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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이집트와의 첫 만남

2010년 나는 이집트 정부 초청 장학생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집트에 발을 내딛는 순간 난 직감적으로 이곳이 내게 아주 특별한 의미가 될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1년간의 아랍어 연수, 아랍어보다 내가 더 많이 얻은 것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하루도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아 '나쁜 남자'라는 애칭을 지어준 매력이 넘치는 고달픈 나라였다.

하지만 2011년 1월 25일에 일어난 아랍의 봄. 민주화 혁명. 그날 아침, 평화롭고 평소 같았던 주말의 아침에서 달라진 것은 두 가지였다.

끊겨 버린 인터넷과 전화선. 그 후로 일 주일 동안 우리는 계엄령이 내려진 나라에서 모든 외부와의 소통에서 차단된 채 집 안에서만 꼼짝없이 지냈고, 7일째 되던 날 대사관의 지시에 따라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탔다.

독재에 견디다 못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 2010년 1월 민주화 혁명의 시작. 독재에 견디다 못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 김산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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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그 이별이 그리도 힘들고 회복이 더디었다. 예상하지 못했고 준비하지 못했던 이집트와의 이별에 나는 한국에서도 내내 열병을 앓았다. 그리고 2년 뒤, 요르단으로 유학을 떠나며 내 머릿속에는 방학 때 다시 갈 이집트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비행기냐, 페리냐, 육로 이동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리고 2012년 12월 29일. 나는 이집트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요르단의 홍해에 위치한 도시 아까바로 향했다. 사실 이집트까지 가는 방법으로 페리를 선택하기 전까지 많은 고민을 했다.

시간 소모와 체력 낭비를 줄일 수 있지만 돈이 많이 드는 항공, 물론 가장 편한 방법이기도 했지만 새로운 장소에서 마주치는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기에는 너무나 짧고 현대적인 여정이었다.

두 번째 대안이었던 육로는 국경까지 가는 방법도, 교통 편도 너무도 어렵고 위험했다. 게다가 육로로 국경을 건너다 강도나 소매치기를 당하는 경우도 많다고 해서 선택하지 않기로 했다.

마지막 방법이었던 두 나라의 항구가 있는 홍해를 통해서 가는 방법. 편도 항공료로 왕복 페리 티켓을 끊을 수 있는 정도의 가격이었고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 요르단의 항구도시 아까바로 바로 가는 버스도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현지인들의 주된 이동 수단'이라는 사실이었다. 가는 동안 요르단과 홍해와 이집트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며 배를 타고 가는 동안 아랍인들과 함께 부대낄 터였다. 물론 조금 더 고되고 긴 여정이 될 것임을 알았지만 우리는 이동하는 그 하루의 시간 또한 여행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실 내가 만약 혼자서 이집트를 갔다면 나는 비행기를 탔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셋이었다. 내 옆에는 이보가 있었고 나흘라가 있었다. 체코에서 온 이보와 대만친구 나흘라. 요르단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낸 우리는 서로 죽이 잘 맞았고 그들과 함께라면 무서울 것이 없었다.

나일강 유람선보다 열악한 호화(?)페리... 우리 속은 거 아냐?

'함자' 하고 이름을 부르면 활짝 웃으며 달려가 폭 안기던 아이는 버스 안 승객들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 아까바로 가는 버스안에서 만난 아이 '함자' 하고 이름을 부르면 활짝 웃으며 달려가 폭 안기던 아이는 버스 안 승객들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 김산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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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꾸려놓고 보니 또 가방이 꽉찼다. 여행할 때는 여자가 아니라 여행자가 되어야 하는데, 짐 싸기의 고수가 되려면 아직 멀었나보다.
▲ 한 달간의 여정을 위한 가방 짐을 꾸려놓고 보니 또 가방이 꽉찼다. 여행할 때는 여자가 아니라 여행자가 되어야 하는데, 짐 싸기의 고수가 되려면 아직 멀었나보다.
ⓒ 김산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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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로 이집트 가는 거, 비행기보다 아주 싼 것도 아니야. 괜히 몸만 더 피곤해져서 이집트 도착해서는 아무것도 못할지도 모르고, 그게 더 손해야. 그냥 비행기로 가."

요르단에서 이집트로 배를 타고 갔던 선배의 조언이었다.

내가 왜 그 말을 듣지 않았을까 하고 엄청나게 후회하던 중이었다. 내가 너무 낭만에 젖어 무리한 방법을 선택한 건 아닐까 하는 회의감도 들었다. 설레는 선착장을 지나, 처음이라 모든 것이 설레고 새롭던 순간도 이내 식어버린 지 오래였다. 페리의 반은 벽에 설치된 에어컨과 너무 가까워 살을 에는 바람이 얼굴을 때려왔고, 반대쪽으로 가니 요르단에서 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구의 이집션 가장들로 가득 찬 실내는 그들의 체취와 열기로 가득했다. 추위인가, 후텁지근한 열기인가.

"그래도 감기에 고생하는 것보단 더운 게 낫지 않겠어?"

나흘라가 제안했다. 그렇게 가까스로 우리는 무거웠던 배낭을 어깨에서 내려 이집션들의 옆에 풀었다.

출국 수속을 밟을 때부터 우리 셋을 제외한 그 어떤 외국인도, 여행자도 보이질 않았다. 정말 우리뿐이란 말인가, 큰 배낭을 메고 저렴한 경로로 이동하는 백패커(Backpacker)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다니, 왠지 모를 불안함이 밀려들었다.

