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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아이가?"

두 시간 가까이 추수한 볏단을 묶는 일을 마칠 무렵 할아버님이 한 여학생에게 이야기하십니다. 어깨까지 찰랑거리는 단발머리를 한 여학생이 대답합니다.

"예? 저 여잔데요." 얼굴에 헐~ 하는 표정과 함께.
"아 일케 예쁜 아를 갖고 왜 남자라고 그래요. 참 내."
"헐헐헐 나이를 먹다보니 통 구분이 안 가. 헐헐헐 구분이 안 가."

할머님이 할아버님을 타박하고, 할아버님은 연신 변명을 하십니다. 여학생은 얼굴이 빨개져 헛웃음을 짓고, 같이 일하던 아이들은 배꼽이 빠져라 웃어댑니다. 따뜻한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산골짜기에 한동안 웃음소리가 가득 찹니다.

밀양으로 가을 농활 떠난 아이들

신고리핵발전소 3호기의 제어케이블 부품 성능시험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은 가운데,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는 17일 오전 밀양시 단장면 바드리마을 입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송전탑 공사 중단을 요구했다. 사진은 서울 성미산학교 학생들이 율동을 선보이는 모습.
 신고리핵발전소 3호기의 제어케이블 부품 성능시험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은 가운데, 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는 17일 오전 밀양시 단장면 바드리마을 입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송전탑 공사 중단을 요구했다. 사진은 서울 성미산학교 학생들이 율동을 선보이는 모습.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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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5일부터 19일까지 성미산학교 중고등학생과 교사들은 경남 밀양 상동면 고정마을과 고답마을에서 가을 농활을 진행했습니다. 감도 따고, 고구마도 캐고, 깨도 털면서 농성하시느라 밀린 주민분들의 농사를 도와드렸습니다. 아침에는 따뜻한 미역국, 어묵국을 끓여 추운 새벽부터 농성장을 지키는 어르신들에게 가져다 드렸습니다. 일을 하면서 어르신들과 수다도 떨고, 몇몇 분과는 인터뷰를 통해 살아오신 이야기를 듣기도 했습니다.

고맙다, 고맙다. 일을 도와주는 우리들에게 내내 고맙다고 이야기하시는 어르신들, 농사일이 끝나면 홍시며 고구마를 한아름 안겨주시는 어르신들을 만나는 우리 학생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렇게 일하고, 이야기 나누면서 일주일을 보낸 학생들의 모습은 여행 전에 비해 부쩍 성숙하게 느껴집니다.

밀양과의 인연은 작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012년 6월에 있었던 학교 특강 시간에 이계삼 선생님(밀양 765kV 송전탑 반대대책위 사무국장)을 모셔 우리 교육의 문제에 관한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강의 말미에 밀양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돌아가신 이치우 할아버님 이야기와 공사를 막느라 고생하고 계신 어르신들 이야기였습니다.

밀양에 한번 방문하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2012년 10월 성미산학교 중고등 학생, 교사들은 당시 공사가 중단된 상태였던 밀양을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학생들은 밀양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첫 방문지였던 보라마을에서 이종숙 이장님이 이치우 할아버님 돌아가신 이야기를 하고 계실 때 뒤쪽에서 몇몇 학생들은 도깨비풀을 서로의 옷에 던지며 장난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철이 없던 학생들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이계삼 선생님께서 밀양 상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고, 동화전 마을을 방문하면서 학생들은 조금 더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동화전 마을에서는 어르신들이 겨울을 날 수 있는 황토벽돌 농성장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고, 우리들은 농성장 만드는 일을 돕게 되었습니다. 농성장을 만들기 위해선 15kg 벽돌을 지게에 지고 30분 넘게 가파른 산길을 올라야 했습니다. 당연히 학생들은 어이없어하고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올라간 정상에서 만난 할머님, 할아버님들께서 우리 학생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고맙다, 욕봤다, 물마셔라, 벽돌 이리 줘라, 하나 날랐음 됐으니 고만 해라..."

우리들은 친손주처럼 자신들을 챙겨주시고 걱정해주시는 어르신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에게도 힘든 이 일을 할머님, 할아버님들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했습니다. 아마 몇몇 친구들은 농성장 텐트 옆에 자리한 자그마한 채소 텃밭도 보았을 것입니다. 그 텃밭에는 상추, 쑥갓, 시금치들이 아기자기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어르신들은 힘들고 삭막한 싸움 속에서도 소박하게 삶을 이어가고 계셨습니다. 정상의 농성장에 한번 다녀온 이후 우리 학생들은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진심으로 열심히 벽돌을 날랐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도. 그렇게 우리는 농성장을 짓기 위한 100장 넘는 벽돌을 모두 산 위로 날랐습니다.

핵발전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학생들

밀양에서 이틀을 보낸 마지막 밤에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밀양에 남아서 일을 더 도와드리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또 여러 학생들이 자신들이 서울에서 생각 없이 쓰는 전기로 인해 이곳 분들이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반성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핵발전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밀양에 오는 것이 막연히 부담스럽고, 조금은 무서웠었다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신문기사나 인터넷에서 본 할머님 할아버님들의 모습은 너무 비장했고, 그런 분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와 학생들이 마을과 농성장에서 만난 밀양의 어르신들은 정 많고, 소박한, 그냥 평범한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었기에 학생들이 처음 가졌던 생각은 많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2012년 가을, 밀양시 산외, 부북, 상동, 단장면 주민들이 765kV 송전선로 건설공사에 반대하며 한국전력공사와 갈등을 빚고 있는 가운데, 할머니-할아버지들이 법원에 내기 위해 '탄원서'를 자필로 작성했다.
 2012년 가을, 밀양시 산외, 부북, 상동, 단장면 주민들이 765kV 송전선로 건설공사에 반대하며 한국전력공사와 갈등을 빚고 있는 가운데, 할머니-할아버지들이 법원에 내기 위해 '탄원서'를 자필로 작성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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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에 도착한 첫째 날 이계삼 선생님이 어르신 분들이 국회에 작성해 제출하셨던 탄원서를 보여주셨다. 정말 그 탄원서들은 내가 본 글들 중에 가장 진심어린 글이 아닐까 싶다. 이보다 더 진심을 담아서 간절하게 글을 쓸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들 내용 중에 가장 인상이 깊었던 내용은 '그냥 지금 이대로 살게 해 주세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더 나은 것, 또는 더 많은 것을 원한다. 하지만 농촌에 계시는 이런 어르신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지금 이대로'라는 말이 이렇게 와 닿는 말인 줄은 몰랐다."

