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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노무현이 있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그를 사랑했다. 대학 1학년인 1989년 12월 31일이었다. 그날 마지막으로 5·18 광주학살 청문회가 열렸는데 처음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을 알게된 날이기도 했다. 당시 야당인 통일민주당 청문위원으로 5·18 광주학살 청문회에 참여한 노무현 국회의원이 '자위권 발포' 운운하며 표리부동한 변명을 늘어놓던 전두환에게 명패를 집어 던진 것이다. 그 아름다운 분노를 보며 나는 정치인 노무현을 사랑하게 되었다.

 강금원 회장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만든 인터넷 카페. 강금원 회장의 사후에도 이들은 정기적인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강금원 회장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만든 인터넷 카페. 강금원 회장의 사후에도 이들은 정기적인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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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의 모습을 국회에서 보는 것은 짧았다. 90년 2월 9일, 노태우와 김영삼, 김종필이 3당 합당을 선언하면서 이를 거부한 노무현은 이후 정치인으로서 지독하게 외롭고 힘든 길을 걸어가야 했다. 그렇게 12년을 보냈다. 그 사이 노무현에게 '바보'라는 별칭이 생겼다. 낙선을 감수하면서도 끊임없이 지역주의 타파에 도전하는 그에게 국민이 붙여준 자랑스러운 별칭이었다.

그 바보라 불리던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은 2002년 12월 19일이었다. 바보를 지지하던 수많은 '바보' 국민들이 만들어낸 기적같은 승리였다. 그 자체가 믿을 수 없는 감동의 물결이었다. 그리고 다시 5년. 대통령 노무현은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잘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기대했던 국민의 욕심에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고 더러는 지지자들로부터 심각한 비난을 받을 결정을 하여 논란의 대상이 된 것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국민들이 '바보' 노무현의 진심과 가치를 다시 알게 된 것은 5년간의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그가 고향 봉하로 돌아간 후 부터였다. 재임중 국민을 진심으로 위해준 대통령이었음을 국민들이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국민적 호감이 결국 노무현 대통령을 위기로 내몰게 된다.

당시 광우병 항의 시위로 위기에 처한 이명박 정권이 국민적 인기를 얻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상대로 흠집내기에 나선 것이었다. 주변 측근과 가족에 대한 전방위적 수사가 무차별적으로 진행되었고 확인되지도 않은 사실을 매일 매일 검찰은 언론에 브리핑했다. 의혹과 의혹이 쏟아지며 노무현 대통령은 망신창이가 되고 있었다. 결국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은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졌다. 억울한 그의 서거에 국민이 오열과 눈물로 애도했다.

또 다른 바보 '강금원이라는 사람'

그런 바보 노무현을 지켜준 유일한 사람이 있었다. 많은 이들에게 노무현의 후원자로 알려진 창신섬유 강금원 회장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1998년 노무현 대통령이 서울 종로 보궐선거에 출마할 당시 처음 만나게 된 인연이었다고 한다. 2009년 4월 17일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쓴 '강금원이라는 사람'이라는 글에서 그 인연을 이렇게 적고 있다.

강(금원) 회장이 나를 찾아온 것은 내가 종로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였다. 모르는 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다.

"후원금은 얼마까지 낼 수 있지요?"

전화로 물었다.

"1년에 5000만 원까지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무실로 온 사람이 강회장이다.

"나는 정치하는 사람한테 눈곱 만큼도 신세질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첫마디를 이렇게 사람 기 죽이는 이야기로 시작했다. '눈치 안 보고 생각대로 말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그래서 경계를 하지 않았다.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노무현과 강금원의 인연은 깊었고, 또한 뜨거웠다. 자금도, 정치적 배경도 없던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사람은 물론 국민이었지만, 만약 강금원이라는 사람이 없었다면 그것은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같은 글에서 이를 진솔하게 고백했다.

"나는 2000년 부산 선거에서 떨어졌고 2002년 대통령 후보가 되었을 때는 '장수천'(운영하던 생수 회사) 빚 때문에 파산 직전에 가 있었다. 강 회장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대통령이 아니라 파산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만든 대통령이었지만 강금원 회장이 누구처럼 그 덕을 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 스스로 말한 것처럼 "정치하는 사람에게 눈곱만큼도 신세지지" 않았다. 대신 그가 본 노무현 대통령 덕은 역설적이게도 '감옥'이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왜 대통령으로부터 아무런 덕도 보지 않았던 강금원은 감옥을 가야 했을까.

