경만 하고 나오려는데 자꾸 뒤통수가 근질거렸다. 결국 '에라, 모르겠다' 하고는 동치미용 무를 한 다발 집어 들었다.

'그래, 동치미가 제일 하기 쉬우니까 저거라도 사서 김장을 하는 척(?) 하는 거야.'

김장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 생색내기용으로 담근 동치미다.
▲ 동치미 김장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 생색내기용으로 담근 동치미다.
ⓒ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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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치미 무를 들고 집에 와서 다듬어 소금에 절였다. 작년에 본 레시피를 올해는 또 보지 않고 기억력에 의존해서 한다. '무를 하루 동안 소금에 절이고 간이 배면 다음날 각종 양념을 넣고 소금물로 간한다'는 레시피다.

다음날 저녁 무가 짭짤하게 간이 뱄다. 마침 안 먹고 있던 배가 한 개 있다. 배랑 사과 한 개, 까 놓은 쪽파를 서너 뿌리씩 묶어서 넣고 마늘, 생강을 썰어 망 주머니에 담는다. 그리고 생수에 천일염을 적당히 타서 부으면 끝이다. 다 해놓고 보니 그럴듯한 비주얼이 나온다. 마음에 든다. 동치미 하나밖에 안했는데 김장을 다 한 것처럼 뿌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무슨 조화인지.

'더 이상 못 하겠다'는 엄마, 배추김치는 어떡하지

다음날 모처럼 약속이 없어서 집에 일찍 왔다. 조금 있으니 남편도 덩달아 일찍 온다. 냉장고에 먹을 만한 김치가 다 떨어져서 뭘 하나 만들어야 하는데 무얼 할까 하다가 어제 동치미도 담갔으니 그동안 인기가 많았던 총각김치나 한 번 더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조수로 부려먹을 남편도 있으니 다듬는 일은 남편을 시키고 나는 고급스러운(?) 일만 하는 거다.

남편은 어떤 일이든 시키면 잘하는 머슴 기질(?)이 뛰어나다. 다듬고 씻는 것까지 시켰더니 군소리 없이 해낸다. 나는 그걸 먹기 좋게 자르고 찹쌀풀을 쑤고 양념을 만들었다. 총각무가 절여지는 시간은 대략 3시간 안팎이다. 이번엔 소금을 덥석 넣었더니 조금 짠 듯하게 절여졌다. '익으면 괜찮겠지' 하면서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총각김치 담근다고 한 친구에게 자랑을 했더니 "고춧가루를 아끼지 말고 넣어"라고 한다. 그 말이 생각나서 고춧가루를 듬뿍 넣었다. 냉장고에 있던 새우젓까지 잘게 다져서 넣고 버무렸다. 역시 고춧가루를 많이 넣었더니 꽤 먹음직스러운 총각김치가 만들어졌다. 이번 가을 나는 친구의 부모님이 농사지은 고추로 빻은 고춧가루를 샀다. 고춧가루를 살 때는 분명히 김장을 하리라는 생각을 하고 샀는데 아직도 김장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을 못 내렸다. 오늘은 총각김치까지만 하기로 한다.

집에 손님들이 놀러오면 가장 인기가 많던 총각김치를 다음날 또 담갔다.
▲ 총각김치 집에 손님들이 놀러오면 가장 인기가 많던 총각김치를 다음날 또 담갔다.
ⓒ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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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동치미, 오늘은 총각김치, 하루 새 두 개의 김치를 담그고 나니 왠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배추김치는 선뜻 해야겠다는 결심이 서질 않는다. 그건 워낙 일이 복잡하니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김장철이 되면 엄마랑 같이 우리 집에서 김장을 했다. 재료를 다 다듬고 준비해 놓으면 엄마는 적당량을 혼합해서 버무리고 속을 넣는 일을 했다.

양념의 양을 가늠하는 일이 김치의 맛을 좌우 한다는 걸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가늠한 양으로 담근 김치와 엄마가 가늠한 양으로 담근 김치는 어쩌면 그렇게 다른 맛이 나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요리는 손맛이 중요하다고 했던가. 그런데 이제 엄마는 더 이상 힘들어서 못한다는 선언을 했다. 친구들은 시댁이나 친정에서 잘도 얻어다 먹는다는데 나는 덕이 부족한지, 어디서도 김치 갖다 먹으라는 말이 없다. 드디어 김장김치를 나 혼자 해야만 하는 때가 온 것이다. 

