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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평통사) 회원들이 22일 오후 국회 국방위 국정감사가 열리는 서울 용산구 국방부앞에서 '사이버사령부 대선개입 철저 수사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평통사) 회원들이 22일 오후 국회 국방위 국정감사가 열리는 서울 용산구 국방부앞에서 '사이버사령부 대선개입 철저 수사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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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을 치른 지 어느덧 1년이 다 돼간다. 그런데도 불과 엊그제 일처럼 느껴지는 건, 여전히 '대선'이라는 단어가 언론 등에서 오르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 의혹으로 촉발된 혼란이 좀체 잦아들 기미가 없다. 광장의 촛불도, 가톨릭 사제의 시국미사도 정권의 외압에 굴하지 않고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 이러다 날 새겠다."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검찰, 경찰 등 국가기관은 물론 신문과 방송사들이 총동원되다시피 해, 정권 보위를 위한 '엄호 사격'을 해대고 있으나 여론은 싸늘하다. 이따금 공개되는 대통령의 지지도 여론조사 수치조차 조작됐을 것이라고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을 시인하는 순간, 정통성을 의심 받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은 현 정부를 퇴행으로 몰아가고 있다. 야심차게 신설한 '미래창조'라는 부서 이름의 의미조차 퇴색시켜 버렸다. 말이 좋아 '종북'이지, 전가의 보도처럼 '빨갱이 사냥'에 나선 것이다. 분단된 현실과 서슬퍼런 국가보안법을 등에 업고 정부의 정책을 반대하는 순간, 누구든 '빨갱이'로 낙인 찍힌다.

종북은 차라리 '도깨비 방망이'다. 헌법기관인 야당 국회의원들조차 정부와 보수 언론으로부터 종북 세력으로 낙인찍힐까 봐 전전긍긍하는 게 현실이다. 국가보안법을 문제 삼는 목소리는 사라진 지 이미 오래고, '악법도 법'이라는 케케묵은 주장이 국회의원의 입에서 버젓이 나올 정도로, 우리 사회는 20~30년 전으로 완벽하게 회귀하고 있다.

삼척동자도 다 알 만한 음모와 '칼춤'은 계속되고 있지만, 여론은 정부의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 오직 진실만을 알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투표를 했든, 상대 후보를 지지했든 다 같은 국민인데,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절반의 국민을 과감히 적으로 돌리고 있다. 진영 논리에 기대어 서로 적개심만 부추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좌파 교과서인가?"... 교직 생활 16년 만에 처음 받은 질문

'친일·독재 미화 뉴라이트교과서 무효화선언 전국 학부모 기자회견'이 지난 9월 25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주최로 열렸다.
 '친일·독재 미화 뉴라이트교과서 무효화선언 전국 학부모 기자회견'이 지난 9월 25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주최로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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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약이 무효라고 여긴 것일까. 정부는 교과서와 학교 현장까지도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모험을 감행했다. 역사 왜곡으로 점철된 교학사 교과서를 두둔하면서 난데 없는 '역사 전쟁'을 선포했다. 또 지난 14년간 학교장의 전횡을 견제하고 학생 인권을 신장시키는 등 학교 민주화에 기여해온 전교조를 하루아침에 법외 노조로 내몰고 있다.

교사로 지낸 지난 16년 동안 요즘처럼 학교가 어수선했던 적은 없었다. 당장 내년에 사용할 한국사 교과서를 채택해 주문해야 하는데, 언제 완성본이 학교에 내려와 검토할 수 있을지 전혀 알 수 없다. 한국사를 제외한 다른 과목의 경우는 이미 채택이 끝났거나 늦어도 이달 말까지는 완료될 예정이다.

교과서가 연일 도마 위에 오르자, 아이들의 한국사에 대한 관심도 자극적인 뉴스에 따라 춤을 춘다. 예전에 없던 현상이다.

"선생님, 지금 우리가 쓰는 교과서는 '좌파' 교과서인가요, 아니면 '우파' 교과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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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가 된 이래 처음 받아본 질문이다. 적잖이 당황스러워,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교과서에는 좌우가 아닌, 사실과 왜곡이 있을 뿐"이라고 답했지만, 아이들은 굳이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며 안달이다. 몇몇 아이들은 다짜고짜 지금 사용하고 있는 건 '좌파' 교과서라고 말했다. 근거는 딱 하나. 정부와 여당이 지목한, 교학사 교과서를 제외한, 7종의 '좌파' 교과서의 출판사 이름 중에 우리 것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그렇듯 순진무구한 아이들에게 좌우의 개념과 교과서 서술의 구체적인 성향을 따져보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자칫 반론이라도 펼라치면 여지없이 아이들에게조차 종북 세력으로 내몰리기 십상이다. 6·25가 몇 년에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안중근과 안창호를 헛갈려 한다지만, '종북'이라는 말을 모르는 아이들은 없다.

'일베'의 종북교사, 바로 접니다

일베에 올라간 <백년전쟁> 안내글
 일베에 올라간 <백년전쟁> 안내글
얼마 전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작품 <백년전쟁>을 아이들과 함께 시청했다가 '빨갱이 교사'로 내몰리는 봉변을 당했다.