노무현을 '대통령 만든 죄', 강금원의 감옥살이

강금원이 처음 감옥을 간 때는 노무현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한 2003년 가을이었다. '불법 대선자금' 혐의였다. 하지만 이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검찰의 긴장 관계 속에서 빚어진 일견 억울한 일로 많은 이들에게 평가된다. 검찰 개혁을 요구하는 대통령과 "너는 깨끗하냐"는 묘한 대립 갈등 속에서 대선 자금 문제가 불거지면서 결국 강금원 회장이 그 희생양이 되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강금원 회장은 억울했지만 초연했다. 그때의 일화다. 자신을 돕다가 결국 감옥에 갇힌 강금원 회장에게 노무현 대통령은 미안한 마음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대통령 신분이지만 자신 때문에 감옥에 갇힌 강금원 회장을 면회하여 위로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성사되지 못했다. 강력히 반대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강금원 회장이었다. 대통령이 자신 때문에 곤경에 처해지는 것이 싫다며 거듭 거절했다는 것이다.

"대통령님의 뜻은 충분히 알겠지만 제발 없던 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대통령 면회에 앞서 이 사실을 알려주고자 구치소를 먼저 찾아온 청와대 민정수석실 관계자에게 강금원 회장이 전한 말이었다. 강금원은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강금원의 고난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2009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바로 그 해, 그러니까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기 한 달 전인 4월 초순경, 강금원은 두 번째 구속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첫 번째와 달리 두 번째 구속을 당할 때 강금원 회장의 반응은 많이 달랐다고 한다. 정말 억울해했고 승복할 수 없다며 분노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 강금원 회장보다 더 분노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바로 퇴임한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다시 노 대통령이 쓴 '강금원이라는 사람' 중 일부 내용이다.

"회사 일은 괜찮겠어요?"
"아무 일도 없어요. 지난번에 들어갔다 나오고 나서 직원들에게 모든 일을 법대로 하라고 지시했어요. 수시로 지시했어요. 그리고 모든 일을 변호사와 회계사의 자문을 받아서 처리했어요. 그리고 세무조사도 다 받았어요."

그래서 안심했는데 다시 덜컥 구속이 되어 버렸다. 털어도 먼지가 나지 않게 사업을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닌 모양이다. 어떻든 강 회장은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을 맞은 것이다. 이번이 두 번째다. 미안한 마음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노무현 대통령의 분노는 단순히 자신의 측근을 상대로 정치 보복을 가하는 이명박 정권에 대한 분노만이 아니었다. 두 번째 구속된 강금원 회장의 건강 때문이었다. 당시 강금원 회장은 심각한 뇌종양 환자였다. 그래서 수술과 치료가 당장 필요한 상태였는데 무리한 법 적용으로 인신 구속까지 시킨 것을 보며 노무현 대통령은 해도 너무 한 정치 보복이며 비열하기 짝이 없다고 분노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노무현 대통령은 이 글에서 자신을 '모진 놈'이라고 표현하고 강금원 회장을 그 옆에 서 있다가 '벼락 맞은 사람'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강금원 회장에 대한 노 대통령의 미안함이 얼마나 컸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한편 구속된 강금원 회장의 건강은 매우 심각했다. 그래서 수술이 시급하다는 병원 주치의 진단서를 제출하며 강금원 회장 측은 법원에 보석을 신청했다. 하지만 2009년 5월 19일 열린 보석 재판에서 법원은 보석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같은 강금원 회장의 재판 결과는 당연히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전달되었다. 수술이 시급한 강 회장의 보석 불허를 전해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래서였을까. 그로부터 나흘이 지나가던 2009년 5월 23일 새벽, 노무현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글로 시작하는 유서를 썼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  유서의 일부

강금원 회장 아들을 만나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길이 없다"며 쓴 노무현 대통령의 유서에서 '신세'와 '고통'은 어쩌면 강금원 회장을 향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자신이 쓴 '강금원이라는 사람' 말미에 "제발 제때에 늦지 않게 치료를 받고 건강하게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란다"며 강금원 회장의 건강을 걱정하던 노무현 대통령.

