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무례한 무슬림 아저씨의 비밀

버스가 출발했다. 솔직히 나는 '수퍼 제트'에 탑승한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흘라 앞에 앉아 의자를 홱 하고 젖혔던 무례한 무슬림 아저씨가 우리를 돌아보며 어쩔 줄 모르는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나흘라가 아랍어로 무슨 일이냐고 묻자 빠른 이집트 사투리로 와르르 하고 말씀을 쏟아내신다. 사실 뭐라고 하는지 반도 못 알아듣겠다. 알고 보니 그 의자가 고장이 나서 아저씨가 기대기만 하면 뒤로 휙 하고 젖혀져 버렸던 것이다. 아저씨는 나흘라의 부탁을 듣고선 좌석을 당기려 몸을 떼었고 그때 의자는 제 위치로 돌아가 있었다. 그걸 본 아저씨는 의자가 당겨진 줄 알고선 다시 몸을 기대셨고 아저씨가 등을 대자마자 또 좌석은 뒤로 넘어가버린 것이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이 상황, 빈 좌석은 없었고 그렇다고 아저씨가 아홉 시간 동안 꼿꼿한 자세로 앉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는 최대한 우리가 가진 짐을 의자와 좌석 사이에 끼워 넣어 어느 정도 이상으로는 의자가 넘어오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다. 아저씨는 동양 아가씨의 여행길이 불편해진 것에 대해서 당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거듭 미안해하셨다. 뭣도 모르고 아저씨를 무례한 사람으로 생각해버린 내 속단이 부끄러워졌다.

유일하게 보이는 것은 아스팔트 도로와 가끔 마주지나가는 차 몇대가 전부다.
▲ 사막 사이로 난 도로 유일하게 보이는 것은 아스팔트 도로와 가끔 마주지나가는 차 몇대가 전부다.
ⓒ 김산슬

관련사진보기


우리만 빼면 모두 살라피야, 혹시 알리바바 아냐?

사실 변명을 해보자면 우리 셋을 뺀 나흘라 앞에 앉았던 그 아저씨를 포함한 다른 승객들은 전부 이슬람 전통 옷을 차려입고 수염을 길게 기른 살라피들이었고 사실 그들의 인상은 꽤나 험악했다.

살라피란, 이슬람의 성서인 코란과 행동지침서인 하디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삶을 사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을 부르는 호칭이다. 이들은 보통 수염을 길게 기르고 전통복장을 입으며, 종교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끼리 있을 때 장난삼아 저러한 외모의 사람들을 모두 살라피라고 부르곤 했다.

차가 출발하고선 얼마 뒤 그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성이 여행의 안전을 비는 듯한 기도를 시작했다. 십여명의 살라피들이 타고 있는 우리의 버스는 절대 어떤 사고도 날 것 같지 않은 이상한 안도감이 든다.

그런데 이십 분쯤 지났을까, 그들 중 앞에 있던 몇 명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갑자기 이집트 대사관에서 받았던 메일의 내용이 스쳐지나간다. '납치, 강도 사고가 가장 빈번한' 위험 지역으로 규정되어 한국 대사관에서도 여러 번 통행금지를 메일로 통보받았던 시나이 반도. 잠시 잊고 있던 불안감이 또다시 스멀스멀 밀려왔다. 앞뒤 좌우로 돌아봐도 그저 가파른 계곡과 그 사이로 난 황폐한 아스팔트 길 밖에 보이질 않는다.

그 순간부터 '강도가 판을 치는 아주 위험한' 시나이 반도의 이미지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뭐지, 설마 우리 알리바바라의 도적떼라도 만난 거야? 그럼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이 슈퍼 제트는 현대판 알리바바들의 소굴인 것이다.

바로 그때 앞쪽에 앉아 있던 지긋한 나이의 살라피 아저씨가 기사에게 무어라고 말을 했는데 얼마 후 기사는 차를 세웠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설마가 사랍 잡는 건 아니겠지? 우리는 불안한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고,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무언가가 가득 든 묵직한 가방을 꺼내었다. 아무도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내 심장은 정말로 긴장감에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뭐가 들었을까, 노끈? 칼? 도끼?'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거지? 그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그리고 그 손을 뻗어 우리에게 건네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손을 들여다 보았다. 그의 손안에 쥐어진 것은 짭조름한 소금을 입혀 볶은 해바라기 씨앗들이었다.

