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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개월 동안 남편(미국인)과 인도·네팔·동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여자와 미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남자가 같이 여행하며 생긴 일, 또 다른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겪은 일 등을 풀어내려고 합니다. - 기자 말

숲 안에 오롯이 들어선 작은 마을 오르차
 숲 안에 오롯이 들어선 작은 마을 오르차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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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차올랐다. 작은 마을은 머지않아 향신료 냄새로 가득 찼다. 범인은 알루 찻(aloo chat)이다. 마을 길가 한쪽에 웃통을 벗은 아저씨가 자리를 잡고 앉아 커다란 냄비에 감자와 향신료를 볶는다. 잎을 야무지게 포개어 만든 그릇에 연기가 가득 피어오르는 감자가 담긴다. 수염을 길게 두른, 해탈한 듯한 아저씨의 모습이 따끈한 알루 찻 한 그릇보다 중요한 건 또 어디 있느냐고 묻는 듯하다. 든든한 간식으로 배를 따뜻이 채운 우리는 흐뭇한 마음으로 햇살 가득한 오르차의 오후를 어슬렁거리며 지나갔다.

숲 안에 오롯이 들어선 작은 마을 오르차

오르차는 쉬지 않고 걸으면 한두 시간 안에 온 마을을 돌아볼 수 있는 크기의 작은 마을이다. 연초록의 밭과 부드러운 흙색의 길 사이사이에 중세시대 궁과 사원이 빛바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솟아 있다. 숲 안에 오롯이 들어선 작고 예쁜 마을. 15세기 분델라 왕국의 왕 루드라 쁘다땁이 오르차를 수도로 정한 데에는 적으로부터 왕국을 지키려는 전략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숲에 둘러싸인 위치 덕분에 왕국은 세월로부터도 안전하다. 수백 년이 지난 오늘도, 별다른 보존 작업 없이도, 그때의 유적들이 거의 완벽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다.

연초록의 오르차 마을
 연초록의 오르차 마을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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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록의 밭길을 지나 라자 마할(Raja Mahal, 왕의 궁전)로 들어섰다. 수대에 걸친 왕과 왕비들이 왕국의 관리와 하인, 말, 코끼리 등과 함께 살았다는 곳이다. 궁전 안의 왕실은 신과 인간, 동물 등을 그려놓은 세밀한 벽화로 꾸며져 있다. 라자 마할과 이어진 길을 따라가면 제항기르 마할(Jehangir Mahal)이다. 왕이 머물렀던 라자 마할보다 웅장해 보이는 4층 규모의 이 궁전은, 17세기 하룻밤을 머물기 위해 오르차를 방문했던 무굴 제국의 황제 제항기르를 맞이하기 위해 지어진 곳이다.

당시 인도 전역을 장악했던 무굴제국은 중세 시대 여느 왕국과 다르게 장자 상속제를 따르지 않았다. 가장 능력이 있는 왕자가 왕이 될 수 있는 비교적 민주적인 제도였지만, 오히려 왕위를 세습하기 위한 왕자들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악바르 황제의 아들 살림 왕자 역시 아버지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켜 왕이 되려다 실패하고 오르차의 분델라 왕국에 몸을 숨긴다. 이 살림 왕자가 바로 3년 후 무굴제국의 황제가 되는 제항기르이다.

오르차의 유적지
 오르차의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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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된 제항기르의 권력이 강해짐에 따라, 제항기르를 도왔던 분델라 왕국도 융성한다. 하지만 제항기르도 아들 샤자한(훗날 타지마할을 지은 무굴제국의 황제)의 반란으로 왕위를 빼앗기고, 제항기르만 바라보던 분델라 왕국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갈 곳을 잃은 분델라 왕국은 무굴제국에 대항에 반란을 일으키다 무참히 패배하고, 수도였던 오르차 역시 폐허로 변한다.

웅장한 제항기르 마할의 모습은 한때 분델라 왕국이 꿈꾸다 스러진 욕망의 쓸쓸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셀 수 없이 많은 방을 지나 좁다란 계단 길을 따라 올라갔다. 꼭대기 층으로 가니 오르차의 유적들과 소박한 마을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극히 제한된 수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만 돌아다닐 수 있었을 왕궁과 사원들을 다람쥐처럼 마음껏 돌아다니고 있자니, 이것이 현대를 사는 여행자들의 특권이 아닌가 싶다.

오르차의 고성
 오르차의 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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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차의 제항기르 마할
 오르차의 제항기르 마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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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항기르 마할 옆에는 왕비의 궁전인 쉬시 마할(Sheesh Mahal)이 있다. 성 일부를 개조해 호텔과 식당으로 만들어 놓은 곳이다. 뜨겁게 쬐는 인도의 햇볕을 한 달 동안 등에 달고 다녔다. 그 햇볕을 시원하게 쓸어줄 시원한 맥주 생각이 간절하다.