엘리베이터도 없어 그 무거운 배낭을 메고 여러번을 오르락내리락 했던 요르단의 출국 심사장.
▲ 출국 심사장. 엘리베이터도 없어 그 무거운 배낭을 메고 여러번을 오르락내리락 했던 요르단의 출국 심사장.
ⓒ 김산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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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해보이는 풍경이지만 스피커를 통해 퍼지는 시끄러운 방송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 아까바 항의 출국장 풍경 조용해보이는 풍경이지만 스피커를 통해 퍼지는 시끄러운 방송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 김산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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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쾌한 바람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도 없는 그곳에서 우리는 적당한 자리를 찾아 목을 죄어오는 그 탁한 공기 속 불편한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끈적끈적한 땀이 옷을 적셨고, 내게는 어떤 방법도 없었다. 상황에 대한 무기력함을 느낄수록 짜증 아닌 짜증이 번졌다.

설상가상이었다. 땀 범벅이 된 얼굴을 식히려 들어간 화장실에는 군데군데 오물들이 흩어져 있었다. 변기는 막힌 지 오래되어 사람들은 그 위에 그리고 또 위에 배설을 했고, 그냥 바닥에서 일을 본 것 같았다. 맙소사,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담아내기가 무리인 것 같아 보이는 변기들은 흔들리는 배 안에서 아슬아슬 넘칠듯 말듯 곡예를 했다. 배가 출발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모양새인 것으로 보아 아마도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이런 배를 십만 원 가까이 주고 타다니, 이건 좀 너무하잖아. 비행기를 탈걸.'

열두 시에 출발이라던 페리는 세 시가 넘도록 출발할 줄을 몰랐고, 우리만 속을 태웠다.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잠을 청하는 사람들, 의자에서 졸고 있는 사람들. 속도 좋지, 어떻게 이 의자에서 잠을 잘 수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나중에 결국 그 숙면의 이유를 알았지만 말이다).

조금씩 속에서 부글부글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도저히 화장실에서 일을 볼 자신이 없어 겨우 목을 축일 만큼의 물 외에 어떤 음식도 먹지 않기로 했다.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뱃속은 꼬르륵거렸고, 배고픔을 잊으려 잠을 청하려 해도 이미 땀범벅이 된 몸과 숨쉬기도 힘든 공기 탓에 앉아 있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드디어 페리가 세 시간 만에 느릿느릿 시동을 걸었다. 처음 수영을 배운 바다거북이 이리저리 파도에 휩쓸리며 헤엄치듯 바다가 배를 밀어내면 밀어낸 만큼의 절반을 다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어떤 자체적 동력 장치도 없는 중세 시대의 배처럼 페리는 파도에 몸을 맡기듯 천천히 천천히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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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에서 내려다본 아까바 항의 모습 .
ⓒ 김산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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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피쉬 무쉬킬라!"

배가 움직이자, 사람들이 하나둘 잠에서 깨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어딘가에 줄을 선다. 혹시나 입국 수속 같은 중요한 것인가 하여 물어보았더니, 신문을 사는 거란다. 그중에 한 아저씨가 손사래를 치며 걱정말라는 듯 이야기한다.

"마 피쉬 무쉬킬라, 아디!"(No problem, take it easy!)

우리말로는 '문제없어, 쉽게 생각해' 정도로 해석이 되는 이 이집트식 아랍어 사투리는 각 아랍국가마다 발음은 조금씩 달라도 아랍에서 살아가다 보면 하루에 스무 번은 족히 듣는 말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걱정하지 않고 모든 일을 알라에게 맡기는, 우리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뛰는 그들의 우유부단함. 나 또한 3년 전 처음 이집트에서 성질 급한 한국인으로서 이 나라에서 살아남는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신문을 사러 갔던 아저씨들이 자리로 돌아왔다. 그들은 신문과 함께 사온 샌드위치와 음료 그리고 몇 가지 단 것들이 든 도시락들 중 두 개를 우리에게 건네었다. 괜찮다며 한사코 사양했지만, 결국은 우리에게 빵과 음료 두 개를 떠밀듯 안겨주었고 그들은 다섯이서 삼인 분의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순간, 웃음이 났다. 동시에 코가 시큰했다.

'사람 여행을 해보겠다고 배낭을 멘 나는, 내가 예상한 강도(强度)의 시련만을 예상하고 그 정도만 받아들이려 했다. 수없이 많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 속에서, 나는 대체 어디까지 모든 것이 내 예상과 맞춰지길 바랐던가.'

그래,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그저 그 순간 중 먼지처럼 작은 일부가 되어 살아남는 것. 먼지라 할지라도 처해있는 상황을 온몸으로 즐기려 하는 것. 그래, 이게 진짜 여행인데 말이다.

나는 지금 중동에 있다. 내 마음의 시계를 이곳에서 흘러가는 시간의 속도로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마음을 급하게 먹는다고 페리가 비행기의 속도로 날아가지도 않을 것이며 이 페리를 혼자 전세 내지 않는 이상은 이 숨 막히는 공기를 어찌할 방법도 없다. 모든 것을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때, 아이처럼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온 이보가 배의 갑판 쪽에 나갈 수 있는 계단이 있다며 바람을 쐬고 올 것을 청했다. 언제나 이렇게 해결책은 나타나는 법이다. 아니면 이전부터 있었지만 내 마음에 그것을 둘러볼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맞잡고 다시 웃었다.

밤바람이 쌀쌀해 그 곳에는 거의 사람이 없었다.
▲ 한적한 페리의 갑판 위 밤바람이 쌀쌀해 그 곳에는 거의 사람이 없었다.
ⓒ 김산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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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이집트 여행, #요르단 이집트 이동, #아까바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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