그런데 뇌종양 수술이 시급한 강금원 회장이 석방되지 못하자 결국 내가 없어져야 강금원이 풀려나와 수술을 받을 수 있다고 노무현 대통령이 생각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였을까.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 이틀 후인 5월 25일, 법원은 강금원 회장의 보석을 받아들여 석방시킨다.

강금원 회장의 투병 중 모습 뇌종양 수술로 인해 병색이 깊었지만 강금원 회장은 자신과 뜻이 같은 이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웃음을 잃지 않았다.
▲ 강금원 회장의 투병 중 모습 뇌종양 수술로 인해 병색이 깊었지만 강금원 회장은 자신과 뜻이 같은 이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웃음을 잃지 않았다.
ⓒ 강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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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방된 강금원 회장이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노무현 대통령의 빈소였다. 노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들은 후부터 내내 오열과 통곡을 멈추지 못하던 강금원 회장은 이후 남은 5일 동안 빈소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의 오열과 통곡 역시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흐른 2012년 8월 2일. 결국 강금원 회장은 그때 놓친 수술로 앓고 있던 뇌종양이 악화되었고 끝내 노무현 대통령의 뒤를 따라가고 말았다.

그랬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과 그 노무현을 사랑했던 강금원 회장의 이 아름답고 안타까운 인연을 접하고 너무 가슴 아팠다. 그래서 꼭 한 번 그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잘 아는 어느 지인의 결혼식에서 나는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강금원 회장의 외아들 강석무(35) 이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현재 기업가로서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아들이 본 아버지 강금원'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인터뷰를 요청했다. 참고로 강석무 이사의 장인은 참여정부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이병완 현 노무현재단 이사장이다. 그는 지난 2008년 9월 6일 노무현 대통령의 주례로 결혼했다. 다음은 그와 10월 23일 서면 및 전화를 통해 나눈 인터뷰 전문이다. 

- 아들이 본 아버지 강금원 회장, 어떤 분입니까.
"자식들에게는 엄하신 아버지셨지만 항상 가족을 생각하시고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인정이 무척 많은 분으로 기억됩니다. 그냥 전형적인 우리나라 아버지 모습이라고 할까요?"

- 아버지 강금원과 아들로서 가진 특별한 추억이 궁금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은 아버지와 함께 여행간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무리 바쁘셔도 꼭 며칠 동안은 시간을 내셔서 가족들과 여행을 다니셨습니다. 그 중 가장 기억이 남는 여행을 꼽는다면 1996년 제가 수능 시험이 끝난 후 아버지와 단 둘이 광주와 지리산 여행을 다녀온 일입니다. 또 하나는 초등학교 시절, 학원을 안 가고 오락실 갔다가 어머니에게 들켜 결국 아버지에게 크게 혼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5월쯤으로 기억하는데 종아리에 멍이 들도록 맞아 그 해 여름은 반바지를 입지 못 할 정도였습니다. 그날 밤에 자고 있는데 아버지가 들어오셔서 묵묵히 약을 발라 주시던 기억이 납니다."

- 아버지 강금원 회장님은 두차례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 당시 아버지의 구속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정치적 탄압이라는 주장이 강했습니다. 아들 입장에서 이같은 아버지의 구속을 겪으며 어떤 느낌이셨는지요.
"처음 구속 되셨을 때 저는 대학원을 휴학하고 군 복무 중이었습니다.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였기에 그때는 어떤 사정인지 솔직히 잘 몰랐었습니다. 다만 어려서부터 보아온 아버지는 회사 직원의 월급을 주기 위해 노력하신 분이었습니다. 누구처럼 치부하거나 또는 돈을 함부로 낭비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에 그냥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일부 유죄가 확정 되었지만 지금도 다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구속 때는 충격이 컸습니다.