"곧 발렌타인(밸런타인) 데이니까. 그 기념으로 오늘 여기서 저녁 먹자. 맥주도 한잔 하고."

맥주! 간만의 사치를 위해 아직 오지도 않은 발렌타인 데이라는 변명을 구색해낸 우리는, 식당을 예약하고 남은 두 시간을 보내기 위해 다시 동네로 나갔다. 근 한 달 만에 마시는 맥주 생각에 신이 난다. 누구라도 용서하고,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배드민턴 칠래요? 돈은 안 줘도 돼요

좁다란 골목에 들어서자 배드민턴을 치고 있는 두 명의 어린 여자아이가 보였다. 아이들은 골목을 들어선 이상한 아시아 여자와 백인 남자를 발견하고는 잡고 있던 배드민턴 채를 당장에 내던지고 우리에게 달려왔다.

"배드민턴 칠래요?"

의심부터 들었다. 바라나시에서 내 손을 잡아주고 초콜릿을 요구한 꼬마를 만난 이후로, 아이들을 순수하게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망설이자 언니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내 팔을 붙잡고 칭얼댔다.

"노 머니, 저스트 플레이! 노 머니!(돈 안 줘도 돼요, 그냥 배드민턴만 쳐요)"

내 의도를 눈치챘는지 여자아이는 "노 머니"라고 반복해 외친다.

"그냥 가자. 분명 바라는 게 있을 거야."

더스틴이 속삭였다. 하지만 나를 올려다보는 여자아이의 간절한 눈빛을 보고 그냥 갈 수는 없었다. 정말 배드민턴을 같이 치고 싶을 뿐인 것 같았다.

"그래 치자."

한참을 망설이다 내가 승낙하자 두 여자아이는 신이 나서 배드민턴 채를 다시 잡아들었다. 두 아이는 서로 내 상대가 돼서 플레이를 하겠다고 아웅다웅 다투었다. 이내 언니로 보이는 아이가 승리하여 나와 배드민턴을 치는 영광을 누렸다.

오르차 마을의 아이들
 오르차 마을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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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들이 검게 물들여 놓은 인도 땅에 이렇듯 순수한 아이들이 아직 남아 있다니. 나는 잠시라도 이 아이들을 의심했던 죄책감을 씻고자 10여 분간 열의와 성의를 다해 배드민턴을 쳤다. 불안한 눈빛으로 나와 아이들을 바라보던 더스틴의 기분도 조금 풀어진 눈치였다. 거봐 다 그런 건 아니잖아. 나는 더스틴의 동의를 구하려 눈을 찡긋해 보였다.

땅에 떨어진 공을 줍던 여자아이가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디스 볼, 피프티 루피. (이 공, 50루피에요)"

상황을 알아챈 더스틴이 그것 보라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도 아이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 채를 내려놓고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언니인 여자아이가 달려들어 내 손을 힘껏 이끌었다.

"우리 아빠 가게가 바로 이 앞이에요. 구경하고 가요. 구경만 하면 돼요. 제발 구경하고 가요."

아이는 나를 놓칠세라 있는 힘껏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나는 미안하기도 했지만, 아이가 속임수를 썼다는 괘씸한 마음이 들어 어떻게든 아이를 따돌려 골목을 빠져나왔다.

"그거 봐, 수지. 공짜는 없는 거야. 특히 인도에서는, 모든 사람이 너한테서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고."

오르차의 고성
 오르차의 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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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긋지긋한 인도... 결국은 여행자들 때문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꼬마 아이들이 '스쿨펜'을 요구했다. 거절하고 돌아섰더니 아이들이 돌을 집어 던지는 시늉을 한다. 나름 풍족해 보이는 집 앞을 지나가는 데 엄마가 10루피를 달라고 하라며 아이의 등을 떠밀어 우리에게 보낸다.

지긋지긋하다. 항상 우리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이곳 사람들도, 한순간도 의심을 놓아선 안 되는 상황들도. 나를 돈 몇 푼 쥘 기회 그 이상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이 이제는 넌덜머리가 난다. 동정심에 돈을 쥐어주고 싶은 마음을 참는 것도 너무 힘들다.

기분이 말이 아니었다. 더러운 기분이 표정에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는지 더스틴은 여기 사람들을 그렇게 쉽게 믿어선 안 된다며 일장연설을 늘어놓는다. 기분이 바닥까지 추락한 나는 호텔로 돌아와 폭발해 버렸다.

"그럼 사람들을 계속 의심해?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거 아냐."

내친김에 다른 말도 좀 하자.

"그리고 왜 그렇게 게을러? 하루면 돌아볼 수 있는 여기에서 왜 삼사 일이나 있자고 하는데? 침대에 누워있다가 동네 어슬렁거리는 것 말고는 도대체 하고 싶은 게 없는 거야?""