"대부분 어르신들은 보상은 필요 없다고 이대로만 살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원하고 큰 꿈을 꾸고 있는 나에 비해 너무나도 소박하셨다. ... 정상에 도착했을 때 한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이 송전탑 싸움 끝나고 평화로워지면 다시 오그라... 뭔가 간절했고 감동스러웠다. 다시 안 올수가 없었고 오고 싶었다. ... 밀양은 내 생각과 달리 정말 좋은 곳이었다. ... 우린 서울에 살고 전기를 쓴다. 송전탑도 전기를 옮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벽돌을 지고 올라간 곳은 정말 아름다웠고, 우리에게 보란 듯이 크레인 한 대가 서 있었다. 힘들게 올라온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시며 손을 꼬옥 잡고 '수고했어 고마워'라고 하시는 할머니들을 보니 더 울컥한다. 내려오는 발걸음이 무거웠고, 다음에 또 올께요 꼭 올께요 하며 약속했다. 할머니는 그래 끝나고 끝나고 끝나고를 반복하셨고 또 눈물이 났다."
                                                            -2012년 2학기 학생들의 여행 후기 중에서

밀양은 저와 우리 학생들에게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 배우는 학교였던 것 같습니다. 평생 농사만 지어오셨기에 어눌하고 투박했지만, 어른신들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화려하고 논리적인 주장들보다 더 깊이 우리의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 정직하게 자신의 노동으로 살아온 이들에게서 배어나오는 진실성이었습니다.  단 이틀간 할머님, 할아버님들과 함께 일하고 이야기했지만 우리 어린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밀양의 어르신들을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언어와 논리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어른들의 판단보다 오히려 정확합니다.

밀양이 너무 아름답다는 학생, 밀양 어르신들이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같이 느껴진다는 학생, 밀양이 고향이 된 것 같다는 학생, 할머님, 할아버님들을 만나며 오히려 힐링이 된 것 같다는 학생. 송전탑 싸움 없는 밀양에 와서 일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 좋겠다는 학생. 이 친구들은 아름다운 자연과, 인정 많은 어른들이 계신 이곳에 송전탑이 세워진다는 것에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어리지만 뭔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합니다.

저는 교사지만 어른은 쉽게 갖기 어려운 이 순수한 감수성을 가진 학생들에게 오히려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리고 우리 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밀양 어르신들에게 지지를 보내고 도움을 드리려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또다른 밀양 주민일 수밖에 없는 이유

그 여행 이후로 밀양의 일은 저희 학교 중고등 학생들의 일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올해 4월 도보여행에서 우리는 울진에서 밀양까지 257km를 걸었습니다. 5월 공사가 재개되고 탈핵희망버스가 밀양으로 떠날 때는 30여 명의 학생들이 버스에 올랐습니다. 학생들은 SNS를 통해 송전탑 반대 인증샷 릴레이를 하기도 하고, 추운 날 농성하시는 어르신들께 보낼 핫팩 기금을 모금하기도 합니다. 아직은 중학생들에게 버겁게 보이는 다카키 진자부로 선생의 <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을 함께 읽는 세미나를 진행하기도 합니다. 이 여러 활동들을 누가 억지로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 자발적으로 합니다.

갈수록 청소년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이 시대에 밀양의 할머님, 할아버님들처럼 우리 학생들 스스로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분들을 저는 만나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일부 언론은 "외부세력이 밀양주민들을 선동하고 있다. 미성년자가 동원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저희 학교뿐 아니라 어르신들께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고 싶어 자발적으로 밀양을 찾는 많은 청소년들의 순수한 마음을 왜곡하는 것일 것입니다. 만약 한전이 밀양 어르신들만큼 어린 친구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그들은 송전탑을 짓는 것에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여행을 마치며 한 선생님은 "밀양의 할머님, 할아버님들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약한 분들 중 하나다. 학생들도 사실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약한 사람들이 서로 돕는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밀양에, 송전탑 공사장에 살지 않는 사람들을 '외부세력'이라고 비판하지만, 밀양에 함께 하는 이들은 같은 사회적 약자, 소수자로서 어르신들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거대한 개발의 흐름 속에 약한 이들이 소외되고 고통받는 일은 예전부터 있어왔고, 지금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부분의 우리 국민들은 사실 또 다른 밀양 주민일 수밖에 없습니다. 밀양의 일은 결국 우리 자신의 일이기에 밀양 어르신들에게 지지와 도움을 보내는 것은 너무나도 정당한 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정부, 한전, 언론들은 밀양 어르신들과 밀양에 함께하는 이들에 대한 왜곡을 멈추고, 공사 중단과 대안 마련을 위한 노력을 지금 바로 시작해야만 합니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성미산학교 교사입니다.



태그:#밀양 송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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