첫 번째 구속 이후 만약을 대비해서 아버지가 모든 회사 업무를 철저하게 변호사와 회계사를 통해 처리하셨거든요. 일체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모든 일을 합법적으로 하라고 지시하셨거든요. 그래서 두 번째 구속 직전에 국세청 세무조사까지 받은 결과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어 정말 걱정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엉뚱하게도 아버지가 납부한 추징금을 검찰 직원이 유용한 비리가 적발되었는데 그 불똥이 묘하게도 아버지께 미친 것입니다.

이후 집과 회사로 압수수색까지 나오는 것을 보고 '정말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더라구요. 지금 생각해보면 이때가 아버지에게 뇌종양이 발견되어 극히 조심하고 있을 때였는데 결국 이 일로 건강을 잃게 된 원인이 된 것 같습니다."

- 노무현 대통령 역시 이때 강금원 회장의 구속을 듣고 크게 격노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봉하마을 측근에 따르면 강 회장 소식을 듣고 "나쁜 놈들. 성한 사람도 아닌데… 대전지검으로 가자. 검사장 따귀부터 한 대 때려야겠다. 그러면 누가 답해도 답하겠지. 암 환자한테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누가 시켜 이 따위 짓을 하는지. 가자"라는 말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사자인 아버지는 어떠셨나요.
"특별히 하신 말씀은 없으셨고 다만 '별일 없을 것'이라며 오히려 저희를 안심시켰던  기억이 납니다. 그냥 평소처럼 잘 지내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 그런데 아버님이 구속되어 있던 이때 강 이사님의 주례 선생님이기도 한 노무현 대통령께서 갑작스럽게 서거하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노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처음 듣고 난 후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그날(5월 23일)이 토요일이었죠. 아침에 일어나 뉴스를 접하고 무슨 말도 나오지 않더라구요. 무엇보다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서거 전날인 22일 면회를 다녀왔는데 그때 아버지가 신청했던 병 보석이 거부되어 많이 힘들어 하셨거든요. 여러 병원으로부터 수술이 시급하다는 진단서를 첨부하여 보석을 신청했는데 당장 죽을 병이 아니라며 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많이 상심하셨는데 사실 그때 아버지가 상심한 진짜 이유는 노 대통령님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빨리 나가야 자신 때문에 구속되었다며 미안해하는 대통령님의 마음이 좀 편해지지 않겠냐고 생각하신 겁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대통령님의 서거 소식을 듣고 참 많이 힘들어 하셨습니다. 서거 후 이틀이 지나 갑자기 보석이 허가 되어 제가 봉하로 모시고 가는 내내 많이 슬퍼하시던 기억이 많이 남습니다."

- 주례 전에 노 대통령을 뵌 적이 있었나요. 그리고 혹 주례 말씀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주례 전에도 노 대통령님을 뵐 기회는 여러 번 있었습니다. 특히 결혼 전 봉하 마을로 가서 아내와 함께 인사를 드리기도 했는데 결혼식 당일 주례 말씀은 솔직히 너무 긴장했던지라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기존의 형식적인 다른 주례와 달리 진심을 담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주례 말씀이었다는 것은 기억이 납니다."

- 결혼식을 마친 후 노 대통령을 다시 뵌 적이 있나요. 만약 있다면 당시 노 대통령께서 당부하신 말씀이 궁금합니다.
"결혼 후에 몇 번 더 뵌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골프장에 오실 때도 있고 명절 때 봉하 마을로 가서 인사드린 적도 있습니다. 서거하신 2009년 설 명절에도 세배 드리러 갔더니 "잘 살고 있냐"고 물으시면서 대통령님께서 제 아내에게 세뱃돈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 강 이사님은 주례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신다고 하는데 당시 언론 보도를 살펴보면 주례 당시 노 대통령께서 "나와 하는 일은 다르지만 세상을 보는 생각이 같아 뜻을 같이하고 있다"며 아버지를 평한 바 있습니다. 아들 입장에서 아버지가 본 세상, 바라던 세상은 무엇이었다고 생각 하시나요.
"저도 노무현 대통령님과 아버지의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봅니다. 원칙과 신뢰가 통하는 세상, 상식으로 살아 갈 수 있는 세상을 아버지도 자주 말씀하셨고 그런 세상을 바라셨다고 생각 합니다."

