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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2500년 전 공자가 <논어>에 처음으로 적은 문구입니다. 2013년 대한민국도 '배우고 익히는' 열기가 뜨겁습니다. 청년들은 취업을 위해, 아이들은 보다 나은 성적을 위해, 직장에선 살아남기 위해 공부하고 또 공부합니다. 한 마디로 공부에 빠진 대한민국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열심히 배우고 익혔는데 즐겁지 않습니다. 중요한 걸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함께 모여 '즐거운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이들 사례를 통해 공부가 왜 즐거운지 살펴봅니다. - 기자말


학생이 가져온 고구마를 권하고 있다.
▲ <안양시민대학> 최유경 교장 학생이 가져온 고구마를 권하고 있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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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좀 잡숴봐. 아침에 찐 거야."

수업 전 교무실을 찾은 임봉례 할머니는 찐 고구마와 요쿠르트 한 봉지를 놓고 갔다. 사진 한 장 찍자는 기자의 말에 "에이~ 아니여. 뭐 대단하다고" 손사래를 치며 자리를 피했다. 이어 들어온 오영심 할머니는 텃밭에서 길렀다며 상추 한 봉지를 주고 갔다. 책상 한편엔 이미 학생들이 놓고 간 뻥튀기며 빵, 과자가 한가득 있었다.

지난 달 30일,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시민대학(교장 최유경)을 찾았다. 학교는 안양역 인근 공구상가의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 3, 4층에 있었다. 계단을 오르던 학생들은 무릎이 시린지 걸음을 멈췄다 떼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아무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힘이 들면 층층이 마련된 감색 의자에서 잠시 쉬었다 갈 뿐이었다. 안양시민대학의 분주하지만 느린 아침은 보통 이렇게 시작됐다.

"왜 '대학'이냐고요? 육칠십년 살아온 분들이잖아요"

공부하고 싶던 어린 시절
▲ <나의 소원> 이정임 공부하고 싶던 어린 시절
ⓒ 안양시민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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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른 문자해득교육(이하 문해교육) 기관과 달리 안양시민대학은 학교 이름에 '대학'을 붙이고 있다. 최유경 교장은 이정임 할머니 시화를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인생을 육칠십씩 살아온 분들이에요.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기회와 용기가 선뜻 생기지 않아 그간 (배우지) 못했던 거예요. '대학'이라는 이름은 그분들 인생에 대한 존경의 표시입니다."

안양시민대학의 역사는 1991년 안양지역 청년운동단체였던 <두꺼비 한글교실>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은 교실, 야학 형태로 2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처음 한글 교실을 열었다. 이후 1996년 10월, '시민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첫 입학식이 열렸다. 약 100여명의 참가자와 자원교사가 모여 성인한글교실과 영어, 한자반을 운용했다. 지난 18년 동안 약 700여명의 학생들이 안양시민대학에서 문해교육과정을 마쳤다.

그 중 2012년 졸업식은 더욱 특별했다. 안양시민대학 개교이래 처음으로 '학사모'를 쓴 졸업생이 탄생했다. 경기도교육청의 초등학력인정 문자해득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한 16명 학생들이 배출된 것이다.

"학생회, 진짜 학교를 만듭니다"

안양시민대학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학교'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대표적인 게 바로 학생회 활동이다. 학급회의를 통해 모아진 학생들의 의견은 학교 운영에 적극 반영됐다. 이를 바탕으로 춘추계 소풍과 운동회, 공동체 식사, 교외 봉사 같은 학생주체 활동이 이루어졌다.

올 가을 첫 소풍을 다녀온 영어 알파벳반 임영자씨 역시 그날의 감동을 고스란히 편지에 담았다. 눈여겨 볼 점은 학교 소풍이 전하는 설렘은 환갑 학생이나 10대 소녀나 다르지 않았다. 임씨의 손 편지는 분홍빛 편지지와 알록달록한 바탕 위에 적혀있었다.

"내 나이 59세에 내 어릴 적 다니던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전혀 상상도 못한 일들이 나를 참으로 즐겁고 기쁘게 했다. 영화도 보고 맛있는 점심식사도 먹고 그런데 이제는 소풍도 간단다. 단양이라는 곳으로. 바빴지만 열일 제쳐 놓고 따라 나섰다."

