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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는 부정과 부조리를 고발하는 '양심선언자' '내부 고발자' 등이 늘 존재했습니다. 이들의 용기로 한국 사회는 조금 더 밝아졌고 깨끗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익제보자'라 불립니다. 국가 기관, 기업, 학교 등에서 내부의 부정부패를 고발한 그 공익제보자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그들의 용기 덕분에 좋아진 사회만큼, 안정된 삶을 보장받고 있을까요? 한국에는 '공익신고자 보호법'과 '부패방지법'이 있지만 완전하게 공익제보자를 보호하지 못합니다. <오마이뉴스>는 '공익제보자, 그 후' 기획을 시작합니다. 공익제보자의 현재를 통해 제도 보완 등을 고민하는 단초가 되길 기대합니다. [편집자말]
난리법석이다. 꼬리 밟힌 의혹들이 줄줄이 끌려 나온다. 정보기관만이 아니라 군과 행정기관까지 '대통령 만들기'에 동참했다. 정보기관과 군, 국가기관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도록 한 민주주의의 기초적 합의가 무너졌다. 

자칫하면 묻힐 뻔했다. 은밀하게 자행된 선거 개입 실체가 드러나기까지, 보이지 않는 이들의 역할이 컸다. 바로 내부고발자들이다. 위법 행위를 요구받은 이들은 대부분 충실히 동참했다. 하지만 일부는 자기 양심의 목소리를 따랐다. 국정원의 여론 조작과 대선 개입이 외부에 알려지기까지, 군사이버사령부의 정치 개입이 폭로되기까지, 경찰의 조직적인 은폐 시도가 규명되기까지, 이들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용기 있는 내부고발. 떠오르는 이가 한 명 있다. 이지문(현 45세)씨. 삼성그룹 장교 공채로 입사가 확정된 후 ROTC로 백마부대에서 중위로 복무할 때였다. 그는 1992년 총선을 앞둔 3월 22일, 장병들에게 여당을 찍으라며 공개투표를 강요한 선거부정을 목격하고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공선협)를 찾아간다. 정국을 뒤흔든 '군 부재자투표 부정사건'의 전모가 폭로되는 순간이었다. 

지난 6일, 신촌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현재 공익제보자 모임인 호루라기재단 상임이사로 일하며 연세대에서 강의를 한다. 

군 부재자투표 과정에서 일어난 선거부정을 목격한 이지문 중위는 1992년 3월 22일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를 찾아 양심선언을 한다. 그의 고발 이후 군 부재자 투표는 영외에서 하도록 선거법이 바뀌었다.
▲ 군부재자투표 부정선거를 고발중인 이지문 중위 군 부재자투표 과정에서 일어난 선거부정을 목격한 이지문 중위는 1992년 3월 22일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를 찾아 양심선언을 한다. 그의 고발 이후 군 부재자 투표는 영외에서 하도록 선거법이 바뀌었다.
ⓒ 경실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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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군 부재자투표... 1번 찍으라면서 공개투표 했다"

- 여러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으로 나라가 시끄럽다. 
"내가 내부고발을 할 때만 해도 군, 정보기관, 행정기관이 동원된 선거 개입이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최소한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마련됐고,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은 사라졌다고 믿었다. 지금은 이런 신뢰가 산산 조각났다. 우리 민주주의가 이 정도였나? 그런데 사회적 공분은 너무 약해졌다. 20년 전에는 관권선거, 부정선거에 대한 내부고발을 인정해 주는 분위기가 있었다. 지금은 이런 제보나 고발을 하면, 권은희 수사과장 사례처럼 출신 지역이나 이념, 지향을 의심하며 그 뜻을 왜곡한다.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하는 국민정서도 문제다." 

- 1992년 선거부정 이야기를 다시 듣고 싶다. 
"그때는 작년처럼 총선과 대선이 같은 해에 있었다. 연대장이 대대 병력이 모인 자리에서 '지금 대통령이 (득표율) 36.6%로 당선했는데, 북한이 대남방송으로 정당성 시비를 걸고 있다. 이럴 때 더욱 안정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말하고 갔다. 그 즉시 대대장이 장교하고 직업하사관을 소집해서 '국군 최고 통수권자는 누구냐? 대통령이다. 소속당이 어디냐? 민자당이다. 대통령이 속해 있는 여당에 투표하는 것이 충성이라 생각한다. 간부들도 자기 병력에 그렇게 하라'고 지시했다."