- 아버지는 정치인 노무현을 도왔고 결국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노 대통령 말씀처럼 "(강금원 회장이 도와줘서 나로서는) 정치적 성취에 큰 보탬이 됐지만(강금원 회장은) 나 대신 고초도 겪은 특별한 인연"이라고 역경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아들로서 이같은 아버지와 노 대통령의 특별한 인연, 원망스럽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원망스럽다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 원치않는 고초를 겪으셨음에도 아버지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시는 것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신 모습이 저로서는 좋았습니다."

 함께 여행을 가서 남긴 강금원 회장 일가 3대. 아버지 강금원 회장과 아들 강석무 이사.
 함께 여행을 가서 남긴 강금원 회장 일가 3대. 아버지 강금원 회장과 아들 강석무 이사.
ⓒ 강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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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8월 2일 아버지가 끝내 뇌종양으로 운명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남긴 그림자는 여전히 클 것 같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좋은 그림자도 있고 반대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일화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아버지를 기억해 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훌륭한 아버지를 뒀다며 저를 격려해 주시는 분들이 많아 제가 항상 노력하며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항상 하게 합니다. 특히 아버지 상중에 다른 분 조문을 위해 같은 장례식장을 우연히 방문했던 분들중 제 아버지 장례중임을 알고 찾아와 문상해 주신 분이 많았는데 그런 분들을 뵈며 "아버지가 나쁘게 사시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반면 안 좋은 일도 있습니다. 제가 사는 집 근처에서 종종 술을 한 잔 할 때가 있는데요. 그때 제 옆 테이블에서 손님들이 노 대통령님 이야기를 하던 중 제 아버지를 두고 안 좋게 말이 하실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 참 마음이 아픕니다. 사실과 다른 억지가 대부분이더라구요. 그렇다고 제가 나서서 해명할 수도 없어 많이 속상했었습니다."

- 아버지가 노무현 대통령 외에 정치인으로서 정말 신뢰하고 좋아한 사람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안희정 충남지사님을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안 지사님을 대통령님 만큼이나 아끼셨습니다."

- 다음 카페 '강금원으로부터 살아감에 용기를 얻는 사람들의 모임'을 통해 아버지를 추모하고 그리워 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평소 그 분들과 소통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 분들에게 아들 입장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모임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좋아해 주시고, 그리워해 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들 입장에서 너무 고마울 뿐입니다. 더구나 아무런 이해 관계도 없는 분들이 이렇게 제 아버지를 좋게 기억해 주시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강금원 회장의 아들로서 아버지가 남긴 유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원칙과 소신, 그리고 '보편 타당한 상식을 가지고 주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라' 하는 것입니다."

- 마지막 질문입니다. 강 이사님 입장에서 귀한 두 분이 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 강금원 회장님과 주례 선생님이셨던 노무현 대통령님이십니다. 지금 먼 곳에 가진 이 분들께  꼭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2008년이었는데 당시 퇴임하신 대통령님이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골프장에 종종 오셨습니다. 그때 골프장에 수양 벚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유독 대통령님께서 그 나무를 좋아하셨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장난삼아 "원하시면 그 나무를 대통령님께 팔테니 사시지요. 다만 파서 어디로 가져 가시지는 마시고 그냥 여기 오실 때마다 '내 나무다' 하십시오"라고 하신 겁니다. 그러자 대통령님께서 웃으며 "그럼 얼마에 팔거요?"라고 하시자 아버지가 "만 원만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대통령님께서 진짜 만 원을 주셨는데 이후 오실 때마다 "내 나무 잘 있냐"며 나무에게 말을 걸며 참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대통령님이 서거하신 후 그 나무가 시름 시름 죽어가는 겁니다. 당연히 온갖 방법을 다 써서 살리려했지만 결국 나무가 죽어 지금은 그 밑둥만 남아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모든 일이 참 가슴 아프고 안타깝습니다. 생전 대통령님께서 그리 아끼시던 나무이니 가져 가신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합니다. 그래서 그리 믿고 좋아하시던 두 분이 지금은 그 나무 아래에서 잘 지내고 계시지 않을까 좋게 생각도 합니다. 제가 두 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항상 잊지 않고 제가 두 분이 못 이루신 큰 뜻을 조금이나마 이어나갈 수 있도록 살며 노력하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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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