최 교장은 안양시민대학의 문해교육은 단순히 글자 배우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 또한 학교의 주체적인 일원으로 함께 만들고 발전시키는 역할이 있음을 강조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따로 있었다. 40분씩 이루어진 수업 사이, 쉬는 시간에 학생들을 만나기 위해 교실을 찾았다. 휴식시간이 되었는데도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수능을 앞둔 고3 교실 같았다. 대부분 글자 쓰기에 몰두하거나 옆 사람과 조용히 담소를 나눌 뿐이었다. 진지했고 열의 가득찬 표정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학교에서의 배움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지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나도 한글 배웠습니다. 부모님께 편지 쓰고 싶습니다"

안양시민대학의 불은 저녁이 돼도 꺼지지 않았다. 야간반 때문이었다. 매주 화요일, 목요일 저녁 7시부터 2시간 동안 약 50여명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었다. 대부분 낮에 일하는 탓에 밤이 돼야 겨우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이러다 보니 최유경 교장의 하루도 굉장히 길었다. 보통 오전 9시 30분에 시작해 마지막 수업이 끝나는 오후 9시 경에야 정리가 됐다. 하지만 최 교장은 사람 좋은 미소로 답했다.

"학생과 교사라는 구분이 있지만 실제로 가르치고 배우다 보면 서로에게 배우게 됩니다. 특히 삐뚤어진 글씨로 자기 인생을 고스란히 담아놓은 글을 볼 때면 '아 내가 진짜 배우고 있구나'란 생각밖에 안 듭니다."

그러면서 정아무개 할머니가 적은 글 한 편을 보여줬다.

"부모님 나도 한글 배웠습니다. 편지 드리고 싶어요"라고 쓴 할머니의 편지.
 "부모님 나도 한글 배웠습니다. 편지 드리고 싶어요"라고 쓴 할머니의 편지.
ⓒ 안양시민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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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어려서부터 공부를 안 가르쳐 준 부모님 원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글을 배우고 보니 부모님이 안계십니다. 지금 계시면 '나도 한글을 배웠습니다'하고 부모님께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내가 부모님께 원망을 많이 했던 말을 용서해 달라고 하고 싶습니다. "

짧은 글 한 편에서 한 사람의 인생이 그대로 보였다. 한글을 몰라 한 평생 간직하며 살았을 두려움과 망설임, 형언할 수 없는 아쉬움이 녹아있었다.

이 부분에서 최유경 교장은 학생들의 마음 또한 치유돼야 함을 직감했다. 그로 하여금 안양시민대학만의 특별한 '미술 치유' 시간을 만들게 한 이유가 됐다. 이를 반영하듯 안양시민대학 교실과 복도엔 학생과 교사가 함께 꾸민 그림 작품들이 게시돼 있었다. 하나 같이 푸근하고 밝은 작품이었다.

"결국 공부는 즐거워야한다"

공부가 즐겁다. 쉬는 시간인데도 연필을 놓지 못한다. 움켜진 주먹에서 의지가 엿보인다.
▲ <안양시민대학> 공부가 즐겁다. 쉬는 시간인데도 연필을 놓지 못한다. 움켜진 주먹에서 의지가 엿보인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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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최유경 교장에게 다시 한 번 문해교육에 대해 물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글을 통해 자신의 삶이 발전하는 과정'이라 답했다. 그의 이야기는 이랬다. 학생들의 글을 보고 있으면 '사랑한다'는 말이 유독 많이 나온다. 배움 이전의 학생에게 사랑이란 배운 사람들이나 사용하는 고상한 단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본인도 배우고 익혔으니 '사랑'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일종의 자부심이 생긴 것이다. 이는 배움을 통해 일어난 자기 발전이다. 이것이 바로 진짜 배움이고 즐거운 공부였다.

"한 어머니는 글을 배우니 '간판이 보인다'는 말로 삶의 변화를 표현했어요. 말 그대로 세상에 더 나아갈 용기가 생긴 겁니다. 그 자체로 행복이고 감동인 거죠. 그러니 공부가 얼마나 즐겁겠어요. 느껴본 사람은 압니다. 스스로 변화하는 공부가 얼마나 즐거운지."

최 교장의 말대로라면 변화하는 배움이 있는 <안양시민대학>의 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글'로 소통하며 발전할 어머니 학생들의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기도 하다.


태그:#안양시민대학, #문해교육, #즐거운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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