목요일이다. 주말이 돼가니 슬슬 술 약속 잡을 생각만 한다. 어라? 그런데 이번 주말은 주초부터 약속이 없더니 주말까지 조용하다. 그러다 보니 할까 말까를 망설이던 김장 생각이 났다. 마음 속에서는 착한 마음과 나쁜 마음 두 개가 싸우고 있었다. '열 포기라도 해서 김치 냉장고의 빈 통을 채워놔야 하지 않을까?'라는 착한 마음, '빈 통은 얻어온 김치로 채우면 되지'하는 나쁜 마음.

결국 착한 마음이 이겼다. 금요일엔 배추를 사서 절이자. 요즘은 절인 배추를 사서 양념만 넣는다고 하는데 난 왠지 절인 배추를 사고 싶지 않았다. 값도 비싸지만 배추를 절여본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김장의 반은 배추를 잘 절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로, 배추를 잘 절이면 김장은 성공한 거나 다름없다.  

드디어 불금(불타는 금요일)이 왔다. 예상대로 약속은 생기지 않았다. 퇴근길에 배추 3망(9포기)과 갓, 젓갈, 파, 마늘, 생새우, 소금 등을 사서 왔다. 오늘 저녁엔 배추를 직접 절이고 토요일에 속을 넣어야지 라는 야무진 계획을 세웠기에 남편에게 카톡으로 통보를 했다.

"나 오늘 배추 절여서 내일 속 넣을 거니까 옆에서 도우미를 해줘."
"어? 나 이번 토요일에 홍성에 가는데. 며칠 전에 얘기 했잖아. 1박 2일로 홍성에 귀농교육 받으러 간다고."

이게 무슨 소리지? 난 못 들었는데. 그럼 김치는 나 혼자 다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럴 수는 없지.

"난 못들었단 말야. 이제 와서 그 말을 하면 어떡해? 김치 안 먹을 거야?"
"......."

이런 낭패가 있나. 난 계획이 틀어지는 걸 쉽게 용납하지 못한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그냥 계획대로 가는 거다. 어차피 김치 담궈 놓으면 반찬 타령은 줄어들 테니까.

김장 완성! 송년회까지 해방이다!

퇴근하면서 산 배추를 열심히 절였다. 모든 재료를 내일 아침 남편이 홍성에 가기 전에 충분히 부려서 준비하도록 하자. 속 넣는 것까지 도와주지 못하는 걸 미안해 한 남편은 이번에도 맡겨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9포기의 배추는 만족할 정도로 잘 절여졌다.

토요일 아침, 남편은 떠나고 나는 준비한 재료를 열심히 썰어 고춧가루를 듬뿍 넣고 김치소를 만들었다. 혼자 마루에 쪼그려 앉아 속을 몇 개 집어넣었더니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이걸 나 혼자 먹자고 하는 것도 아닌데 뭐하는 건가 싶었고, 가족을 위한다는 아름다운 포장 속에 갇힌 가사노동이 하루빨리 귀한 대접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김치 3종세트의 완결판인 김장김치다.
▲ 배추김치 김치 3종세트의 완결판인 김장김치다.
ⓒ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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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하나씩 담근 김치가 일 주일에 자그마치 세 가지나 된다. 남편이 도와주긴 했지만 나 혼자 다했다며 으쓱해 한다. 한 가지 담글 때마다 초등학교 커뮤니티에 올리려고 사진을 찍어 두었다. 드디어 짤막한 설명과 사진을 올렸다. 애들은 쓰러진다.

"넌 전혀 살림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데 언제 저런 걸 다 만들었냐?"
"의외인 걸."
"못하는 게 없구나."

각종 찬사가 쏟아졌다. 충전이 되는 기분이다. 일요일 저녁에 돌아온 남편은 "고생했네, 감기는 다 나았어?"한다. 고마움을 금치 못하는 얼굴이다. 나는 속으로 '이제부터 연말에 있을 모든 송년회가 끝날 때까지 해방이다'라고 외쳤다.

덧붙이는 글 | 김장 응모글



태그:#동치미, #총각김치, #배추김치, #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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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받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다. 인터뷰집,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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