함두릴라. 함두릴라. 함두릴라(신에게 찬양을). 잠시나마 그들을 의심한 것에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으레 생기곤 하는 신변의 위협에 대한 긴장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오해들. 맘 속으로 나를 다시 다그친다. 엄한 사람을 강도로 몰다니. 이런 오해가 벌써 오늘만도 두 번째다.

시나이반도에서 카이로까지 가는 길은 언제나 황량하다.
▲ 시나이 반도의 풍경 시나이반도에서 카이로까지 가는 길은 언제나 황량하다.
ⓒ 김산슬

관련사진보기


슈퍼제트 가족여행

그 해바라기씨를 시작으로 버스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서로 가진 것들을 내어놓고 나누기 시작한다. 버스에 탄 그들 중 누구도 관광객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강도는 없었다. 오히려 생김새도 종교도 다른 이방인을 가족처럼 챙기는 보기 드물게 신앙심 깊고 정 많은 무슬림들이었다.

정확히 말해서는, 아랍인들 중에서도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막상막하로 정 많기로 유명한 내사랑 이집션들. 그제야 우리는 정말 마음 깊이 안도하며 동시에 진심 어린 감사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긴장으로 마구 뛰던 심장박동이 조금씩 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나흘라는 그 음식들을 이보를 통해 '전달' 받았다. 우리는 낯선 외국인 여자였고 신앙심 깊은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어긋나지 않도록 우리가 아닌 이보의 손을 통해 그것들을 건네었다.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우리는 이보를 통해 새로운 음식을 건네받았다. 오이였다. 그리고 그것을 미처 살피기도 전에 새것이 또 손에 들어왔다. 빵과 토마토 그리고 치즈 두 조각이었다.

작은 버스 안 모든 사람들이 같은 음식을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를 뺀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같은 일행이었을까? 아니었다. 다만 마음씨 좋은 무슬림 아저씨들이 같이 버스를 타게 될 다른 승객들의 몫까지 음식을 준비해 오셨던 거였다.

나는 이제껏 내가 모르는 누군가의 배고픔을 위해 음식을 준비해본 적이 있었던가? 그가 낯선 이들을 위해 준비한 음식을 대접받은 사람 중 하나가 될 수 있음에 내 마음은 행복과 감사로 벅차올랐다. 평생 다시 이런 특별한 식사를 대접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스무 시간이 넘는 여정 속에 주려 있을 이름 모를 누군가의 끼니까지 준비한 그 마음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들의 음식은 나의 주린 배뿐만 아니라 그동안 잊고 있었던 이집트인들의 그 따뜻함까지 가슴에 채워주었다.

요르단에서부터 거의 10시간이 넘도록 함께 배를 타고 또다시 카이로로 가기 위해 9시간 동안 같은 버스를 타게 된 사람들은 전부 기쁜 마음으로 음식을 받아 식사를 했다. 한 가족이 된 기분이었다. 작은 버스를 빌려타고 대가족이 함께 나들이를 떠나는 기분.

같은 음식으로 함께 식사를 하고 있으니 이 순간만큼은 식구(食口)라 칭해도 무방했다. 학창시절 수업시간에 처음 듣고선 "아" 하는 낮은 탄성과 감탄을 금치 못했던, 이후로 내가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가 되어버린 식구. 한국인의 정서인 '정'을 기초로 하는 이 단어를 이집트에서 느낄 수 있음은 이집트가 그리도 내게 친근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언젠가는 나도 같은 마음으로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가만히 기도해본다.

무서움과 걱정으로 시작되었던 여행은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우리를 맞이했고, 처음 보는 살라피 무슬림들과 시작된 슈퍼제트버스에서의 아홉 시간의 동행은 내가 이집트에 왔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해 주었다.