왜 역사학계가 교학사 교과서 내용을 문제 삼는지 질문하는 아이들에게 답변 삼아 보여주려 했다가 사단이 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교학사 교과서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지나친 미화 문제로 도마 위에 올랐던 터다.

물론, 한국사 수업시수도 부족한 판에, 수업시간을 빌려 모든 학생들에게 다 보여줄 만한 '거리'는 못 된다고 여겨, 궁금해 하는 아이들을 신청을 받아 방과 후에 따로 보여주었다.

그런데, 누군가 게시판에 붙인 안내 포스터를 사진 찍어 '일베'에 올렸고, 그것이 SNS를 통해 일파만파 퍼지면서 신상이 노출됐다.

일베에는 내가 만든 <백년전쟁> 보기 안내문뿐만 아니라 나를 간첩·좌익사범으로 국정원에 신고했다는 인증사진까지 올라왔다. 학생들에게 <천안함 프로젝트>를 보여주고 체 게바라 영상을 틀어줬다며 간첩이란다. 기막혔다.

국정원에 나를 신고했다며 일베에 올린 인증화면. 나는 '좌익간첩사범'으로, <천안함 프로젝트>와 체 게바라 영상을 보여줬다는 걸 근거로 들었다. 신고가 접수됐다는 인증 사진도 덧붙였다.
 국정원에 나를 신고했다며 일베에 올린 인증화면. 나는 '좌익간첩사범'으로, <천안함 프로젝트>와 체 게바라 영상을 보여줬다는 걸 근거로 들었다. 신고가 접수됐다는 인증 사진도 덧붙였다.

종북 세력으로 낙인찍는 몇 통의 전화와 메일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물론, 개중에는 '위로하는' 내용도 있었다. 시절이 하수상하니 얼마 동안은 몸조심하라는. 기실 <백년전쟁>은 인터넷 사용자라면 누구든 쉽게 내려 받아 볼 수 있는데, 단지 그걸 봤다는 이유로 종북이라는 거다. 말하자면, 누구나 볼 수는 있지만 현 정권에서는 봐선 안 되는 작품인 셈이다.

'전교조 교사 맞추기 게임', 인기 좋습니다

한국사 교과서가 '유명세'를 타더니, 전교조도 '인기'가 상한가다. 아이들에게서 전교조가 요즘처럼 주목 받았던 적은 없었다. 선생님들 중 누가 전교조 조합원인지 맞추는 놀이까지 하고 있다. 지금껏 아이들에게 전교조 소속이든, 교총 소속이든, 아무 데도 가입돼 있지 않았든 다 같은 선생님일 뿐, 굳이 소속을 알려들진 않았다.

그런데, 전교조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느닷없는 방침이 연일 언론에 도배되면서 아이들 사이에게까지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다. 많은 교사들이 교과서와 분필 대신 시위 팻말을 들고 매일 아침 교문에 서고, 교무실은 정부의 방침에 따라 전교조 규약 개정을 놓고 찬반 여부를 묻는 투표장이 됐다. 교사들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너무나 낯선 풍경들이다.

지난 19일 오후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전교조 탄압 규탄, 법외노조 결정 철회 촉구 전국교사대회가 열리고 있다.
 지난 19일 오후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전교조 탄압 규탄, 법외노조 결정 철회 촉구 전국교사대회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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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전교조예요, 아니에요?"
"전교조 선생님들은 진짜 종북 세력이에요?"

아이들이 장난삼아 무심코 던진 질문들이지만, 답변을 해야 하는 교사들마다 적잖이 난감해 한다. 전교조 소속이든, 교총 소속이든 마찬가지다. 대체 뭐라고 답변해야 하나. 전교조는 교총을, 교총은 전교조를 서로 비방이라도 하라는 건가. 학교가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나.

교과서와 학교 교육에 여야가 어디 있으며, 좌우가 가당키나 한 소린가. 정치적 의도가 불순한 만큼 결과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그렇잖아도 대학입시에 매몰돼 휘청거리는 학교 공동체를 황폐화시키고 있다. 철모르는 아이들을 부추겨 소속이 다르다는 이유로 동료교사들을 이간질시키는 삭막한 학교. 그것이 정부가 바라는 바인가.

그러나 아서라. 정부와 그들의 주구가 된 언론들의 줄기찬 '노이즈 마케팅'에도 진실은 흔들림 없이 오롯하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종북 세력 척결의 칼춤이 수많은 이들을 고통으로 내몰 수 있을지언정, 결코 진실의 목을 자를 수는 없다. 자칫 임기 5년 내내 촛불과 싸워야 하는 전무후무한 정권이 될지도 모른다.

현 정부 들어 황당하고 몰상식한 일이 어디 한둘일까 마는, 입만 열면 원칙과 약속, 글로벌 스탠더드 운운해온 정부가 이렇게까지 교육 현장을 망가뜨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게 다, 어떻게든 국정원을 비롯한 국가기관들의 불법적 대선 개입 의혹을 잠재우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니 그저 착잡할 따름이다.


태그:#교학사 교과서, #전교조 법외노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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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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