- 그 지시는 어떻게 이행됐나?
"당시, 4월에 있을 장교 인사고과에 여당지지 득표율이 반영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우리 대대에 속한 5개 중대 중 한 중대에서는 중대장이 보는 앞에서 여당을 찍도록 공개투표를 했다. 인사계 주임상사가 보는 앞에서 공개투표를 하거나, '1번을 찍으라'고 정신교육을 받은 중대도 있다. 우리 중대장은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분이었는데, '군이 왜 정치에 개입하는지 모르겠다. 내버려 두라'고 했다. 그래서 100명 정도인 우리 중대에서 투표용지가 먼저 온 나를 포함한 13명은 소신껏 투표했다. 그랬더니 대대장이 나를 불렀다. '중대장이 (1번을 강요)하지 않으면 소대장인 너라도 나서야 아는 것 아니냐? 난 네가 누구를 찍었는지 알 수 있지만 알아보지는 않겠다'는 식으로 협박했다."

- 그래도 그 중대장은 양심적인 군인이었다.
"그랬다. 그런데 중대장에게 기무사에서 연대에 파견한 보안반장이 찾아왔다. 보안반장과 한 30분 정도 대화한 후 중대장이 소대장들을 불렀다. 서신검열기로 우리가 누구를 찍었는지 다 파악하니, 우리 중대가 문제되면 대대와 연대에도 파급효과가 미친다,  여당 지지가 낮으면 안 된다고 했다더라. 물론 국방부에서는 서신검열기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육사 나온 중대장은 서신검열기가 존재하고 투표 결과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중대장은 소신을 접었다. 중대원들을 모아 놓고 '아직 마음 안 정했으면 1번 찍어달라'고 했다. 그 정도면 최소한의 시늉만 한 거다."

- 그런 건 처음 있는 일이었나?
"군 부재자투표가 그렇게 진행된 건, 1970~1980년대 군대 갔던 사람들에게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런데 1991년 지방선거 할 때 (부정선거 없이) 그냥 투표하게 했는데, 야당표가 너무 많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군이 다시 움직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나는 말단 소대장이어서 어느 정도 규모로 선거 부정이 진행됐는지 모르지만, 우리 대대에서는 분명히 선거부정이 있었다. 기무사에서 연대로 파견한 기무반장의 태도를 봤을 때 결코 우리 대대나 연대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양심선언으로 선거 제도 바뀌었다"

- 그래서 시민단체를 찾아가 폭로했나?
"내가 부정선거를 폭로하기 바로 직전, 공군 ○○○사령부 사령관이 여당 찍으라는 정신교육을 했다는 기사가 났다. 정치군인들이 다시 나선다고 봤고, 막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군대 안에서 투표하면 공정한 통제가 어렵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와서 참관을 하거나, 공정한 제도 마련을 위해 시민단체가 운동이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공선협에 찾아갔다."

- 기자회견 후 바로 구속됐다.
"무단이탈 때문이다. 위수지역(부대가 있는 인근 지역)을 벗어날 때는 대대장에게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보고하면 당연히 안 보내 줄 테니까 그냥 나왔다. 당시는 인터넷도, 핸드폰도 없던 때다. 공중전화도 보안이 안 되니, 직접 찾아갈 수밖에 없지 않나. 일요일 비번시간을 이용해 서울로 갔다. 무단이탈을 이유로 기자회견 직후 바로 구속됐다. 군은 명예훼손도 적용했다. 기자회견 후 군에서 합동조사단을 만들어 내가 속한 대대원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다. '이지문 중위 이야기가 사실인가? 정말 여당 지지 정신교육이나 공개투표가 있었느냐?'고 물었는데, 단 한 명도 사실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국방부에서는 사실무근이라고 공식 발표하고, 내가 장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 재판은 받았나?
"기소유예 됐다. 기소해서 재판으로 가면 계속 쟁점이 되니까 위에서 부담스러워 했다. 기소유예로 석방하는 대신 이등병으로 강등, 파면됐다. 1995년 2월 대법 판결로 중위 신분을 회복했다. 대대 군인 중 전역한 장교 1명과 역시 전역한 사병 2명이 재판에 나와서 공개 투표한 사실이 있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무단이탈은 징계사유지만, (부정선거 폭로) 증언은 사실이라 파면은 재량권을 넘어선 지나친 처사'라고 결정했다."