납작한 이집트 전통빵과 치즈.
▲ 우리가 받은 음식 납작한 이집트 전통빵과 치즈.
ⓒ 김산슬

관련사진보기


수에즈 운하를 지나서 아프리카로

창밖은 변함없이 황량한 사막의 모습만 보여주었다. 가끔 나타나는 낙타, 베두인 마을, 그리고 척박한 땅에서 끝내 살아남은 나무 몇 그루가 전부였다.

세 시간쯤 그렇게 달렸을까, 음악을 듣다 배터리가 다 되자 일정한 소리로 반복되는 버스의 엔진 소리에 집중을 하다 이내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차가 멈추는 느낌에 선잠에서 깨었다. 우리가 탄 버스는 수에즈 운하를 건너기 위해 검문소에 서있었다.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운하 수에즈. 수에즈 운하를 중심으로 이집트가 위치한 아프리카 대륙과 아시아 대륙에 속하는 시나이반도가 양쪽에 있었다. 수에즈 운하를 만들려는 시도는 기원전 7세기 이집트 왕조 시절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만약 운하가 만들어진다면 수많은 무역상인들은 더 이상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지중해와 인도양을 오가지 않아도 되었다. 경이로울 정도로 짧게 단축된 두 바다 간의 이동시간은 그 두 곳을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 모았을 테고, 결국 운하는 이집트에게 천문학적인 액수의 수입과 국제적인 명성과 지위를 가져다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만큼 수에즈 운하를 빼앗을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는 이들도 많았다.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영국과 프랑스의 소유권 강탈 그리고 이집트의 국민 영웅 나세르 대통령의 국유화 선언으로 인한 중동전쟁까지.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의 분쟁 끝에 이집트는 마침내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는데 성공했다.

3년 전 처음 수에즈 운하를 지날 때, 나는 운하 위로 떠가는 커다란 화물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동차들은 운하 '밑'으로 나있는 터널을 통해 지나기 때문에 수에즈 운하는 코빼기만큼도 구경할 수 없었다. 그렇게 3년 전과 마찬가지로, 이곳이 그 유명한 수에즈 운하인지 그냥 터널인지도 모르게 우리는 그곳을 건넜다. 우리는 이제 아시아에서 아프리카 대륙으로 막 건너온 것이다.

깔끔한 차림의 택시기사 아저씨와 버스기사 아저씨, 그리고 전통복장의 살라피 아저씨들.
▲ 휴게소에서 살라피 아저씨들. 깔끔한 차림의 택시기사 아저씨와 버스기사 아저씨, 그리고 전통복장의 살라피 아저씨들.
ⓒ 김산슬

관련사진보기


잠시 후 버스가 네 시간 정도의 긴 운행 끝에 차를 세운다. 작은 휴게소 앞이다. 우리는 좁은 통로를 지나 버스에서 내려왔다. 기지개를 펴니 네 시간 동안 같은 자세로 굳어진 몸이 풀리며 우두둑하는 소리가 아주 크게 들린다. 근데 문제는 내 몸에서만 소리가 난 거다.

옆에서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던 나흘라와 이보가 순간 얼음. 상태로 나를 2초간 보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셋은 배가 아파 바닥에 주저앉을 때까지 웃고 말았다. 이보는 나흘라에게 이제 Granny(할망구)라는 별명은 소피에게 양보해야 할 것 같다며 나를 놀린다. 그래, 이제 5시간만 더 달리면 우리는 카이로의 한복판에서 정신을 못 차린 채 또 헤매고 있겠지만 셋이 함께라면 우리는 괜찮을 것이다.

누웨이바 항구에서 일출을 맞이하고 발을 디딘 지 9시간 후. 2012년 12월 30일 오후 5시. 우리는 혼돈의 도시 카이로에 첫 발을 디뎠다.

덧붙이는 글 | 연재글입니다.



태그:#이집트 여행, #수에즈 운하, #누웨이바, #카이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You will never know until you try. 삶의 찰나들을 기록하고 여행하는 WRITRAVELER 가다툰 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