이틀 전 만난 스페인 친구들처럼 바쁘게 돌아다니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하는 것 없이 게으르기만 한 우리의 모습에 싫증이 나는 건 사실이었다. 여행 전 읽은 여행기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의 여행은 형편없이 느껴졌다. 짧은 시간에 여러 유적지를 돌아볼 만큼 부지런하지도 않고, 독특한 경험을 하려는 노력도 없는 우리의 여행이 멋대가리 없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시간 낭비에 불과해 보였다. 그토록 멋지고 로맨틱해 보이던 여행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젖어서 내던져진 휴지 조각처럼 쪼글쪼글하고 처량하게 느껴졌다.

오르차의 제항기르 마할
 오르차의 제항기르 마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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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좀 천천히 다니는 게 뭐가 나빠? 그리고 자꾸 왜 다른 사람들 여행이랑 비교하는 거야?"
"천천히 다니는 것도 좋지만, 가끔 새로운 것도 좀 해보자는 얘기지. 여행 오기 전에 했던 얘기 많잖아. 홈스테이도 할 수 있고 자원봉사도 할 수 있고…."

"오르차에 있는 홈스테이? 같이 봤잖아, 서양 사람이 운영하면서 지역 사람들한테는 돈 몇 푼 돌아가지도 않는 구조라고. 결국에는 이곳 사람들 가난을 상품화해서 구경 시키고 팔아먹는 것뿐이야. 자원봉사도 신중히 하고 싶다고 같이 얘기했잖아. 하루나 이틀 자원봉사해서는 착한 일을 한 냥 우리 기분만 잠시 좋아지는 것 말고는 달라지는 게 없다고."

부인할 수는 없었다. 내가 상상했던 여행과 그 실상에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는 건, 나도 오래 전부터 깨닫고 있던 바다. 외면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하루 이틀 한 자원봉사에 지역 사람들이 어떤 영향을 받건, 홈스테이로 머문 가정이 어떤 영향을 받건, 잠시 외면하고 내가 멋진 여행을 하고 있구나 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다투기까지 한 마당에 16세기의 왕궁에 들어선 멋진 식당에서 데이트할 기분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맛있는 음식과 맥주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식당으로 들어서자 오르차 왕국을 방문한 제항기르 황제라도 맞은 양 잘 차려입은 웨이터들이 오래 입어 구멍 난 옷을 입은 후줄근한 우리를 반갑게 맞는다. 식당 한 곳에는 음악단이 들어앉아 전통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좋은 분위기 덕에 화난 마음도 누그러들고 화해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내가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건 사실이야. 게으름 피우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뭐 좀 해보겠다는데 항상 초 치는 것도 미안해. 사람들 돕는 것도 좋지만, 내가 한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되건 말건 내 감정만 앞세우는 게 조심스러워서 그래. 그래도 사실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잖아. 홈스테이하고 싶으면 내일 한 번 가보자."

언제나 그렇듯 더스틴이 먼저 잘못을 인정한다.

"다른 데서 하자. 여기서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아. 네가 한 말, 싫지만 사실이지 뭐. 사실 관광객들이 망쳐 놓은 것들도 많아. 소박하게 잘살고 있는 사람들 괜히 건드려서 경제적으로 풍족한 곳에서 온 사람들처럼 살고 싶다는 환상을 불어넣은 것도 우리 여행자고. 그냥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뿐인데, 주제넘는 동정에 지역 사람들을 비참한 기분으로 만들어 놓는 거, 무감각한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자꾸 우리랑 다른 여행자 비교하는 버릇도 고칠게. 우리식대로 여행하면 그만인데. 나랑 남을 비교하는 버릇은 떠나왔어도 쉽게 고쳐지지가 않네."

오르차 쉬시마할의 전통 음악단
 오르차 쉬시마할의 전통 음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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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신료에 절여 화덕에 구워낸 탄두리 치킨에 킹피셔 맥주를 한잔하니 다시 모든 것이 희망차 보인다. 항상 무언가를 바라는 이곳 사람들도 다 나름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내가 이곳에서 태어났다면 나 역시 다른 모습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현실을 똑바로 보고 비판적인 태도는 유지하되, 더 좋은 방법을 찾는 건 게을리하지 말자고 결론을 내렸다.

맛있는 음식과 고풍스러운 분위기, 그리고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희망으로 몸과 마음을 두둑이 채우고 식당을 나섰다. 아름다운 전통 음악을 연주해준 음악단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연주자 중 한 명이 우리를 바라보며 씨익 웃으며 말한다.

"팁 플리즈?"

역시 공짜는 없다.

오르차의 고성
 오르차의 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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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오르차, #오르차 고성, #제항기르 마할, #카주라호 ,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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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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