- 쉽지 않은 선택과 용기였는데, 이후 바뀐 것은 뭔가?
"선거제도가 바뀌었다. 그 해 대통령 선거부터 영외 투표, 그러니까 군대 밖 민간에서 투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공개투표가 원천적으로 차단됐다"

"난 데모 한 번 안해 본 부산 출신"

- 두렵지는 않았나?
"1990년에 큰 내부고발 두 개가 있었다. 이문옥 감사관이 감사원의 재벌비리 은폐 사실을 폭로했고,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폭로했다. 이문옥 감사관은 비밀누설 혐의로 형사처벌 받았고, 윤 이병도 1992년 당시에는 2년째 수배중이었다. 이런 사실을 잘 알았기에 내가 고발하면 군 감옥에서 몇년 썩는 게 아닌가 싶었다. 사회에 나오더라도 삼성그룹 특채 입사도 취소될 것이고... 뭘 먹고 살아야 하나,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것 아닌가 싶었다. 내가 87학번이지만, 한 번도 시위에 참여한 적은 없었다."

- 단 한 번도? 어떤 언론은 '6월항쟁 때 데모대를 따라다녔을 수도 있다' 보도했는데.
"잘못된 기사다. 단 한 번도 없었다. 완전한 비운동권이었다. 시위대 끝자락에도 선 적이 없다. 그래서 '혹시 잘못 되면 운동하면 되지 뭐'라는 생각도 못했다. 집에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으니, 앞날에 대한 걱정이 제일 컸다. 큰누님 남편이 육사 나온 직업군인이었는데, 나 때문에 피해를 볼까 걱정됐다.

하지만 제일 큰 걱정이면서, 가장 큰 (고발) 동기는 우리 중대장이었다. 어쩔 수 없이 (선거부정에) 참여한 중대장도 나 때문에 처벌받을 수 있고, 부하 관리를 잘못한 책임으로 징계받을 수 있으니까. 인간적인 미안함이 컸다. 만약 이 분이 대놓고 선거부정을 강요했다면 덜 미안했을 거다."

- 고향은 어딘가.
"경남 양산에서 태어났는데, 출생신고를 부산에서 했다. 그래서 (양심선언) 기자회견문에는 '부산 생'이라고 적었다. 그때는 왜 공선협에서 고향을 적는지 몰랐다. 만일 내 고향이 호남이었다면 '민주당 지지하려고 양심선언 했다'는 공격을 우려해 그랬던 것 같다. 권은희 과장이 그렇게 공격받지 않았나? 양심선언을 물타기 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이다. '너 호남 출신이지?' '저 사람은 좌빨(좌익 빨갱이)이다' 하는 것이다. 나에게도 '운동권이 사주한 것 아니냐'고 했지만, 데모 한 번 안 한 부산 출신이어서 그런 공격은 없었다."

- 내부고발을 대하는 자세가 그때와 달라진 게 별로 없는 것 같다.
"몇 달 전, 한 극우단체가 운영하는 인터넷 매체에서 내 이름을 봤다. 칼럼이었는데, 이문옥, 윤석양, 이지문은 호남출신이라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잘 먹고 잘 살았고, 비호남 내부고발자는 차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권은희 과장 이야기로 시끄러울 때였다. 내가 바로 전화해서 내 고향은 호남도 아니고, 출신 지역을 따지는 그런 칼럼은 온당하지 않다고 항의했다. 그랬더니 칼럼에서 내 이름만 쏙 뺐더라. 내부고발은 이념과 출신 지역에 따라 하는 게 아니다.(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상식과 합리성,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내부고발 이후 힘들었지만... 후회는 없다"

- 내부 고발 이후 어땠나?
"군에서 바로 나와 다행히 '왕따'는 겪지 않았다. 삼성그룹을 찾아갔더니 '우리는 장교특채를 했는데 넌 이등병이라 입사 자체가 무효'라고 하더라. 1995년 대법원에서 파면이 취소돼 다시 찾아갔더니 '인사기록이 소멸됐다, 다시 시험 보라'고 하더라. 2010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아 다시 찾아갔더니 '일할 수 있는 곳이 없다'고 했다."

- 그래도 유명 인사였는데, 책임지겠다는 사람이 없었나?
"공무원은 파면 당하면 5년 동안 공직에 못 나간다. 군에서 25살에 나왔으니,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당시 국민당을 만들어 대선을 준비한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아들 정몽준 의원이 ROTC선배였다. 내가 구속됐을 때 국민당과 현대그룹이 석방 촉구 서명운동을 열심히 해줬다. 나중에 정주영씨가 입당을 권했는데 거절했다. 정몽준씨가 '현대에서 받아줄 테니 시험을 보라'해서 원서는 냈는데, 필기시험 날에 가지 않았다. 실력이 아닌 내부고발로 부당한 특혜를 받는다는 생각이 들더라. 또, 입사하면 선거 때 이용당할 수도 있고."

- 그럼 어떻게 살았나?
"1993년 여름부터 을지로 인쇄골목에 사무실을 얻었다. 시민단체 자료집 등을 인쇄하는 일을 했다. 1년 반 동안 한 달에 2백만 원 정도 벌었다. 불안했다. 동기들은 삼성에 들어갔는데, 난 호구지책이었다. 요새 <응답하라 1994>가 방송돼 '난 그 때 뭐 했나' 돌아봤더니,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 그때는 양심선언을 조금 후회했을 것 같다.
"내 양심선언으로 영외 투표로 바뀌었으니, 안 한 것보다는 한 게 나았다. 어쨌든 잘못 된 것을 밝혔으니까. 내 삶은 개인의 문제일 뿐이다."

- 그럼 지금 하고 있는 내부 고발자들을 위한 시민단체 활동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파면이 취소되고 1995년 지방선거에 출마해 서울시의원이 됐다. 임기 마치고 2000년에 잠시 미국에 머물면서 진로 고민을 했다. 결국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반부패 운동, 공익제보자를 위한 '호루라기를 부는 사람들'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지금은 연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반부패 강연, 대학 강의 등을 병행중이다.

이지문씨는 공익제보자를 위한 시민단체인 '호루라기재단' 상임이사로, 각종 부패방지와 내부고발자 보호를 위한 활동을 펼쳐 나가고 있다.
▲ 호루라기재단 상임이사로 활동중인 이지문씨 이지문씨는 공익제보자를 위한 시민단체인 '호루라기재단' 상임이사로, 각종 부패방지와 내부고발자 보호를 위한 활동을 펼쳐 나가고 있다.
ⓒ 참여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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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제보자 보호법이 있긴 하지만..."

- 이제 요즘 이야기를 해보자. 정보기관과 군, 행정기관의 대선 개입 문제로 정국이 뜨겁다. 사건의 실체가 드러난 데에는 내부 고발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정원 사건의 경우, 내부 직원이 전직 국정원 직원에게 제보하고, 전직 국정원 직원이 야당에 제보한 것으로 알고 있다. 현재 당사자들은 부인하고 있지만. 군사이버사령부 현직 군인의 제보도 큰 역할을 했다. 문제는 이런 경우에는 법적 보호를 못 받는다는 점이다."

- 왜 보호를 못 받나.
"공익제보자를 위한 법은 현재 두 개다. '부패방지 및 국민권익위원회의 설치와 운영에 관한 법률'(2002년 제정된 부패방지법 승계)은 공공부문의 부패 행위를 신고하게 하고, 제보자를 보호하는 법이다. 다른 하나는 '공익신고자 보호법'(2011년 입법)인데, 민간분야의 공익침해행위를 신고했을 때 보호해주는 법이다. 하지만 이들 법에는 맹점이 있다. 군사이버사령부가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한 행위와 국정원이 조직적인 댓글을 단 것은 부패행위에 해당한다. 문제는 법에 따르면, 검찰이나 경찰, 감사원, 국민권익위원회, 혹은 부패 당사자가 속해 있는 기관이나 그 기관을 지도 감독하는 공공기관에 내부고발을 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언론이나 시민단체에 하는 고발은 그 내용이 사실이어도 보호받지 못한다. 언론이나 시민단체에 고발한 사람이 현직 군인이라면 국방부에서 색출해서 비밀누설로 처벌해도 법의 보호를 못 받는다. 재판을 통해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

- 지금 같은 분위기에선 내부 부정을 검찰이나 군에 고발한다는 건 어렵지 않나?
"그렇다. 이번 대선 개입 사건의 경우, 검찰이나 경찰, 군에 제보하면 '조사가 계속 될까?'하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 관련 기관을 신뢰할 수도 없다. 부정으로 당선시키려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게다가 내부고발을 결심한 사람이 모두 법을 잘 알까? 그렇지 않다. 내부 부정·부패를 알려야겠다고 결심하면 쉽게 떠오르는 곳이 언론과 시민단체다. 그런데도 이를 법으로 보호하지 않는 것은 입법 취지에 맞지 않는, 국가의 편의주의적 발상이다. 언론, 시민단체에 고발해도 보호받을 수 있게 법을 개정해야 한다."

- 지금 상황에서는 내부고발이 쉽지 않겠다.
"내부고발이 '성공'했다고 판단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내부고발자가 불이익을 받지 않아야 한다. 둘째, 고발 내용이 조사되고 부패 당사자가 처벌받는 등 재발방지 조처가 이뤄져야 한다. 내부고발에서 두 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두 가지 모두 실패한다. 하나만 성공해도 잘 된 거라고 봐야 할 정도다."

- 내부고발을 쉽게 결심하지 못하거나, 실패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뭔가?
"얼마 전, 호루라기재단에서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내부고발자 50명을 인터뷰했다. '내부고발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만족과 후회를 가르는 결정적인 문제는 '지금 먹고 사는 게 있느냐, 없느냐'였다. 먹고 살 수 있으면 99%가 만족하지만, 먹고 살 길이 없으면 후회한다. 법의 보호제도 취지는 내부고발을 해도 해고 등 신분상 불이익을 받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국민권익위원회에서 5년, 10년 보호해 줄 수도 없다. 기업 입장에서는 당장 해고 못해도 인사 상 불이익, 왕따 등으로 알게 모르게 내부고발자를 도태시킬 수 있다. 보상금 생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최소한 내부고발자가 받던 연봉의 10년치 정도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 얼마 전 미국에서는 제약회사 화이자의 영업 비리를 내부 고발한 사람이 640억 원을 보상금으로 받았다. 부정·부패 신고해도 생계 문제가 없도록 해야 한다. 이런 게 생기면 내부의 눈이 무서워서 부정·부패가 억제된다."

1992년 4월 6일 청년연합회 등 재야 6단체 대표들이 국방부 앞에서 제14대 총선 군부대 부재자 투표 부정 관련 농성 시위를 벌이고 있다.
 1992년 4월 6일 청년연합회 등 재야 6단체 대표들이 국방부 앞에서 제14대 총선 군부대 부재자 투표 부정 관련 농성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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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명? 국민에게 충성은 당연"

- 이런 법의 허점에도, 내부고발을 감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검찰이 윤석열 수사팀장에 대해 하극상, 항명이라고 몰아붙이는 걸 봤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항명의 대상이 과연 누구인가? 검찰총장인가, 대통령인가? 어떤 공무원이든 충성 대상은 국가와 국민이다. 헌법과 민주주의를 역행하는 행위가 국민에 대한 하극상이고 항명이다. 그런데 국가와 국민에게 하극상, 항명 하는 사람들이 국민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있다."

- 지금도 혹시 내부고발을 고민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도 만일 그때(1992년) 인터넷이 있었다면 (내부고발을) 못했을 것 같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사돈에 팔촌까지 찾아내 인식공격을 한다. 파면이나 감옥은 감당하면 되는데, 인신공격은 견디기 힘들다. 그래도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로 가는 탄탄대로를 닦는데 돌 하나 얹는 심정으로 제보한다면 역사에 남지 않을까? (선거 개입에) 참여했거나 수사 과정을 부당하게 왜곡한 사람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이야기해 주면 좋겠다. 내부고발자를 안고 갈 수 있는 힘이 우리 사회에 있다고 믿는다."

- 만일, 지금 내부고발을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첫째, 반드시 증거자료를 확보해야 한다. 문건이든 녹취든. 둘째, 꼬투리 잡히지 말아야 한다. 군법이나 공무원법을 위반하는 행동을 하지 말라. 예를 들어, 근무시간에 와서 고발하는 것이나 군 안에서 연락을 주고받아도 안 된다. 마지막 셋째는, 내가 내부고발을 했을 때, 나에게 동조할 수 있는 우호적인 사람들을 만들어야 한다. 이 세 가지는 반드시 준비해야 한다."

이지문씨는 단 한 번의 기자회견으로 안정된 길을 스스로 걷어찼다. 명문대를 나와 국내 최고 대기업 합격통지서를 받은 그는 위법한 명령에 복종하는 대신 양심을 선택했다. 그 죄로 고생길을 걸었다. 그것은 불확실한 가능성에 도전한 대가가 아니라, 확실한 고생길의 선택이었다. 

한국 사회는 이지문씨 같은 사람들 덕에 조금이라도 투명해졌다. 그러나 오늘, 다시 그 공정함과 투명함이 위협받고 있다. 이 순간 누군가는 또 어디에선가, 조직의 명령과 자기 양심의 소리 사이에서 고뇌하고 있을 것이다. 이지문씨의 말처럼, 그들에게 '고발'을 강요할 수는 없다. 고발 이후의 삶을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심장을 두드려 대는 양심의 소리를 더는 외면하기 어렵다면, 작은 용기라도 내보기를 권한다. 상담하라. 이지문씨가 상임이사로 있는 공익제보자들을 위한 '호루라기 재단'의 전화번호는 02-2068-6930, 팩스는 02-2068-6963, 주소는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6가 339-3 환희빌딩 402호'다.


태그:#내부고발, #이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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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보다는 공통점을 발견하는 생활속 진보를 꿈꾸는 소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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